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1일 주일 설교 (요한일서 두 번째 강해) 제목: 사귐의 영성 본문: 요한일서 1:1-4 서론) 요즈음은 MBTI 심리 성격 테스트 결과를 놓고 대화하는 것이 대세라고 하니까 대학원 시절에 검사했던 MBTI 검사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교의 문을 열려고 합니다. 저는 전형적인 ISTJ입니다. MBTI 검사의 성격 유형으로 말씀드리자면 ‘올곧음형’입니다. 아마 우리 교우들 중에 MBTI 검사에 대한 지식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렇게 십중팔구 반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등등. MBTI 성격 유형에 따른 이름짓기는 대체로 기분 좋은 표현으로 유형 결과를 나눕니다. 그래서 제가 갖고 있는 유형을 가리켜 ‘올곧음형’이라고 표현한 것이지만, 실상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런 성격 유형이라고 진단하면 거의 맞습니다. “사귀기가 엄청 까다로운 인간”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는고지식한 인간” 4월 첫 주에 아들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 동기 목사들 사이에는 뉴스거리였습니다. 대를 이어 목회의 길을 가는 것이 동기 목사들에게 나름 부러움의 일이라고 여겨졌나 봅니다. 저는 아들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애잔함이 있는데, 저들이 알 리 만무입니다. 제 아들을 가르쳤던 신학교 동기 목사나, 저의 지근(至近) 거리에게 아들을 보아온 친구 목사들 간에 저를 놀릴 때 종종 인용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너보다는 백번 목회를 잘할 거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융통성이라고도 전혀 없는 꽉 막힌 목사인데, 이요한 목사는 사교성도 있고, 친밀하게 싹싹해서 붙임성도 있어서 너보다 백번 천번 목회를 잘할 거다.” 내심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며 소망합니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저는 사교성이 별로 없는 목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 재미없는 목사입니다. 목회는 사귐인데, 저는 그 점에 있어서는 F 학점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압니다. 이 점은 목회 정년이 끝날 때까지 제가 끝까지 아쉬워할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요한일서라는 일반서신은 주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들과 사귄 주님만이 갖고 있었던 영성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정경입니다. 요한일서의 프롤로그인 본문부터 이 내용을 대단히 명징하게 알려줍니다. 본론) 본문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절에서 특히 주목해서 보아야 할 문구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일서를 이해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단어이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조에’(ζωὴ)의 번역입니다. ‘조에’라는 단어를 해설한 주석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 ‘조에’는 요한일서에만 13회 기록되어 있다. 요한일서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에 대조되는 개념이다. 요한서신의 저자로 여겨지는 요한복음의 저자에게 있어서 ‘생명’은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의미가 담긴다. 생명의 떡, 생명수는 예수와 동일시하는 내용이다. 요한서신은 ‘생명의 수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예수는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며, ‘생명책’에 기록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으실 분입니다.” (서형석, 『연세신학백주년기념성경주석-요한1,2,3서』, 대한기독교서회, 32쪽) 그렇다면 생명은 곧 예수 자신을 의미한다는 말과 직결됩니다. 1절로 돌아갑니다.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제2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보는 요한일서의 저자로 동일시되는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 1: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시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어떤 존재로 태초에 계셨습니까?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1:14절은 저와 여러분에게 그 말씀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임하셨는지를 증언해 주고 계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흔히들 동의하는 것은 요한복음 1:14절을 지칭하여 성육신 사건의 성경 구절로 지정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육신의 방법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이 대전제 위에 요한일서 저자는 한 가지를 더 첨부합니다. 그렇게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졌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들었고, 보았고, 만졌다는 단어는 요한일서가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론 되는 주후 90〜100년 사이에 교회의 근간을 흔들던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공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표현입니다. 당시 이단의 맹주였던 영지주의는 예수께서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도리어 예수의 성육신을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것을 믿는 아둔한 자들이라고 맹공했습니다. 그들이 주장한 예수에 대한 학설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예수는 실제로 존재했던 자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자들이 바라는 환상이나 환영과도 같은 존재라고 예수님에 대해 평가절하한 이단 사상입니다. 이 이단 사설이 창궐하자, 요한일서 저자는 방어적 변증의 논리를 펴야겠다고 생각하여 1:1절에서 대단히 선명한 메시지를 남기며 편지의 서막을 열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환영이나 가현(假現)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이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을 보았고, 그분을 손으로 만진 실제적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선언한 것입니다. 이어지고 있는 2〜3절을 연이어 보겠습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일서 저자(요한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권위가 있었던 인물)는 계속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공격에 수비 자세로 방어한 것이 아니라, 공세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렇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오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눈으로 보았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을 보고 만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들임으로 그것을 전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은 그분과 사귀는 놀라운 일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 공동체 즉 성도들의 공동체가 무엇인가를 정의한 요한일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육으로 사귀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 단락의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본서의 작성 의미를 밝히며 마무리합니다. 4절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주님과 사귀고 있는 공동체는 마땅히 기쁨이 충만한 공동체가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 공동체 즉 교회 공동체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흔들림이 없이 중단하지 말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음을 오늘 설교를 통해 얻게 됩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보고 만지는 사귐의 영성을 지속해야 합니다. 주후 1세기에는 이런 일은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를 살았던 자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도 했고, 그분의 삶을 지켜 본 자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존재들이기에 주님을 만지고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요한일서 저자는 현실감 있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라고 역설한 이 메시지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고전적인 신약학자라고 할 수 있는 불트만이 우리의 궁금증에 대해 단순하지만 정확하게 답해줍니다. “요한서신 전반에 걸친 주제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 그 안에 머무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그분과 사귀는 방법이다.” (루돌프 불트만, 『요한/목회서신』-국제성서주석, 27-28쪽)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귄다는 의미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불트만의 이 일갈을 저는 이 구절로 대신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서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15:7〜8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사귀는 방법입니다. 워싱톤 사귐의 교회를 담임하는 김영봉 목사는 이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는데 적절해 보입니다.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상태를 사귐의 영성이라고 한다.” (김영봉,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홍성사, 16쪽)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교우들과 나누었던 감동을 다시 한번 주일에 나온 교우들과도 나누고 싶어 소개합니다. 어제 새벽예배 말씀 묵상 텍스트는 열왕기상 8:22-30절이었습니다. 솔로몬이 7년에 걸친 성전 건축을 완공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을 앞두고 완공된 성전에 나와 하나님께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열왕기상 8:25절과 29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먼저는 2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 자기 길을 삼가서 네가 내 앞에서 행한 것 같이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네게서 나서 이스라엘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사오니 이제 다윗을 위하여 그 하신 말씀을 지키시옵소서” 이제 29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성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오며 주의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아침 묵상 시간에 이 구절을 읽는데 울컥했습니다. 창립 15주년 주일 예배를 앞두고 서재에 조용히 찾아오신 주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고 나(하나님)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아버지 다윗에게 약속했던 계대의 복을 어김없이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또 기도했다. 이제는 아버지 다윗이 아니라, 제가 직접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기도할 테니, 주님 꼼짝없이 제 기도도 들어주시고, 저를 주목해 주십시오.” 솔로몬의 이 기도를 알리는 텍스트를 읽다가 이런 뜨거운 감동이 임했습니다. “이 목사야, 네게 섬기고 있는 세인교회에 내가 날마다 네게 말씀을 준다. 말씀을 주고 있는 세인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니? 아들아, 네가 교우들을 위해 엎드려서 중보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세인교회가 있는 것이 감사한 일이 아니겠니?” 저는 금요일 새벽 시간에 서재로 찾아오신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게 해주시는 말씀으로 인해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거하는 거룩한 사귐을 통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 사귐의 은혜가 감사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사귐이 연속된다는 점입니다. 목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서재에 나와 금요일 새벽 사역을 위해 생명의 삶 규티 집을 열었습니다. 그날 제게 레마로 임한 본문은 열왕기상 8:18절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저는 이날 묵상을 마치고 묵상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에 접근하다가 울컥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성하고 난 뒤에, 모여든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아버지 다윗과 연관된 기억을 소환하는 내용이 오늘 성서 일과의 줄거리다.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에게 전언 받은 메시지는 이렇다. 다윗은 자기가 거주하는 다윗성에 하나님의 법궤가 오랜 시간동안 안치되어 있는 것을 매우 송구스럽게 여겼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겠다고 하나님께 피력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지만 다윗이 손에 피를 많이 묻혔기 때문이라는 것이 성전 건축 불허의 이유였다. 하나님이 건축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다윗이 아파할 것을 아시고, 아들이 건축할 수 있는 제반적인 환경을 조성할 것은 허락하셨다. 그러면서 다윗을 위로하신 메시지가 오늘 성서 일과 18절이다.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다윗이 고백한 시편의 한 구절은 이렇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16:8). 이 마음을 주님도 알고 계셨다. 어쩌면 이런 다윗의 마음이 있었기에 한참 후대에 살았던 믿음의 후배인 누가가 소개한 바울도 이렇게 다윗을 소개했을 것이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행 13:22). 그렇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은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 자인가에 대해 질문하며 부끄럽지 않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일 것이다. 이 경주에서 이탈하지 말자. 잘 달리자. 끝까지 경주하자. 오늘 성서 일과가 주는 감동이 나를 울컥하게 한다. “너의 삶을 보니 내 마음이 참 좋구나(토브).” 이거 하나면 된다. 충분하다.” 이렇게 묵상 노트를 이렇게 쓰고 내 마음을 안다고 하신 말씀에 용기를 내서 하나님께 묵상 후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교우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의 내용들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깨닫지 못하는 참 무능한 종이며 무익한 종입니다. 어떻게 저들을 위로해야 합니까?” 이렇게 기도하는데 내게 너무 조용하고 조용한 서재로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주님은 제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니까 주지.” 이 한마디에 저는 주님께 항복했고 백기투항 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제게 들려주신 그 시간 저는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있는 성령 충만한 사귐으로 너무 귀하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에 소개한 불트만의 갈파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저는 목요일과 금요일 새벽에 연이어 견험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4월 16일은 진도 팽목에서 우리들의 아이들이 꽃처럼 사라진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아직도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몇 년 전, 시인들이 그때의 악몽과 아픔을 새기면서 쓴 시들을 모아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라는 시집을 출간했기에 구입한 뒤에 눈물로 그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시집에 들어 있는 시어 한 소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어두운 바닷속에/후득후득 차가운 눈발이 들이친다/우리가 넘기려 했던 책장에도 시린 눈꽃이 떨어진다/우리 생가슴을 열어 소금 결정이 된 너희들을 뿌린다/쉼표조차 함부로 쓸 수 없는 시/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그것이 너희들이기” (휘민,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습니다.” 중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시』, 189쪽) 사고로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들에게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지옥일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치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시인은 이렇게 읊조린 것입니다. “우리 생가슴을 열어 소금 결정이 된 너희들을 뿌린다.” 아마도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 있는 부모는 먼저 간 자녀들을 생가슴에 담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위로일는지 모릅니다. 아프지만 그것만이 부모가 먼저 간 자녀와 사귀는 유일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분이 나와 함께 사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을 만지고,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최고의 위로입니다. 나는 요한일서 여행을 함께하는 동안, 세인 교우들이 주님과 교제하며 사귀는 믿음의 성숙함들이 더 강해지는 기회들을 맛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인 교회 15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 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 희생과 포기와 섬김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교회 되게 예배를 예배 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