신학교 시절에 동거동락하며 젊은날의 초상을 같이 썼던 친구가 있다. 이념적으로 전형적인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는 친구이고 용어 자체가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합리적 진보(타인들이 명명)의 색채가 있는 사람이라, 친구와는 어떤 부분은 뜻을 같이하지만 또 어떤 부분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논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친구가 걸어온 사목의 길에 대해 머리 숙여 존경의 뜻을 표하고 표한다. 인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도시 빈민들의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서 노숙자, 알콜 중독자, 부랑인(지금도 이 단어가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극단적 소외 계층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이웃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친구의 그 길을 나는 죽었다 깨나도 따라잡을 수 없기에 말이다. 그러니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나의 반응은 머리 숙임 밖에는 없다. 친구가 병살이를 하고 있다. 누적되고 축적된 육신의 결과물이다. 어쩔 수 없는 상태인 것은 알지만 하나님께 떼를 써보기도 하고 윽박도 해본다. “하나님, 아들이 권한 말대로 주린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을 위해 삶을 바친 아들인데 이순을 넘긴 나이에 남는 것이 병든 육신이라면 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단 말입니까? 좋은 말로 할 때 하나님, 당신의 아들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며칠 전, 친구에게 문자 하나를 받았다. 부족한 사람의 졸저 중의 졸저인 『신사사시대에 읽는 사사기Ⅰ』를 읽고 난 뒤에 보낸 피드백이다. 읽다가 막상 그 글을 쓴 저자인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네의 사사기를 보았네. 깊은 울림을 느끼며 나의 성찰이 절실함을 실토하네. 가장 진한 곳은 '부메랑'의 끄트머니에 자네가 권고로 전한 갈라디아서의 말씀이고, '흔적'과 '어떤 이력서를 쓰고 있는가?' 등에서 나의 민낯을 보았네. (중략) 병살이를 하면서, 실감하는 회한과 회개의 통렬함이 있으면서도 정돈하지 못함이 있었는데 사사기를 보며 마치 거울처럼 내가 잘 보이더구먼. 자네가 나를 위해 말해주듯이. 고마우이! 더하여 우리의 주군과 교회를 향한 자네의 치열한 진정을 더욱 실감하며, 정중히 인사를 드리네. 새로운 시간에 주님의 은혜안에서 좋은 인연과 좋은 일상이 세인과 자네의 가족 모두께 풍성하기를 기도하네. 샬롬!” 친구가 보낸 이 글을 읽다가 나는 친구가 갖고 있는 진정한 성결함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보았다. 그렇다. 참으로 녹록하지 않고, 힘들고 힘든 사역의 현장이지만, 해서 그곳에서 사역하다 지쳐 육신의 병까지 얻었지만, 현장에서 살아낸 목회자에게 감히 접근하기도 어려운 거룩함과 성결함의 아우라를 친구에게서 보았다. 근처도 못간 나는 그가 못내 부럽기까지 했다. 생각하는 신앙의 파열음이 친구의 심장을 때리고 있다. 친구가 울고 있었다. 그는 목사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목사다. 그를 사랑해야지. 오늘 내게 주신 미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