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네 번째 강해) 제목: 죄 죄 하지 말라 본문: 요한일서 1:8-10 서론) 아주 오래전에 주일학교 예배에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린이들에게 전해 주었던 예화가 있었는데 주일학교에서 많이 회자 되는 예화였기에 저도 역시 그 이야기를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서 담임목사님이 계획에 맞추어 설교했습니다. 설교를 마치자 앉아 있는 아이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얘야, 여리고 성은 누가 무너뜨렸다고 했지?“ 그러자 질문을 받은 아이가 무서워하면서 흐느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억울해요. 저는 안 무너뜨렸거든요.“ 이 말을 들은 담임목사님은 어이가 없어서 담당 주일학교 선생님을 불러서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내가 선생님 반 아이에게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절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적이 없다고 하던데 도대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친 겁니까?” 그러자 반사 선생님이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죠. “목사님, 제가 그 아이를 너무 잘 알아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그 아이는 천성이 너무 착한 아이입니다. 절대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에요. 목사님, 믿어주세요.” 기가 막혀서 목사님은 주일학교 교감인 장로님을 불렀습니다. 있었던 일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더니 그 장로님이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여리고 성을 누가 무너뜨렸든지 모르지만, 교회에서 예비비로 다시 지어줍시다.” 웃자고 만들어 낸 유모이지만, 그럼에도 생각하게 하는 면이 하나 있습니다. 적어도 이 예화를 만들어 냈던 그 시절에는 죄에 대해 경계했던 시절이었다는 소회 말입니다. 적어도 옛 시대는 죄에 대해 터부 시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죄에 대해 경계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런 시대가 좋았던 것은 왜일까요? 오늘 설교를 통해 조망해 볼 내용입니다. 본론) 요한서신 저자는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주군이심을 선언했습니다. 문제는 어둠으로 살고 있었던 우리들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함으로써 진리를 행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자행했고, 어둠 그 자체에 머물기를 좋아했음을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요한서신 저자는 이런 고발을 전제한 뒤에, 주후 1세기에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었던 이단주의자들과 교회 안에 기생하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의 죄를 직시하면서 죄에 대한 담론을 날카롭게 펴나간 기록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8〜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구절을 공동 번역 성서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세 개의 성경 버전으로 읽었더니 대단히 선명하게 이 구절의 의미가 들어옵니다. 무엇입니까? 죄 없다고 말하지 말고, 죄가 있음을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요한서신 저자가 일갈했습니까? 분명한 신학적 의지가 저자에게 담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의 저자는 죄의 인정과 고백은 단순히 인정과 고백이 아니라 그 너머의 차원을 공론화하는 것이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었습니까? 죄를 인정하는 자의 심령 안에 주님이 거주하신다는 역설입니다. 이 선언과 확신은 단순히 요한서신 저자의 것만이 아닙니다. 왜요? 저 역시 그렇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자백과 시인은 내 안에 주님이 내주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 안에 주군이 떠나셨다면 우리는 죄에 대해 시인하거나 자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요한서신 저자는 이렇게 자세히 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9) 그렇습니다. 죄가 없기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떠나셨기에, 내 안에 내주하셔야 하는 주군이 나를 떠났기에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진리 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죄를 시인하지 않는 것이며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군이 내 안에 계셔서 내 죄를 생각나게 하시며, 그 죄 때문에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견딜 수 없는 죄책을 주시는 것이며, 그 은혜로 나는 죄를 시인하고 주님은 내 죄를 사하시고 용서해 주시기에 나는 주님의 은혜 안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쐐기를 박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부인하거나 거부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죄에 대한 시인과 자백입니다. 이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행위는 대단히 감사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지음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군께서 내주하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에 대한 시인과 자백은 대단히 감사할 일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다만 이즈음에서, 저와 여러분이 깊이 성찰해야 하는 것은 죄란 도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규명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를 잠시 살펴보십시다. 마태복음 19:16〜20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두 사람의 대화를 읽다 보면 죄에 대한 내용이 단순화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이것 외의 것을 요구하셨으니 위로가 되긴 하지만, 단편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살인하는 것, 간음하는 것, 도둑질하는 것, 거짓말하는 것, 불효하는 것, 이웃 사랑을 하지 않는 것 등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의 정체는 이런 행위적인 죄보다 더 무섭고 치밀하며 위험한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에 청주에서 DPA 이사회가 있었습니다. 한 달 전부터 자동 변속을 할 때마다 승용차의 핸들이 몹시 떨리는 증상이 있어 승용차를 갖고 장거리를 뛰는 것이 불안해 기차를 타고 청주를 다녀왔습니다. 청주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내게 주어진 고즈넉한 시간이 1시간 30분 어간이라, 김기석 목사의 은퇴 기념 서적인 『고백의 언어』를 읽으며 행복한 독서 여행을 겸했습니다. 책의 막바지 부분에 저자는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조금 긴 문장이지만 그대로 전부를 인용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죄에 대한 가르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상담이나 코칭이 목회의 중심이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죄에 대해서 말하면 ‘또 그 이야기야’하고 질색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다.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 죄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개인이 저지르는 죄는 물론이고, 구조적인 악이나 죄에 대해 살피지 않으면 세상은 점점 어두워져 갈 것입니다. 저는 ‘죄’ 하면 ‘부자유’(不自由)라는 말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罪’라는 한자는 그물 網 자와 아닐 非 자가 결합 된 형태입니다. 잘못을 저지는 사람 위에 그물이 씌워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물이 씌워져 있는 사람은 부자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부자유함이 주는 죄란 무엇일까요? 죄를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타자가 없다면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그런 것처럼 타자들도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타자라는 현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게 인간입니다. 내 삶이 소중한 것처럼 타자의 삶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좋은 대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유의 한계를 수용합니다. 그렇다면 죄란 타자와 더불어 살아감에 있어서 자기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를 세계 중심에 놓으려는 무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이야 어찌 되든 제 욕심을 채우는 일에 몰두하는 것, 이런 자기 중심성이 죄입니다. 해서 루터는 죄를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마음’이라고 말했고, 자기를 중심에 놓으려고 하니 나와 타자의 사이의 관계를 버름(마음이 서로 맞지 않아 사이가 뜸)하게 하기에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가 죄란 소외시키는 힘이라고 정의한 것은 맞습니다.” (김기석, 『고백의 언어들』, 복 있는 사람, 220-222.) 우리들이 하나님께 처절하게 자복하며 고백해야 하는 치명적 범죄의 내용은 나에게 구부러진 마음입니다. 이것은 치명적 범죄입니다. 달라스 윌라드 목사의 걸작인 『하나님의 모략』을 보면 그가 정의한 기막힌 성찰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매사를 자기를 통해 본다. 자기의 시야에서 언제나 자기가 중심인물이다. 자기 중심성이란 자신의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불안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병적인 자기 집착을 말한다.” (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복 있는 사람, 47-48쪽) 무서운 것은 이런 자기 중심성이 죄라고 지적하면 현대판 무늬만 그리스도인들 즉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못 견뎌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없는, 내가 선두에 서지 못하는 종교적인 입지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대듭니다. 영적 페스트와 같은 죄악입니다. 적어도 내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고, 성령의 만지심이 지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이라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증거를 세례 요한이 먼저 보여준 증거라고 이름붙이는 것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애논에서 세례식을 하는 예수께서 많은 자들이 가는 것을 보고 급한 마음에 자기 주군인 세례 요한에게 SOS 신호를 보냈는데, 세례요한이 도리어 제자들에게 전했던 역대급 전언은 엄청난 감동의 자국을 남깁니다. 요한복음 3:28〜30절을 증언합니다.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자기에게로 충분히 굳어질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을 포기하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서 굽어지도록 선언한 세례 요한의 선포를 보면서 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 중심성을 벗어던지는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회개는 자기 중심성의 방향을 타인 중심성으로 갈아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죄가 두려운 것은 내 마음이 콜타르처럼 굳어져 있는 상태를 모른 체 하는 내 무감각입니다. 도리어 자기에게 굽어진 마음,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를 즐기려는 마음 즉 죄가 나를 둔감하게 함으로써 나를 영적으로 마비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반드시 돌이켜야 할 회개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강단에서 죄 죄 하지 말라고 목사를 윽박지르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이런 윽박지름이 두려워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세태가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앞에서 언급했던 달라스 윌라드의 지적은 우리 세인 교회 성도들이 귀를 크게 열고 눈을 부릅뜨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죄를 관리하는 그릇된 복음에 민감하다.” (앞에 책, 84쪽) 엄청난 충격을 주는 성찰입니다. 현대인들이 이제는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말합니다. “목사들은 죄 죄 하지 말라. 죄는 선택적 기호다. 죄를 갖고 올가미를 씌우지 말라.” 사랑하는 세인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선포합니다. 성경이 경고하는 죄에서 떠나십시오. 더불어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는 자기 중심성에서 조금도 벗어나거나 양보하지 않으려는 심각한 죄에서 돌이키십시오. 죄는 자기에게로 구부러진 극단적 이기주의입니다. 이것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죄 죄 하지 말라고 윽박지르지 말고 죄에서 떠나십시오. 오늘 요한서신 저자는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경고하면서 권합니다. 오늘 본문 요한일서 1:8〜10절을 읽고 기도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찬양합니다. 벙어리가 되어도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잘못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지난날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주여 주여 나의 죄를 위하여 주여 주여 십자가를 지셨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주님 가신 그 길을 나도 걸어야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