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강 |
---|
ㆍ출판사 | 문학동네 |
---|
ㆍ작성일 | 2023-03-16 15:40:15 |
---|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읽고 (문학동네, 2022년 27쇄 간) 신학교를 다닐 때, 두 개의 성서언어를 공부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다. 학부 시절에 2년간 영문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언어에 대해서는 나름 적응력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결과는 히브리어는 낙제점을 받았고, 헬라어는 최고점을 받았다. 이걸 보면 헬라어가 히브리어에 비해 내게는 적응력이나 반응속도가 훨씬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성서연구를 할 때 헬라어는 개인적인 주석적 해석이 되지만, 히브리어는 사전의 도움이 없이는 백지 상태다. 10 여년 즈음에 신학교 구약교수로 있는 친구에게 히브리어를 지금이라도 공부하면 될까를 질문했다가 객기부리지 말고 그냥 참고도서 활용하라는 시니컬한 답변을 받고 진보된 히브리어 공부는 포기했다. 기죽이는 일가견이 있는 참 나쁜 친구다. (ㅎㅎ) 개인적으로 저자의 명저 ‘소년이 온다’를 읽고 한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필자는 80학번이다. 그러기에 휴교령이 떨어졌을 때, 들었던 풍월로 전 아무개를 성토한 이유는 비싼 등록금을 내고 학교를 나가지 못하게 한 원수 같은 인간으로 낙점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한심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그 시절 그 해 5월, 인간이면 도저히 하면 안 되는 가장 비인간적인 지역 청소가 남도에서 이루어졌다.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뉴스에서 앵무새가 내던지는 학습된 소리들만 들었던 터라, 내 땅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눈감고 있었던 소위 말해 역사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던 무지의 세월을 보냈던 내게 작가 한강은 불면증을 오게 한 장본인이었다. 마치 그녀가 피눈물로 썼던 ‘소년이 온다’를 읽고 난 뒤에 무감각했던 죄의식에 한 동안 사로잡혀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필자가 작가로 첫 발을 뗀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간, 2016년)에서 ‘소년이 온다’에 대한 북-리뷰를 발표한 뒤에야 죄 사함을 받은 느낌 때문에 불면증에서 회복되었던 웃픈 추억이 있다. 이후, 한강은 내게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그녀가 준 과제물을 받아들고 성심성의껏 리포트를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관계가 형성됐다. 그러기에 연이어 ‘채식주의자’, ‘흰’, ‘작별하지 않는다.’ 등등에서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평범하지 않은 삶의 색채를 줄곧 경험했고 나는 이상하리만큼 행복한 마음으로 글로 반응했다. ‘희랍어시간’도 그 맥을 같이 한다. 한강의 글을 펼치면 그녀의 글에서 눈과 비를 성큼 경험한다. 그런데 그녀가 내려주는 눈과 비는 그녀의 글감과 너무나도 닮았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p,174) 소설 내내, 말을 잃어가는 여자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같은 침묵에 빠져 있다. 반면,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와 같은 서늘한 단어들을 끊임없이 되 뇌인다.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의 행위들이 이상하리만큼 내게 공명되었다는 점이다. 저자의 풍요로운 상상의 날개로 펼쳐진 두 사람의 삶의 행로들이 어떤 경우에는 절절함으로,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서늘함으로 다가왔다. 이들의 행로는 긴장감 백배이기는 하지만 절묘한 채워줌으로 메워져 나간다. 이 부분이 소설의 백미로 남는다. 여자가 희랍어를 배우려는 이유, 남자가 희랍어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절묘한 조합이다. 생뚱맞고 어울리지 않은 배움과 가르침의 조합이었지만, 인간이 아니면 도무지 궁합이 맞을 수 없는 이 경우의 수를 기막힌 작가의 기법으로 소설 후반부를 엮어나간 내레이션은 끝까지 독자인 나를 숨죽이며 몰입하게 만든 한강만이 갖고 있는 천재적 필채였다. 남자가 안경이 박살난 뒤, 전혀 볼 수 없었던 절망의 나락에서 희망의 끈을 잡은 것은 여자의 봄(seeing)이었다. 말이 없는 봄은 답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를 붙들고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테마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긴 문장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문장들은 침묵을 침묵으로 사장시키지 않는다. 사랑의 이음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수줍다. 대단히 낯 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위대한 것은 모든 것을 잃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 어설픈 사랑이 모든 것을 얻도록 만든 병렬적인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이 조금 부담스러우면 어떠랴, 조금 거추장스러우면 어떠랴, 조금 낯 설면 어떠랴! 이음이 되면 됐지 뭐! 박노해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하다가 죽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사랑 없이 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박노해, “걷는 독서”, 느린 걸음,p,860.) 아가의 노래는 언제나 위대하다. 눈을 잃어가는 자가 말을 잃어버린 자를 사랑하니 눈을 찾는다. 말을 잃은 자가 눈을 잃은 자를 사랑하니 말을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상투적이고 루틴한가? 그래도 한 줄 적는다. 사랑하다가 죽자. 사랑하다가 소풍 끝내자. 이 땅을 딛고 살다가 죽은 자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는 사랑을 모르고 죽은 자다.
섬기는 교회에서 5월에 진행할 담임목사와 함께 떠나는 독서 여행은 양평 소재, 용문산 자락에 있는 ‘옥이네 북 카페’ 에서 열릴 예정이다. 함께 할 이들이 나눌 ‘희랍어 시간’이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