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일곱 번째 강해) 제목: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본문: 요한일서 2:12-17 서론) 바울의 여정을 돌아보았던 소아시아 7 교회 성지 순례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튀르키에에 도착하여 카파도키아 지역을 순례하다가 방문한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제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1965년 어느 날, 튀르키에 네브세히르 한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가축 하며 기르고 있는 닭들이 사라지는 것을 이상히 여겨 추적해 보니 한 함몰된 곳에 닭들이 빠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닭들을 구조하다가 발견한 곳이 데린쿠유였습니다. 지진지대였던 데린쿠유는 사람들이 땅을 손으로 팔 수 있는 석회암질이기에 지하도시 건설에 용이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64-313년까지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를 극심하고 핍박하던 시절, 신앙의 자유를 위해 기독교인들이 지하를 파서 도시를 형성한 것인데 성지 순례 기간, 제일 첫 번째로 방문했던 데린쿠유를 보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던 감동이 새록새록 합니다. 약 15층 아파트의 규모로 되어 있는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안전상의 이유로 관광객들에게는 8층까지만 개방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거하던 방들은 지천에 있었고, 동물들을 키우던 지하 축사, 물을 담아두었던 우물, 식량을 저장하던 창고, 그리고 혹시나 모를 외부의 침입에서 살아남기 위해 길 자체를 미로처럼 엮어 설계했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감동은 지하 8층에 있는 예배당과 신학교 건물이었습니다. 약 20,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지하도시에서 그들이 가장 위대한 삶의 가치로 여겼던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밤이 깊은 시간이 되어야 지상으로 나와 숨을 돌렸던 그들이지만, 그들이 이 어려운 삶을 영위했던 유일한 이유는 신앙의 자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소중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신학교 건물에서 성지 순례팀이 함께 불렀던 찬송은 지금까지 불렀던 그 어떤 찬송보다 감동적인 찬송가로 기억됩니다.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찬송가 336장 1절) 우리가 이미 익히 주지하다시피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서 기독교는 자유를 찾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류적인 이해 중의 하나는 지하 종교였던 기독교를 지상 종교로 탈바꿈하게 해준 대단히 고무적인 인물로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설교의 테제로 이 사안을 설명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고의 틀은 바꿀 필요가 있다고 여겨져 간단히 피력하고자 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그가 313년 로마의 종교 중의 하나로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그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로마 통치의 정치 공학적 이해 때문이었습니다. 이것도 오늘 설교의 논외로 하겠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밀라노 칙령 이후, 데린쿠유와 같은 지하도시에서 숨어 살아야 했으며 숨죽여 살아야 했던 지하 종교였던 기독교에 경천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주후 64년부터 313년까지 거의 250년간 이어져 온 기독교 핍박의 시대가 저물고 이제 기독교가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제 은둔의 종교에서 무대 중앙에 올라선 종교가 된 시기가 바로 밀라노 칙령의 시기인 313년이었습니다. 밀라노 칙령의 골자가 이렇습니다.(시오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4-그리스도의 승리』, 한길사, 98쪽) ⓵ 다른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로마 종교로 공인 한다. ⓶ 탄압 시대에 몰수했던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거기에 필요한 보상은 국가가 하기로 한다. 드디어 기독교에 서광이 비친 셈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제 기독교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지성적 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대단히 놀랄 만큼 시니컬합니다. 그들의 평가는 정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주후 313년부터 기독교는 영적 몰락의 시기로 들어섰다.” 지성적 그리스도인으로 평가받는 김두식 박사는 자기의 책에서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를 이렇게 해석했는데 의미 있게 들여다볼 성찰입니다. “세상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김두식,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홍성사, 109쪽) 왠지 모르게 김 박사의 성찰이 두려운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교회 안에서 끌고 들어왔다는 말은 긍정의 의미보다 부정의 의미가 더 많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일 설교를 통해 바로 이 테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세상이라는 영역은 어떤 영역일까요? 요한일서 저자는 세 가지가 통치하는 영역임을 밝힙니다. 본문 16절을 읽겠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저자는 세 가지를 들춥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통치하는 곳이 세상이라고 적시합니다. 이 세 가지는 앞에서 열거한 세대 간이 경험하는 일과 직결됩니다. 13〜14절을 살펴봅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구절을 토대로 저자는 세 세대를 거론합니다. ⓵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육신의 정욕에 노출된 계층입니다. ⓶ 청년들입니다. 청년들은 안목의 정욕에 심각하게 노출된 세대입니다. ⓷ 아비들입니다. 아비들은 이생의 자랑에 유혹받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러기에 전 세대가 걸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는 바로 이곳이 세상임을 저자는 천명한 것입니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신학대학원의 신약학 교수인 무디 스미스가 소개한 13〜14절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했는데 들어볼 만합니다. “세상은 세상이 불러일으키고 또 그 안에서 세상이 지배하는 탐심과 욕망을 염두해 두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을 ‘섹스’, ‘돈’, ‘권력’으로 번역해도 큰 착오가 없을 것이다.”(무디 스미스, 『현대성서주석-요한 1,2,3서』, 한국장로교 출판사,100쪽) 21세기를 잠식하고 있는 세상은 스미스의 지적대로 세 가지의 지극히 세속적 의미들이 잠식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 보면 스미스 교수의 말은 그 무게감이 탁월해 보입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내 삶의 현장에 육신의 정욕(섹스), 안목의 정욕(돈), 이생의 자랑(권력)에서 치외법권적인 예외 장소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단 한 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이 분야에서 20세기에 선도적인 혜안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을 독려했던 위대한 영성 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한 세기 전부터 이렇게 경고했음은 너무 시의적절했습니다. “역사를 통틀어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와 같은 문제(섹스, 돈, 권력)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얽혀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돈은 곧 권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또 성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권력은 곧잘 ‘최상의 최음제’로 불리고 있다.”(리처드 포스터, 『돈, 섹스, 권력』, 두란노, 1989, 10쪽) 벌써 35년이 훌쩍 넘은 올드한 정의지만 빼박의 성찰입니다. 세속은 30〜40년 전이나 오늘이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치열한 세속이라는 현장에서 발을 딛고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기막힌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말장난이나 언어유희가 아니라, 정말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레마를 터치하다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게 가능한가? 성경 구절 하나 다루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6:12절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리스도인들이 맞서야 하는 대상은 혈과 육에 관한 자들이 아님을 밝힙니다. 이미 차원이 다른 대상과 싸워야 하는 존재가 그리스도인임을 바울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밝힌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라고 적시했습니까? 통치자, 권세들입니다.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조금 좁혀진 느낌입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하는 상대는 권력이요, 돈이요, 섹스입니다. 이것과 동떨어진 상태에서 이들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대적들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낳은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사회학자로 정평이 난 쟈크 엘륄이 이렇게 진단했던 글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으므로, 그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코 폐쇄된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쟈크 엘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대장간, 13쪽) 우리는 운명적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힘들어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이것 자체를 외면하고 부정하면 그는 도피주의자요, 염세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또 하나 명심할 것은 통치자, 권세, 어둠의 영들에게 속해서도 안 됩니다. 속하지 않는 방법을 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제시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5절을 읽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말씀 안에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는 신비와 위력이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여전히 상존하지만 빛으로써의 역할을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빛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어둠은 속성 자체가 빛과 상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 빛의 존재로 여전히 있어야 어둠의 세력들을 경성시키고 끝내는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간, 시집 하나를 들고 소파에 앉았습니다. 시인 유하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건/지혜도 자존심도 거창한 그 무엇도 아닌, 그저 내가 나를 착하다, 라고 인정할 수 있는 거였다/저 눈보라 속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그 시린 발을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이었다.” (유하,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저 눈보라 속에 참새에서』, 문학동네, 74쪽) 이 시를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나의 주군이 나에게 원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빛 된 삶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영역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지했다시피 세상이라는 필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레떼르를 갖고 살아가는 나에게는 대단히 적응하기 어려운 장소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여가고, 그 깊이의 내공이 조금씩 진보할 때마다 더더욱 세상은 신앙인인 내게는 어려운 장소입니다. 하지만 유하 시인의 시어대로라면 거대한 공룡이요 바벨탑인 세상과 맞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는 소회가 제게 임했습니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과 맞서는 방법은 “저 눈보라 속을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의 그 시린 발을 아파할 수 있는 마음만 가지면 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세상에 발붙이고 있지만, 그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함이 있는 자에게 붙여주는 단어입니다. 어둠의 어둠이라는 칠흑의 현장에 있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오면 그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담력과 용기가 생기도록 세상의 얼룩이 감히 색칠하지 못하게 하는 성별 됨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학생들에게 전할 설교 텍스트를 열왕기하 5장으로 택했습니다. 우리가 새벽 예배 시간에 큐티로 나누었던 본문에서 영적 조명을 받고 택했습니다. 아람 왕 하사엘이 보낸 나아만을 치료해 달라는 친서를 받고 여호람이 벌벌 떨고 있다는 소식을 받은 엘리사가 전령을 여호람에게 보내면서 전언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열왕기하 5:8절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위로부터 내려온 영적 권위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구별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구별됨은 세상의 기류를 닮지 않으려는 영적 고독함의 길을 감당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총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교회가 데린쿠유의 지하에 있을 때, 가장 강력한 권위와 하나님의 만지심이 있었습니다. 고난의 형국이었지만, 그 고난의 길에 있었던 교회는 로마라는 막강한 세상을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313년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세상에 뺏겼고, 세상과 동화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교회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름 부음의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세상이라는 영역에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품으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구별된 권위의 그리스도인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알아주는 이 없어도, 그리스도 예수 주군께서 내 삶의 내용을 알아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나는 이런 그리스도인이야 말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합니다. 주께서 세상에서 분투하는 당신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충만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고난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 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내 몸이 약해도 낙심하지 않는 것은 예수 안에 난 완전함이라 화려한 세상 부럽지 않은 것은 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함이라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것들도 부럽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세상 모든 풍파도 두렵지 않네 난 예수로 예수로 예수로 충만하네 영원한 왕 내 안에 살아계시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