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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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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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3-02 21:02: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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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현의 『욥, 까닭을 묻다』를 읽고 (두란노, 2022년) 김기현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 거칠기 때문이다. 거침이 없다. 2014년 作인 ‘말씀 앞에 울다’를 읽다가 나도 울었다.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에서 저자가 소개한 참고문헌들은 내 독서 목록에서 탑 랭크에 올라 있는 수작들이 되었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를 읽으면서 내 목회의 여정들이 감정이입 되는 놀라운 연대감을 느꼈다. 그리고 작년에 욥을 만났다. 책을 덮고 나서 필자가 섭섭했던 이유는 2018-2020년까지 섬기는 교회에서 나름 치열하게 욥기 강해를 진행하고 마쳤는데, 이 책을 후에 만났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2022년 발간 된 책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저자의 글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소회가 들었다. 다행이다. 왜? 필자도 욥기에 관한 책을 발간할 예정인데 그래도 내가 먼저 욥기 원고를 작성했으니까 저자의 글을 표절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확보한 셈이니까. 정말로 너무 놀랐다. 필자와 대단히 많은 부분에서 저자가 이해한 욥에 대한 해석의 공통분모가 필자와 흡사하다는 점이 그랬다. 그렇게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욥의 도발에도 끝내 묵묵부답하시던 하나님께서 38장에 이르러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셨을 때의 상황을 필자는 이렇게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2절) 드디어 욥에게 나타나신 야훼 하나님의 일성(一聲)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4-37장까지 욥을 비롯한 4명의 소리들을 들었다. 그런데 너희들이 한 말을 듣고 있노라니 가소롭다.’ 이렇게 선전포고를 하신 야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다시 다그치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요즈음 잘 사용되는 단어로 말하면 卽問卽答을 하라는 말입니다.” (제천세인교회 2020년 6월 3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82번째 강해 원고 중에서) 욥이 질문한 것에 대해서 야훼 하나님께서 답하시는 방법이 질문하시는 것이었고, 욥에게 답하라고 몰아붙이셨다. 이 서술의 의도가 대단히 신선했기에 나는 ‘즉문즉답’이라는 타종교의 상용어까지 동원하며 설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김기현 목사는 38장 전개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렇게 오신 하나님의 대답에서 인상적인 것이 있다. 오직 욥에게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중략) 이것이 질문한 자와 질문하지 않은 자의 차이다. 욥을 물었고, 친구들은 묻지 않았다. 질문했던 욥에게 하나님은 대답하셨고, 질문하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는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략) 하나님의 대답에서 인상적인 또 하나는 대답하시지 않고 질문하셨다는 점이다.”(253-254.) 기독교에서 질문하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를 2020년 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강조했는데 저자는 2년이 지난 뒤에 다시 한 번 필자의 글말을 확인(confirm)하며 독자들에게 강조한 셈이다. 교회가 질문을 봉쇄하면 그들만의 리그가 된다. 하나님은 욥이 마구 쏟아내는 질문을 봉쇄하지 않으셨다. 놀라운 사실은 38장에 등장하신 하나님도 욥에게 답변 대신 질문을 했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욥기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의 포맷을 의도했다고 여겨도 좋을 정도로 다분히 대화의 場을 연출한다. 질문한다고 인간이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에 대한 100점 답안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질문과 또 다른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는 기독교는 성장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쓴 본서는 끊임없이 욥에 대한 삶의 정황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본서를 통해 또 하나, 집중해야 하는 것은 욥은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다는 놀라운 보고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욥 19:23-24) 이 구절에 대하여 기막힌 통찰을 한 민영진 박사의 글을 저자는 소개한다. “왜 기록이 필요한가? 욥은 자신의 처지를 기억하고 전승할 사람을 찾고 있다. 그렇다 바로 기억과 전승이다. 욥에게 있어서 그의 기억과 전승은 구원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진다.” (민영진, “설교자와 함께 읽는 욥기”, 한국성서학 연구소, 2002, p,191, 본서, 187, 재인용) 이 글을 소개한 저자는 욥에 대한 이런 의지에 대한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성경 내증을 하나 소개한다. 탁월했다. “사울은 주야로 원수를 묵상했다. 다윗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했다. 사울은 주야로 다윗을 죽일 궁리를 했다. 다윗은 무시로 하나님을 찾았다. 그러니까 사울은 원수를 열심히 읽었고, 다윗은 하나님을 열심히 읽었다. 사울은 창을 던졌다. 즉 폭력을 선택했고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고 결국 피해자로 죽었다. 다윗은 사울과 달리 글을 썼다. 바로 시편이다. 시편은 맥락에 따라 기도이고, 예배이고, 노래다. 그러나 가장 우선적인 것은 ‘시’ 곧 글을 쓰는 행위였다.” (188-189.) 나는 저자의 이 해석을 이렇게 받았다. 글 읽는 이와 글 쓰는 이는 헛 살 수 없다. 왜?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행위의 절정이 글 읽기와 글쓰기이기 때문이다. 욥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 불온할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그 도발은 본인이 감정적인 면에 이끌려 하나님께 대든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치열한 논쟁 끝에 다다른 성찰의 결과였고, 민 박사의 말대로 기억해 내기의 몸부림 끝에 하나님께 질문한 꼭지점 대기였다. 나와 그대는 이 질문의 절정을 경험하고 있는가? 김기현 목사의 “욥, 까닭을 묻다”에 묻어 있는 감동들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애석하다. 수사어구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글 아니다. 목회 현장에서 신자들의 귀를 달콤하게 해주는 책, 아니다. 그래서 좋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독자들은 꼭 도전해 보시기를. 임재범이 부른 노랫말이 갑자기 떠올라 기록으로 남긴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그걸 지켜보는 너/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하나님과 욥이 나누고 행한 사랑의 밀어가 이러하지 않았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