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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25년 1월 8일 수요일 설교 (요한복음 23번째 강해): 분명한 것2025-01-08 11:36
작성자 Level 10

202518일 수요일 설교 (요한복음 23번째 강해)

 

제목: 분명한 것

본문: 요한복음 3:1821

 

서론)

 

김승희 시인의 꿈틀거리다시 한 편 감상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꿈틀거리다

꿈이 있으면 꿈틀거린다

꿈틀거린다,라는 말 안에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이라는 말이 의젓하게 먼저 와 있지 않은가

 

소금 맞은 지렁이같이 꿈틀꿈틀

매미도 껍질을 찢고 꿈틀꿈틀 생살로 나오는

어느 아픈 날 밤중에

가슴에서 심장이 꿈틀꿈틀할 때도

 

괜찮아

꿈이 있으니까 꿈틀꿈틀하는 거야

꿈꾸는 것은 아픈 것

토마토 어금니를 꽉 깨물고

꿈틀꿈틀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

 

(신경림외 한 사람의 노래가 온 거리에 노래를, 창비, 137)

 

왜 그런지 이 시를 읽다가 묘한 감동이 제게 임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연()에서 시인이 말한 시어는 비장하다는 느낌까지 들게 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살아온 마지막 자존심이야말로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꿈틀거림이라고 표현한 시인의 고백에서 왠지 인간이라면 잃지 말아야 할 최후의 보루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 저 또한 시인의 토로에 전적으로 지지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렇구나. 꿈이 있으니까 꿈틀거릴 수 있구나!

이 시어는 시인이 선사한 선물과도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꿈틀거림이라는 동사적 명사는 왠지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움직임의 궁극은 살아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기에 그 꿈틀거림 자체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음은 저 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설적으로 그 꿈틀거림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거룩한 오기가 오롯이 다가왔습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은 귀합니다.

신 사사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전방위적인 영적 공격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무감각으로 유혹하는 일입니다.

느끼지 못하게 하는 공격 말입니다.

성도에게 임한 최악의 재앙이자, 저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면교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본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내가 이 땅에 온 이유, 또 나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의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니고데모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복을 알려준 후에 이 분명하고도 명확한 진리를 수용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극명한 차이를 연이어 고지(告知)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 1819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미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천명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매번 도전받는 부분이 있습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이지?

C.K 바레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심판을 받은 것이다. 완료시제이다. 심판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C.K 바레트, 국제성서주석-요한복음Ⅰ』, 343)

분명히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았다고 강조합니다.

도대체 과거에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 설교 서두에 한 편의 시를 소개한 이유로 그 답을 제시한다면 퍼즐이 맞춰 집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깨닫지 못하게 된 무감각이 바로 심판이라는 메시지입니다.

목양의 현장을 섬기며 평생을 달려오며 목회 임상을 통해 배우게 된 학습이 있습니다.

많은 환란이 임해도 그 고통을 이겨낸 성도들의 면면을 보면 중요한 공통 분모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민감성입니다.

즉 깨달음에 있어서 대단히 예민하다는 공통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온전한 믿음을 지니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울림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합니다.

요한복음 12장으로 초대합니다.

13절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텍스트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마리아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 향유를 예수님의 발을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다는 엄청난 헌신을 요한복음 저자가 보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마리아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0:38절 이하에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자기 집에 심방 온 예수님을 맞이한 방식이 달랐던 일화가 소개됩니다.

이 텍스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임으로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그녀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는 베다니에 늦게 도착한 예수님을 향해 나름 원망, 자조함 등등이 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이렇게 투정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30-32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완벽하지 않았던 마리아의 미성숙함을 보고해 주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이후 예수께서 이미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썩는 냄새가 나는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기적을 체험하면서 간증이 있는 신앙인으로 변화되었음을 곧이어 보고한 복음서 담론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향유 옥합을 깨뜨린 성숙함이 그 증거입니다.

마리아는 오라버니는 다시 살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후, 흔들리지 않는 전폭적 신뢰와 믿음으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다시 말을 바꾼다면 우리는 마리아는 주님에 대하여 철저하게 민감한 믿음으로 변화되었다는 성경적 증언을 복음서에서 만나게 됩니다.

오늘 설교에서 마리아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깨닫는 믿음의 결과물은 민감함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 설교의 교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은 영적 깨달음을 위한 민감성을 유지하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1921절로 돌아갑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공동 번역 성경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복음의 메시지가 이렇게 선명한데, 그 선명성을 축소시키려는 사탄의 궤계가 지금 시대를 휘감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공격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이렇게 사탄의 공격이 첨예한데도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의 상당수가 그게 뭐 어떠냐는 식으로 전혀 문제 삼지 않는 무감각에 마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전 아이든 토저의 글을 읽다가 의미가 있어 밑줄 그은 텍스트가 있어 소개합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평생 내가 24시간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늘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나침판 비유를 들고 싶다. 잘 알듯이 나침판의 바늘은 북극을 가리키는 성질을 갖고 있다. 북극은 나침판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나침판의 바늘을 옆으로 밀면 그것은 북극이 아닌, 다른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하지만, 손가락을 떼면 그것은 언제나 즉시 다시 북극을 향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늘 바쁘다. 어머니는 아이를 돌보느라, 학생을 책과 씨름하느라, 트럭 운전사는 운전하느라 바쁘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떼어놓는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우리의 주의를 빼앗지 않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말고, 마치 나침판이 북극을 향하듯이 하나님을 향하라.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아이든 토저, 세상과 충돌하라, 7980)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라고 일갈한 아이돈 토저의 이 글 맥을 나는 이렇게 패러디하곤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민감하라.

성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내 고개를 돌리는 민감성을 상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 얼굴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면 주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 방향성이 집중되어 있으면 진리를 따르게 됩니다.

적어도 마리아처럼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여겨지는 향유를 쏟아부을 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흔들립니까?

왜 매일 넘어집니까?

주를 향해 내 얼굴을 돌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가치로 내 얼굴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 예배 시간에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왜 점진적이지만 온전히 헌신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 민감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삶의 후반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신앙의 생활의 가장 치명적 암세포는 무뎌짐입니다.

무감각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독일에서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마취 주사를 손에 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최후이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본다. 드디어 입이 움직거리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세 번 되풀이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이다.” (김준곤, 예수 칼럼, 42)

너덜너덜해진 김준곤 목사의 예수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예수 칼럼이라는 책을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으로부터 서울신학대학교에 편입할 때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때가 가장 성령 충만했던 시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수없이 많이 울면서 독서를 한 기억이 오롯합니다.

더불어 이 책은 제게 목사로서 지녀야 할 소양과 목회적 기초를 제공해 준 잊지 못할 책이기도 합니다.

92년에 선물 받은 이 책은 수정이 이제는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손에 들고 읽은 책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 책을 손에 들 때마다 저를 전율하게 하는 그 무언가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신학대학교에 입학할 때 가졌던 처음 마음, 즉 첫사랑 때문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 두 눈이 충혈되지 않았던 적이 별로 없었던 그 시절을 다시 상기해 주기에 그 책을 서고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거의 외울 정도의 내용들이지만, 또 읽고 또 읽습니다.

읽을 때마다 20세 시절의 제가 복기됩니다.

그때는 그렇게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사랑,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달려온 지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에 비해서 많이 약해졌겠지만, 오롯이 다시 곧추세우며 긴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민감성입니다.

무뎌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나는 끝까지 이 민감함을 사수하려고 합니다.

이 민감함이야말로 성도에게, 목사에게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정정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성도들의 영적 민감성은 약해질 것이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이 민감함 위에 목사인 저는 설 것이라고.

이제 그 시절, 매번 울면서 불렀던 찬양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나는 비록 약하나

 

1) 나는 비록 약하나/주의 힘은 강하다/어려울 때 도우시니/날마다 가까히 걷겠네

2) 세상 유혹당할 때/자주 넘어지오나/주님밖에 그 누가/내 짐 대신 질 수 있을까

3) 아침 안개와 같이/나의 생명 걷힐 때/주의 인도함 받아/저 천국에 갈 수 있겠네

 

후렴)

 

나를 허락하시어/주 가까이 하도록/날마다 더 가까이/나를 이끌어 주소서

 

기도 제목

 

2025, 세인 교회의 목양을 인도하옵소서.

2025, 세인 지체의 현장을 지켜주옵소서.

2025, 세인 교회에 믿는 자의 수가 많아지게 하옵소서.

2025, 세인 교회가 세상에 더 아름다운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하옵소서.

2025, 세인 교회의 교회학교가 부흥하게 하옵소서.

2025, 담임목사의 목양이 승리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