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아홉 번째 강해) 제목: 당연하다 본문: 요한일서 3:1-3 서론) 얼마 전에 아들이 엄마에게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전언해 주어서 아내가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불이 나게 음식을 만들어 택배로 공수해 보냈습니다. 아들이 먹고 싶어했던 음식은 삶은 양배추, 호박 잎 쌈에 우렁쌈 된장을 얹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했습니다. 씨도둑질은 못한다고. 또 얼마 전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와이프에게 끓여달라고 했는데 끓인 김치찌개가 부대찌개였다고. 토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끓여주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이야기를 듣다가 생각했습니다. 피는 못속인다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애호 식품이 김치찌개인데 먹성도 어쩜 그렇게 닮았는지 DNA는 또 다른 DNA를 낳는게 분명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르치지 않았는데 어느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족적들이 부모의 족적과 닮은꼴이라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싱어송라이터인 SG 워너비 출신의 김진호씨가 한 공영방송에 불렀던 『가족 사진』이라는 노래가 많은 대중들의 심금을 울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곡의 일부 가사가 이렇습니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은 운명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하늘의 순리이기도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이런 공식은 단지 부모 자식간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 일임을 교훈하는 텍스트입니다. 요한일서 저자가 오늘 본문에 적시한 메시지를 귀담아 보십시다. 본문 1절 전반절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이 구절을 표준 새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은 요한복음 1:12절의 주석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일찍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주군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울은 이렇게 부연하며 확장 해석했습니다. 로마서 8:14-17절을 복기하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그때로부터 양자라는 신분 변화를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고 역설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양자들은 이후부터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상속자도 된 것이라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자녀 즉 양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써 권세를 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왜 상당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 1절 하반절이 이렇게 그 이유를 대답해 줍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여기에 ‘그러므로’라고 번역한 인과관계 전치사 ‘디아’의 원래의 뜻은 ‘〜통하여’(through) 라는 의미인데 어떤 경우에는 반위 접속사로도 번역이 됩니다. 즉 ‘그러나’로 번역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버전 중에 『현대인의 성경』이 반위 접속사로 번역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를 몰라보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하는 이 땅과 그 속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고 도리어 호전적입니다. 그 이유를 요한일서 저자는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의도적으로 모른 체하려 한다고 요한일서 저자는 일설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역설을 한 번 들어보십시다. 고린도후서 6:14-16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지난 주일에 선포했던 것처럼 성도는 세상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들과 별리 된 장소에서 따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안 됩니다. 골로새 교회에 편지한 바울이 그래서 이렇게 토로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3: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제가 운동하는 탁구장은 매월 1회에 걸쳐 월례대회를 합니다. 더불어 매년 6월이 되면 야외로 단합대회 형식의 친교 모임을 갖습니다. 이번 달 29일이 그날입니다. 지금 제가 나가는 구장을 선택해서 운동을 다시 시작한 지가 11년차를 맞습니다. 11년 간, 단 한번도 야외 단합대회를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단합대회라고는 하지만 먹고 즐기고 부어라 마셔라의 난장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동아리 회원 중 한명이 언젠가 제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시간을 한 번 내셔서 참석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회원의 말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목사님, 절대로 참석하시면 안 됩니다. 참석하는 순간 난장판이 깨집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참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기로 했습니다. 언젠가 월례대회 때, 주변 성결교회 신자인 집사 하나가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제게 이렇게 농을 건넸습니다. “목사님도 맥주 한 잔 하시죠. 여기에 신자가 없는데 어떻습니까? 아무도 보는 사림이 없으니까 한 잔 하시죠?” 가능하면 탁구장에서는 화를 내거나 꼰대 짓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한 마디를 했습니다. “집사님이 신자라서 못 먹겠는데요. 집사님이 보잖아요. 그것도 성결교회 신자인 집사님이.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디가면 성결교회 신자라고 말하지 말고 신천지 신자라고 하세요.” 이후에 그가 제 정신일 때, 내게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경솔해서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분 언짢게 해드린 것 사과드립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들도 매일반입니다. 아니, 너무 아픈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성서적으로 접근하면 이런 추세는 당연합니다. 1절 후반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막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본문 2절로 진도를 나가보십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지 않는다고, 세상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조롱한다고 실망하지 맙시다. 요한일서 저자는 수신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의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밝히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분을 뵐 것이며, 그분을 뵐 때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유진 피터슨, 『메시지-요한일서 3:2』)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망하지 말고 붙들어야할 영적 자세가 있음을 요한일서 저자는 역설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이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을 뵐 것이며, 그분과 같이 될 것이기에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3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족을 남깁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녀된 자의 권세를 받은 자가 당연히 소망를 갖고 살아내야 할 미션을 3절이 알려줍니다.
※ 성결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주님이 깨끗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깨끗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저는 성결교회 신학을 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제가 배웠던 사중복음은 대단히 성서적이며 복음적인 교리입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이 네 가지의 복음적 가치 중에서도 ‘성결’이라는 단어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구원 그 이후’를 살아가는 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대헌장이 바로 성결한 삶이기에 그렇습니다. 레위기 11:44-45절을 읽겠습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거룩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하명하신 구체적 내용이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별된 삶이 바로 성결한 삶입니다. 요한일서 저자는 우리에게 바로 레위기서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로 그 삶을 요구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저자가 3절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복기하십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이 깨끗하심과 같이 우리 스스로도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억지로 해야 하는 당위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 14:1-2절을 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사사기 기자가 나면서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된 아이였던 삼손의 일대기를 설명한 첫 번째 담론입니다. 사사의 역할을 맡은 삼손이 제일 먼저 사사직의 공적 활동을 감당하기 위해 내려간 지역이 딤나였음을 밝힙니다. 딤나는 삼손이 태어났던 고향 소라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오늘의 ‘텔-엘 바타쉬’ 지역으로 추측되는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가 단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이었으나 당시 블레셋에게 통치권이 넘어간 이방의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이 사사의 직분자로 왜 딤나로 그곳으로 내려갔는지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고 있기에 자세하고 명확한 내용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이라는 자기 직무를 유기했다는 점입니다. 사사로서 블레셋으로 넘어간 삼손이 마땅히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적의 도시엿던 딤나로 내려간 것까지는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그가 그곳에 가서 행한 짓은 엉뚱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4:1-2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여자를 보고”(1절),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2절)에서 보듯이 ‘보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일반적으로 ‘보다’(to see)라는 의미로 제일 많이 사용되지만, 문맥에 따라서 ‘눈요기하다’라는 ‘쾌락적 보기’(looking with pleasure)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1〜2절의 상황으로 접근할 때 삼손이 딤나의 여인을 본 그 ‘봄’(seeing)은 ‘욕정을 갖고 보는 봄’이었다는 해석에 가깝습니다. 그 증거가 사사기 14:3절입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삼손이 말한 어처구니없는 요구에 대하여 삼손의 부모는 당연히 반대합니다. 부모의 반대 이유는 이방인과의 혼합 결혼을 율법에서 금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였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가 막무가내로 부모에게 떼를 씁니다. 그 떼씀은 3절 후반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영어 성경 NRSV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her for me, because she pleases me.” (나를 위해 그녀를 갖게 해주세요. 그녀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가 내 눈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로 번역했다는 말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민족을 구원해야 하는 의미를 망각한 채, 여자를 정욕의 대상으로 보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은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인데 그 구별됨을 완전히 망각하고 상실했기 때문에 자행한 직무유기의 범죄였습니다. 구별됨 즉 성결함은 세속적인 풍토와 결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은 결별이 아닌 합침이라는 악수를 두었습니다. 저는 『신 사사 시대에 읽는 사사기 Ⅱ』 제목 밑에 삼손 스토리를 재 조명하고 설명하는 13〜16장인 제 8부 세션의 부제를 이렇게 달았습니다. “존재했음이 더 불행이었던 사사” 성결하라고 했는데 성결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자는 존재하는 것이 더 불행인 자이지 않겠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3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은 으스대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결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임에도 자기를 위해 살았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성결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성결하시기에 당연히 그를 따르는 나도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갖고 사는 자는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철저히 성령을 의지합니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이 쓴 책에 이런 돈키호테식 발언이 들어 있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길을 찾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독서의 어느 부분은 길을 잃기 위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동진, 『닥치는 대로 끌리는 데로 오직 재미 있게 이동진 독서법』, 위즈덤 하우스, 86-87쪽) 길을 잃기 위해 독서를 한다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이 글을 쓴 사람과 비슷한 지성적 내공이 있는 사람만이 이 글의 의미를 이해할 테니까요. 제가 이동진 평론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갖고 있는 비 상투성 때문입니다. 떨어져 나와 있어야 큰 것을 보며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세속주의의 복판에 있으면 성결할 수 없습니다. 그 복판에서 떨어져 나와 구별된 곳에 있어야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명심하십시오. 구별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며 성결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미션임을 말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지금은 비록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 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 둔 내 소망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 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 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