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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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비블리카 아카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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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4-15 09:1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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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임의 “쿰란 공동체와 초기 그리스도교”(2008년, 비블리카 아카데미 간)를 읽고 왠지 빚 갚은 느낌이다. 작년 10월 즈음 저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쿰란 공동체에 관련한 저널과 소논문을 제일 많이 작성한 전문가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교수님, 쿰란 공동체에 관련한 소논문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너무 오래 전에 작성한 글이라, 저도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웹 서핑을 잘 하시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게는 히브리서 1장을 강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기에 저자의 말대로 열심히 웹서핑을 한 끝에 본서를 구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쿰란공동체와 초기그리스도교” 이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는 섬기는 교회에서 진행하려는 히브리서 강해 때문이었다. 저자에게 전화했을 때, 저자가 내게 이렇게 전언했다. “목사님, 히브리서 연구에는 쿰란 공동체가 별로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저자의 권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필자도 짐작한다. 하지만 내가 쿰란공동체를 이해하려고 한 이유는 히브리서 전 이해 때문이 아니라 1장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히브리서 저자가 1-2장에서 대단히 강력하게 제시한 천사숭배에 관한 흔적들이 쿰란 공동체의 자료들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D. 거쓰리 교수의 해제를 들어보자. “히브리서의 수신자들 즉 독자들은 실제로 천사를 숭배하던 골로새 사람들과 비슷한 그룹이나 이전에 천사들을 아주 높게 평가하던 쿰란 공동체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그룹에 속해 있었을 수도 있다.” (D. 거쓰리, “히브리서-틴데일 신약주석 15”, CLC, p,104.) 이런 이유 때문에 본서 이해가 내게는 절실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쿰란 공동체에 속한 멤버들이 천사숭배까지는 아닐지라도 천사를 대단히 높은 위상의 존재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의 우월성을 주장하게 위해 천사숭배를 상대적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이런 정황은 히브리서 저자가 갖고 있는 독특한 신학적인 기반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반면 필자가 오히려 더 주목했던 것은 쿰란 공동체가 갖고 있었던 고무적인 신앙관이었다. 저자도 본서에서 바로 이 부분을 강조한다. 저자와 필자 가 공통적으로 주목했던 몇 가지를 나누어 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던 항목이 입회자격이다. “쿰란과 에세네 공동체에 입회과정은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에세네파의 구성원이 되려는 사람은 적어도 3년 정도 노력해야 한다. (중략) 첫 해는 토라를 배우는 일로 이루어진다. 둘째 해는 예언서를 배운다. 세 번째 해는 좀 더 많은 성서 구절을 외워야 한다. 즉 시편 1-150편, 잠언이나 지혜문학서 중에서 외워야 한다.”(pp,23-25) 필자는 현장에서 담임목회자로 교회를 섬긴 지가 만 32년을 지나고 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현장은 말 그대로 정글이다. 목회 현장은 목회자가 한 영혼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주님이 마음을 헤아려 사역해야 하는 장소이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매우 아프지만 많은 목회자들이 영혼을 목회자의 생존의 대상으로 여기며 사역하는 현실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다. 이로 인해 급조된 세례교인 만들기, 자격 없는 직분자 세우기 등등의 후유증으로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추락시켰고 시키고 있다. 이것이 의미 있는 문제 제기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교회가 쿰란 공동체가 지니고 있었던 영적 권위를 진면교사 삼아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다시 옷깃을 여며야 한국교회의 영적 권위를 되찾을 수 있다. ‘아하릿 하야밈’ 번역하면 ‘날들의 마지막’ 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쿰란공동체와 에세네파 회원들이 갖고 있었던 대단히 중요한 사상이다. 이들은 ‘현재’라는 개념을 이렇게 이해하는 신앙의 스펙트럼을 지녔던 공동체다. 저자의 해석을 소개한다. “쿰란 에세네파 사람들은 그들이 ‘아하릿 하야밈’에 살고 있다고 여겼다. 즉 에세네파의 현재는 ‘아하릿 하야밈’이다. 쿰란 공동체는 그들은 현재를 구원의 때로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종말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는 벨리알의 지배하에 있다. 다시 말하면 어둠과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때이다.” (pp,178-179) 필자가 이 대목에 천착한 이유는 균형성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악(벨리알)에게 지배를 당하는 시대라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 임박한 종말론이나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교회사적인 증언이다. 하지만 쿰란의 건강성은 이 점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쿰란의 견지했던 ‘아하릿 하야밈’ 사상은 분명히 현재를 하나님의 종말 심판 앞에서 역사를 마감하는 시대라는 의미였지만, 이 점을 이용하여 종교적인 사익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결코 느슨해지지 않으려는 신앙의 각성이라는 목적으로 이 사상을 추구했다는 점은 대단히 고무적 행보였다. 감성적 열광주의로 몰아 지성적 영성을 세워가는 건강한 교회를 파괴하는 일부 한국교회를 향한 엄숙한 하나님의 목소리를 쿰란공동체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쿰란 공동체와 같지는 않았지만 이 공동체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외형들을 벤치마킹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라는 뿌리가 한국교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외에도 나누어야 할 교훈들이 부지수이지만 지면의 한계로 인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꼭 섭렵해야 할 본서 리뷰의 10%도 달성하지 못해 매우 아쉽다. 그러기에 권면의 권면을 하고 싶다. 쿰란공동체에 대한 아주 괄목할 만한 신학적 정리 작업을 통해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하는 수훈갑의 기여를 한 본서에 꼭 도전해 보라고. 저자가 암 투병중이다. 아직도 할 일 많은 한국교회를 위해 저자가 도구되어야 하기에 오늘도 그녀의 회복과 건강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