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예수 그리스도의 것 본문: 로마서 1:1-6 서론) 부활절 이후 두 번째 주일에 세인교회에 나오신 교우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환영합니다. 오늘 주일이 행복한 주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인천에 소재한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입니다. 학교명을 영어로 표기하면 Inha University Attachment High School이라고 표기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제 고등학교 동기 동창생 중에는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해서 모교의 교사로 재직했던 친구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부속’이라는 단어가 갖는 잠재적 능력이 이런 결과물을 낳게 한 동력일 수 있습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렇게 소속감은 대단히 중요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소속 의식이 있는 객체는 소속되어 있는 주체에게 부끄럼이 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영국 교회들이 쇠퇴의 극을 달리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지 이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유서 깊은 영국의 교회들이 이슬람의 모스크에 팔려 넘어갔고, 심지어 술집으로 바뀐 교회들도 즐비하다는 보도를 접하고 있습니다. 영국 교회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를 두고 학자들이 개진한 많은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진단은 영국 교회가 버린 것에 대한 대가가 영국 교회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진단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영국 교회는 성공회 즉 앵글리칸(Anglican church) 처치가 국교입니다. 영국 교회가 급격하게 몰락한 원인을 찾을 때 학자들은 성공회의 몰락을 제일의 원인으로 뽑습니다. 그렇다면 왜 성공회가 몰락했을까? 성공회에 스며든 급격한 세속화를 원인의 제일로 봅니다. 하비 콕스는 그의 걸출한 역작인 『세속도시』를 열면서 대단히 의미 있는 갈파를 던졌습니다. “세속화란 역사의 탈 운명화 즉 세상이 자기 손에 맡겨져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더는 행운의 신이나 복수의 신을 탓할 수 없다는 인간의 발견이다. 세속화는 인간이 저 너머의 세상에서 이 세상의 지금으로 돌릴 때 일어난다. 이것을 본회퍼는 ‘인간의 어른 됨’이라고 불렀다.” (36쪽) 결국, 세속화는 현대라는 시대 안에서 인간이 하나님이라는 대상에 머물러 있었던 테두리를 벗어나 그 너머에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인간의 이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한 것입니다. 하비 콕스는 세속화 현상은 현대라는 시기에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자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지 않습니다. 일어날 현상이자, 매우 당연한 사회적 현상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본회퍼의 말대로 ‘인간의 어른 됨’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오늘, 인간은 안전한가에 대한 질문에 냉철하게 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입니다. 아니, 비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부정적입니다. 재론하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는 존재라는 전통적인 패러다임을 박차고 나와서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었던 과거 시간이 대단히 열등하고 미개했던 시절이었다고 하나님을 비판하는 시대가 오늘입니다. 그러면 더 나아졌습니까? 이 질문에 답해야 하는데 나는 두렵고 또 두렵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된 세상, 이 세상이 더 행복하게 했고, 부족함이 없어졌습니까? 행복과 더 좋아짐은 고사하고 우리는 이제 인간 멸종이라는 두려운 단어 앞에 서 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위 지구 종말 시간을 가르치는 dooms-day clock을 90초 남겨 두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1세기 오늘, 우리는 소설가 김영하가 쓴 『작별 인사』에 등장하는 인간을 닮은 휴먼 노이드 즉 AI 인간 탄생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이들이 인간을 앞으로 어떻게 대우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두려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지경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이탈하여 인간의 하나님 됨이라는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 성큼 다가왔는데 우리는 지금 행복합니까? 우리는 지금 안전합니까? 아일랜드의 극작가로 평판을 날린 버나드 쇼는 일찍이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두 가지의 절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슨 일을 행할 때 마음대로 안 되는 절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대로, 뜻대로 된 뒤에 오는 절망입니다” 버나드 쇼의 갈파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저는 이 교훈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참 평안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 어거스틴의 선언은 정답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지으신 만물 중 한 줌의 흙에 불과하며,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고, 교만으로 가득 찬 이 인간이 입술을 열어 감히 주님을 찬양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찬양하는 기쁨을 누리라고 우리를 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 지음을 받았나니,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평안을 모릅니다.” (어거스틴, 『참회록』, 생명의 말씀사, 222쪽) 정말로 정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평안을 모릅니다.”는 말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 비로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교훈 삼는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이탈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본론) 이런 면에서 바울이 본문에서 고백한 6절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줍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바울의 이 고백이 저를 영적으로 흥분하게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 구절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이 편지를 받는 대상들인 로마 교회의 지체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로 인하여 같은 생각을 하는 지체들이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 NIV 로마서 1:6절은 이렇습니다. "And you also are among those who are called to belong to Jesus Christ."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중에 거하라”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된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했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로마에 사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풍성한 은혜와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구절을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정의한 이 구절의 주인공이 된 자들이 여기에 있는 교우들이며, 또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교우들은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첫걸음을 내디딘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정체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1. 복음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종’을 헬라어로 ‘둘로스’라고 합니다. 주인이 마차에서 내리면 그들의 신발이 땅에 닿아 흙이 묻기 전에 딛고 내리도록 무릎 꿇고 엎드려 있는 노예들이 바로 ‘둘로스’입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물건이 종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기꺼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복음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절 후반절) 유진 피터슨 목사는 ‘복음’을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나 바울은 사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몸 바쳐 일하는 그분의 종이자, 하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선포할 권한을 부여받은 사도입니다.” (메시지 로마서 1:1) 오늘 흔히 하는 시쳇말로 빼박의 정의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아들이 대신 죽어야만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십자가 사건은 바로 그대를 위한 은혜의 사건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아들을 죽게 하셨지만,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리고 그를 당신의 나라에 부르셨다가 때가 되면 다시 보내실 것이다. 구원과 심판을 완성하기 위해서다.” 이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원색적인 복음입니다. 이 복음으로 무장하며 사는 자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믿는 자들입니다. 세인 교회에 처음 나오신 교우 여러분!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인교회로 초대한 이유는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귀하고 복된 복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내 눈을 밝히 떠서 십자가 볼 때/날 위해 고난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그 사랑 감당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두려움없네/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2. 하나님이 불러준 자들입니다. 1절 본문을 다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본문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내용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대목입니다. 앞서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구절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부분의 대전제는 하나님이 그 정체성을 갖도록 불러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즉 ‘콜링’(calling)에 대한 확신입니다. 주님이 부르셨다는 소명을 말하려면 생각이 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사야 43장과 시편 2편입니다. 익명으로 지은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시편으로 유명한 시편 2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2:7〜9절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시편 기자의 이 말씀은 이사야 43장의 인용입니다. 제 2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짝사랑은 이렇습니다. 가슴 떨림과 눈물로 이 말씀을 받습니다. 이사야 43:1〜7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은혜로운 말씀을 류수영 전도사는 선율에 담아 노래했습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모든 환란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 당신과 나는 그냥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의미를 갖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은 그대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조각하심에 대해 첫걸음으로 여러분이 반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제 이영미 권사의 둘째 아들의 결혼식을 은혜롭게 마쳤습니다. 예식에 따라 신랑과 신부가 서로 결혼반지를 교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마음을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무슨 상징입니까? “너는 내 것이니 꼼짝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소속감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당신은 수많은 여자 중의 한 여자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유일한 여자이고, 수많은 남자 중의 한 명의 남자가 아니라 이 세상 단 한 명밖에 없는 유일한 남자라는 선언이기도 한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속감은 소속된 객체가 소속하고 있는 주체에게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책임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지체들이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의 것으로 살아가는 승리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온 교우들이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붙들리셔서 인생의 새로운 승리를 경험하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천군 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