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존 스토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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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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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5-10 16:3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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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토트의 ‘생각하는 그리스도인’(IVP, 2021년 간)을 읽고 10여 년 전에 손에 들었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을 읽다가 밑줄 그은 것도 많았지만, 마음에 스크랩 해 두었던 내용들도 제법 많아 지성의 보고에 담아 두고 있다. “지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지성은 하나님이 우리로 매일 살아가도록 만들어주신 영역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당한 영역이다. 지성의 활동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중에 하나이며, 그 몸의 모든 지체는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마크 A. 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IVP, 2010년) 이 문장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문득 든 생각이 섬기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이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섬긴 공동체는 물론 그 안에 멤버십들의 면면에게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적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양육했나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질문에는 필자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살았던 복음주의권의 지성적인 목회자라고 부르는 것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존 스토트는 본서에서 로마서 10:2절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도전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 구절이 교훈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의 결과물에 대한 경종”(p,15)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마크 A. 놀의 지적이나 존 스토트가 갈파한 내용은 그 맥을 같이 한다. 스토트는 이 책을 마무리하는 뒷부분에서 최종적인 결론이자 논지를 이렇게 밝힌다. 귀담아 경청할 내용이다. “이 경고들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식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영적인 천박함이란 죄에 내던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하나님의 부요한 은혜로부터 단절시키는 것입니다.”(p,96) 필자는 자라났던 출신교회에서 교육과 양육을 받고, 설교를 들으며 성장해서 때가 되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신도로 섬기던 고향교회의 토양은 지적(知的)이지 않았다. 감성적이었고, 율법적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무조건 믿는 것, 단순하게 믿는 것, 교리에 적합하게 믿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그 기초 체력을 갖고 신학교에 들어갔기에 적지 않게 흔들렸다. 당시만 해도 내가 공부한 신학교는 대단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던 교단신학교였는데도, 교회에서 듣고 배웠던 신앙과 성경적 이해와 접근이 얼마나 허접한 것인지를 후에 알게 되었고, 신학의 내용이 깊어지면 질수록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중요하며, 단순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동원하여 이해하며 믿는 것이 얼마나 영적인 내공을 견고히 하는 것인지도 알았다. 지성이라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을 좇아 하나님 생각을 사고하는 도구임을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배웠다. 복음주의적인 지성인답게 저자는 본서에서 지성을 논하면서 지성이 해야 할 행동 네 가지를 소개한다. 예배로 인도하는 것,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 성결로 인도하는 것,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 네 가지의 목록은 상투적이지 않다. 내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저자가 기술한 ‘인도하는 것’이라는 지침 때문이다. ‘guiding’ 이 제시하는 의미는 강제적이거나 강압적이지 않다. 지성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전술한 네 가지 항목에 대하여 선순환적인 역할을 해주는 도우미라는 저자의 해석에 필자는 동의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한 메시지 하나를 그 실례로 나누어 보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성도들에게 보이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태도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타날 영광이든지, 아니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인 오늘 나에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적인 영광이든지 상관없이 한 가지 측면에서 예외를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유감이다. 영광에 대한 천착이다. 영광에 대한 목적함이 없는 신앙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유감은 ‘생각하건대’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하건대’로 번역한 ‘로기조마이’는 지성과 이성을 전제로 숙고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나에게 임한 고난을 ‘지성적 성찰’로 계산해 본 결과, 앞으로 내게 임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바울이 토로한 근거는 지성이다. 바울처럼 저자도 다음과 같이 일설(一說)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적 형상의 가장 고상한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p,26) 그러기에 사고하지 않으려는 나태함, 성찰하지 않으려는 안락함, 공부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의 적이다. 존 스토트는 독자들에게 이 피 끓는 간절함을 전한다. 오래 전,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가 던진 화두는 필자에게 공부하지 않으면 안 돼!라고 소리쳐 준 벼락과 천둥 소리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p,65.)
전율하게 하는 통찰이자 성찰이다. 이 위대한 명제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성이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인 당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