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0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창세기 백 마흔세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9:29-33 제목: 가야 하는 인생이라면 서론)
주차장에 벚꽃이 만개했습니다. 얼마나 예쁜지 어제는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진해에서 살았던 5년이라는 삶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웬만한 벚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꽃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연륜의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렇게 만발한 아름다운 벚꽃은 오늘을 기점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벚꽃의 개화와 낙화는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너무 갑자기 피었다가 순식간에 지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벚꽃을 사쿠라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금방 피었다가 지는 것이 어디 사쿠라 뿐이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매일반입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에 서울 아현성결교회에서 이요한 목사가 목사로 안수를 받고 첫걸음을 디녔습니다. 아들이 목사안수를 받는 날, 아주 묘한 느낌이 제게 왔습니다. 아들이 입고 있는 목사 로브를 불과 얼마 전에 저는 청주 서문교회에서 입고 있었습니다. 아들의 안수 시간에 기성 총회장이 읽는 안수문은 제게는 신학교 선배이셨고 어른이셨던 고 이만신 목사님께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읽으셨던 바로 그 안수문이었습니다. 읽는 대상과 장소만 달랐을 뿐이지, 같은 글이었고 똑같은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32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입니다. 32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은 참으로 긴 시간이지만, 제가 느끼는 간극은 바로 어제 피었다 오늘 지는 것 같은 사쿠라의 시간과도 순식간이었습니다. 자다 일어났는데 3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흐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에게도 끝이 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당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끝이 온다는 말을 두려움이나 고통스러운 일로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입니다. 만에 하나, 누구에게는 이 일이 있고 또 누구에는 이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면, 그건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니 그대와 당신에게 공평하게 끝이 있을 것이니, 이로 인하여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 제시된 두 개 구절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29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그다음은 33절입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조상에게로 돌아간다고 백성에게로 돌아간다고 피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은 이제 드디어 이 땅에서의 길을 마감하고 그가 가야 할 시간이 왔음을 창세기 기자를 통해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야곱은 자식들에게 미래에 그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예고했습니다. 지난 주간 수요일에 설교했던 그대로 아들들이 갖고 있었던 믿음의 분량대로 복과 그 반대의 불행도 주저하지 않고 선포한 야곱은 그가 가야 할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는 열조들이 갔던 길로 가기에 앞서 자식들에게 엄숙한 명령을 하나 하달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할 것을 엄히 명합니다. 이곳 애굽 고센에 영원히 나를 묻지 말고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로 시신을 가지고 가서 매장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막벨라 굴에 대한 설명을 창세기 기자는 놓치지 않습니다. 30〜32절을 읽겠습니다.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곳, 할머니 사라가 묻힌 곳,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사랑했던 아내는 아니지만 첫 아내였던 레아를 매장한 곳에 자신을 묻을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 엄숙하고도 분명한 명령을 받은 요셉과 아들들은 애굽에서 야곱의 시신을 방부제 처리한 뒤에 먼 고향 땅, 막벨라로 옮겨 아버지의 유언을 이행하였음을 우리는 다음 주간 50장 마지막 강해 시간에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막벨라로 가서 내 시신을 매장하라는 명령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야곱은 야훼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정체성에서 이탈하지 않겠다는 영적 자존감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말년의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갖고 있었던 야훼 신앙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말년의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갖고 있었던 야훼 신앙에서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먼저 창세기 28:13〜14절을 읽겠습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의 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피신하기 위해 길을 떠난 어느 날, 하란에 도착해서 돌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을 때 오셨던 야훼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조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제 창세기 32:9절을 봅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이 얍복 강을 건너기 전날, 에서가 강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께 기도하며 상기했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32:9절은 창세기 28:13〜14절의 약속을 붙든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창세기 35:11〜12절을 복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야곱이 세겜에서 딸이 강간당하는 험한 꼴을 본 후에, 창세기 28장에서 소개했듯이 벧엘의 감격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윽고 늦은 감은 있었지만 하나님께 약속했던 그대로 밧단아람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면 이곳 벧엘로 올라와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 제사를 드리는 야곱에게 오셔서 다시 재확인해 주신 조명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약속한 땅을 너에게 줄 것이라는 이 엄위하신 약속을 야곱은 붙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구절만 더 접근하겠습니다. 창세기 46:1〜4절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요셉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전언해 듣고 애굽으로 떠나기로 마음먹은 야곱이 노정에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때, 야훼 하나님께서 애굽행을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에게 오셔서 그를 위로하시며 안심할 수 있도록 조명하신 말씀입니다. 이상 소개한 야곱의 전 인생 여정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이 보입니다.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전방위적인 삶의 순간마다 그를 간섭하시면서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계대를 통해 이어온 야훼 하나님 신앙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서게 하셨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 선조들이 섬기며 붙들었던 야훼 하나님 신앙을 본인 스스로가 견지하는 마지막 대단원의 클라이맥스로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제시한 막벨라 굴에 묻으라는 상징적 명령이자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텍스트를 만날 때마다 다시 곱씹는 은혜가 있습니다. 열 번도, 백 번이라도 다시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주님이 가장 존귀하신 분이라는 신앙의 자존감에게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즉 주존감(主尊感)에서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빌립보서 1:17〜21절에서 바울은 대단히 위대한 신앙고백을 선포합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교회 공동체 안에는 로마 감옥에 수감 된 바울을 보면서 쾌재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때문에 항상 2선으로 밀려 있었던 예수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의 투옥 소식에 그들은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 호재로 여기며 기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메시지’ 번역으로 이 대목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물론, 이 지역에 있는 어떤 이들은 내가 없는 틈을 이용해 사람들의 주목을 한 번 끌어 보려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들은 내가 이곳에서 메시지를 변호하고 있음을 알고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를 도우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내가 사라지자, 이일에서 뭔가를 얻으려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이 일을 합니다. 그들은 악한 동기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를 경쟁자로 여기고, 나의 상황이 악화될수록 자신들의 상황은 더욱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겠습니까? 나는 그들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든 악하든 분명치 않든 간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누구라도 입을 열 때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그저 박수를 보낼 뿐입니다. 나는 일이 어찌 될지 알기에 계속해서 그들을 응원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여러분의 기도와 넉넉하게 응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나를 통해 하시려는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나는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감옥에 갇혀 있는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리스도를 더욱 정확하게 알리는 데 도움이 됩니 다. 저들은 내 입을 다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게 설교단을 마련해 준 셈입니다. 나는 살아서는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고, 죽어서는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지금의 삶과 훨씬 더 나은 삶! 어느 쪽이든 내게는 유익입니다.” (메시지 빌립보서 1:15-21) 무시무시한 바울의 이 고백 앞에서 할 말을 잃을 정도의 감동을 받습니다. 바울의 입장으로 볼 때 악한 자들의 소위를 생각하면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할 것이라고 말한 바울의 선포는 대단히 귀하고 아름다운 선포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오로지 한 가지, 주님이 높여지면 된다는 주존감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요일 새벽에 권미숙 집사께서 셀 원들이 화요일 저녁밖에는 셀 예배를 드릴 시간이 안 되어서 화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하기에 부득이 주일 설교를 화두로 셀 나눔을 해야 하는데 얼음 깨기 내용이 마땅히 생각이 안 나 제게 SOS를 요청했습니다. 해서 그날 권 집사께 보낸 얼음 깨기 내용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세인 교회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으로 갖고 있는 자부심은?” 어떤 내용으로 결과물들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담임목사가 소망하는 새인 지체들의 자부심은 ‘주존감’이었기를 기대합니다. 설교의 서두에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는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예외자나 열외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을 가는 자로써 그날에 주군께 보고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 보고서에 이렇게 교우들이 쓰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믿었던 주존심을 사수한 삶을 살았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죽음의 날에 하루 다가섰다는 말이다.” 얼마나 명징한 성찰입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가야 하는 길로 오늘도 걸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목사로서 이런 감회에 젖어 봅니다. 그날이 임할 때까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가야 할 나의 막벨라 굴에 도착할 때까지 이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 주님은 나에게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존귀하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태어나면서 시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찬송 작사가 화니 크로스비 여사는 주님이 가장 존귀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큰 바위 및 안전한 그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주 손으로 덮으시네 이 주존감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기도 제목 1) 하나님, 주존심을 갖고 내 평생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2) 하나님, 우리 세인교회가 주님만 사랑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3) 하나님, 우리 세인교회에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는 동역자를 보내 주십시오. 4) 하나님, 우리 가정이 예수로 충분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5) 하나님, 우리 세인 교회의 전 영역이 예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