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두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살면서 혼자라고 느꼈을 때가 있었습니까? 어떻게 이겼습니까? 2. 찬양 (WORSHIP)
● 찬송가 488장: 이 몸에 소망 무언가 ● 복음성가: 주가 일하시네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47장 13-26절 ● 제목 :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1)애굽에 들이닥친 남은 3년 흉년 기간에 백성이 요구한 것과 요셉이 시행한 정책은 무엇이었습니까? ① 백성들의 요구 ② 요셉이 시행한 정책
2) 요셉이 시행한 정책이 하나님이 알려주신 해석을 악용했다는 증거를 찾아봅니다. ⓵ 하나님이 알려주신 정책 ⓶ 요셉이 시행한 정책 ⓷ 선용이 아니라 악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3) 적용하기
⓵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는 교훈을 레마를 적용해 해석해 보자. ⓶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가 언제인지 아브람과 야곱과 연관하여 적용해 보자. ⓷ 인간은 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태신자 초청 축제일(4월 7일)과 연관하여 주중 사역을 세밀하게 점검해 보기, 더불어 셀이 연대하여 섬기기 2. 고난주간 저녁 집회 사모하고 참석하기를 준비하기. 3. 사순절 릴레이 기도 최선을 다해 참석하기. 4.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요셉의 아버지와 형들 그리고 동생의 가정까지 고센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요셉은 자신의 직으로 돌아옵니다. 총리의 역할 말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애굽 전역에 임했던 7년 대풍년이 끝나고, 곧바로 이어진 7년 대흉년의 3년 차로 접어들고 있는 시기임을 알게 해 줍니다. 애굽에 살고 있던 자들은 본인들의 땅에 몰아닥친 흉년을 2년 동안 그런대로 선방했습니다. 총리의 말대로 나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흉년 3년 차로 접어들던 시기에는 애굽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도 숨 막히는 고통으로 흉년의 피해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3절을 봅니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야곱의 일가가 살던 가나안을 물론이고, 이제는 요셉의 치리가 이루어지고 있던 애굽까지 흉년의 일그러진 고통이 엄습하였음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창세기 기자의 보고는 무시무시한 보고입니다. 제가 중학교 재학 시절, 극한의 흉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기후 변화로 인한 이상 기온이 일어나고 있었던 때가 아니었는데도, 3개월 동안 단 한 차례의 비가 오지 않아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논바닥이 타들어가고 농작물은 말라 죽어버리는 재앙이 몰아닥쳤던 때가 그 시기였습니다. 재론하지만, 3개월간이었습니다. 단 한 차례의 비가 내리지 않았던 것이 나라를 혼란으로 빠트렸습니다. 중학생 신분이었지만,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니까 맘대로 학생 동원이 가능했던 때라 농촌으로 불려 나갔고 지하수를 파는 일에 동원되어 중학생 신분으로 땅을 파는 어처구니없는 노동을 한 적이 생생합니다. 본문은 2년의 흉년기를 지나서 3년 차로 접어든 때였기에 앞으로 5년은 더 이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시기임을 그 배경으로 삼을 때, 애굽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해지자 애굽 사람들은 총리인 요셉을 찾아와 양식을 구합니다. 일차적으로는 갖고 있는 돈으로 양식을 샀지만, 그 돈도 이제는 떨어집니다. 돈이 떨어진 백성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이 키우던 가축으로 양식을 구입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한시적이었습니다. 다시 양식이 고갈되자 다시 요셉에게 와서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몸과 토지뿐이라고 항변하며 우리들이 노예가 되고, 토지도 다 팔 테니 먹을 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 직면한 요셉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 20절 이하의 메시지를 통해 살펴보십시다. 20절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 무슨 말입니까? 모든 토지는 바로의 소유물로, 백성들의 몸마저도 바로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애굽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요셉이 계획했던 정책의 일환이라고 보았기에 대단히 긍정적으로 보고하며 평가합니다. 예컨대 본문 19절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본문은 이런 긍정의 해석에 힘입어 요셉의 정책 자체가 선하게 평가된 것으로 단락의 끝을 맺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23-26절을 마지막으로 보겠습니다. “요셉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늘 내가 바로를 위하여 너희 몸과 너희 토지를 샀노라 여기 종자가 있으니 너희는 그 땅에 뿌리라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서 토지의 종자로도 삼고 너희의 양식으로도 삼고 너희 가족과 어린 아이의 양식으로도 삼으라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애굽 토지법을 세우매 그 오분의 일이 바로에게 상납되나 제사장의 토지는 바로의 소유가 되지 아니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이 구절과 관련하여 구약학자의 주석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바로의 땅을 일구는 영구적인 소작민이 되어 모든 작물의 1/5을 바치게 되었다. 고대 근동 문화를 살펴보면, 20%의 세금 수준은 매우 흔히 적용되었다. 함무라비가 통치하던 시절에는 농부들이 생산한 것에서 비용을 제외한 1/2 혹은 1/3을 정부가 거두어 간 것으로 기록 되어 있다. 바벨론에서도 일 년에 20%에 달하는 이자는 매우 흔한 일이었고, 농업 자금 융자는 보통 33,3%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굽의 경우, 이 유래가 요셉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요셉은 애굽 사람들의 생명의 은인이자, 그들의 소유권과 자유를 속박한, 곧 약 주고 병 준 자였다. 저자는 이런 토지법이 ‘오늘까지’ 유효하다고 26절에서 밝히고 있다.” (송병현,『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주석』, 792쪽)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주석을 소개한 송병현 교수도 요셉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주석의 글을 기록했다고 보았습니다. 가능한 한, 애굽에서 보여준 요셉의 행동거지를 최대한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편으로 그럴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수용하라고 종용하는 것으로도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설교자인 저는 이 대목에서 타협하지 않고 싶습니다. 어떻게 본문을 이해하는 것이 옳을까요? 요셉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고 있었던 애굽의 자국민에게 행한 일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설교자인 저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왜요? ※ 요셉의 행위는 애굽을 전체주의로 만든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접근해 보겠습니다. 요셉은 창세기 41:25절 이하에서 바로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칠 년 풍년이 올 터인데 그때 수확한 모든 곡물을 잘 보관해서 7년을 대비하라는 해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보여준 계획은 7년 풍년을 잘 선용하여 7년 흉년을 대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41:34-3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두게 하소서” 이 구절만 보면 요셉에게 하나님이 일러주신 방법의 근저에는 풍년 기간에 수확한 곡물을 선용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담겨 있는 내용을 보면 수확한 곡물을 선용하지 않고 악용한 것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내용들이 다분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선용의 도구이어야 할 곡물을 1인 독재라는 전체주의로 가는 데 긴요한 무기로 삼은 일이었습니다. 바로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하고, 바로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일인 치하의 절대적 군주제 즉 전체주의로 만들어 버린 것이 바로 요셉이었다는 사실에 매우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곡물을 무기 삼아 백성을 노예로 삼고, 백성을 소작인으로 만들어 핍박의 산물로 만든 것이 바로 요셉의 행태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반대되는 일을 행한 배은망덕한 존재라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거기까지는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다만 얻고 싶은 교훈이 있습니다. ※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도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창세기 기자가 요셉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했던 노력이 요셉 내레이션의 곳곳에 서 발견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요셉을 감추는 데에 있어서 한계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의 세속적 주군이었던 바로에게 최대의 유익을 주는 정책으로 풍년과 흉년의 시나리오를 짰던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미리 나가볼까요? 이렇게 인간이 갖고 있는 머리의 한계로 쥐어 짜낸 정책은 아이러니하게도 고센에 정착했던 자기의 후손들에게 43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요셉 스스로 1인 절대 왕정 전체주의를 만들어 주었던 그 바로의 후손 격인 요셉을 알지 못했던 바로가 등장함으로써 혹독한 노예로 전락하여 고통을 당하게 했던 원인 제공자 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점투성이 존재인가를 여지없이 역사가 고발합니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다는 말은 곧바로 이렇게 오늘의 영적 시각에서 이렇게 재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 쉽지 않은 설정이자, 요구이지만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하는 영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중형 교회에서 평생을 섬긴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중형 교회는 섬기는 지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 사모님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긴급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119에 연락하고 긴급한 조치를 취했지만 목사님 아내는 결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장례를 준비하는데 이런저런 장례를 준비하는 것을 상조회에 맡겼습니다. 장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문제는 장례 이후, 홀로 된 목사님이 남은 목회를 감당하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현장에 다시 섰는데 아내가 없는 자기의 삶을 마음 터놓고 진솔하게 상의할 대상을 교인 수첩을 펴놓고 살펴보았는데 그 많은 교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바로 그 순간, 깊이 체감한 뒤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아내가 없는 자리에서, 뒤돌아보니 내가 너무 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내가 아내를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교인들을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야 하는 그때가 가장 하나님과 가까운 때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세기 13:14-15절은 수없이 읽고 또 읽어도 감동을 선사하는 구절입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공동 번역 성경은 창세기 13:14-15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롯이 떠나간 다음에야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고개를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둘러보아라. 네 눈에 비치는 온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 아브람이 쳐다보고 있는 대상은 롯이라는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롯이 소돔을 향하여 떠나자, 헤브론의 척박한 땅에 홀로 남아 그곳으로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척박한 땅에 홀로 남아 있었던 아브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 집중력이 생겼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에게 드디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단독자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직전 얍복 나루를 건너야 했습니다. 이윽고 모든 아내와 자식들을 먼저 건너가게 했기에 자신 옆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날 밤, 야곱의 처지를 창세기 32:24절 전반절에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떻게 보면 이것이 우리 모두의 정직한 자화상입니다. 아브람이 홀로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드디어 홀로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에게 처져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봅니다. 그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떠나야 하나님이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이가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캐나다에 도착한 송은호 권사께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휠체어 서비스 덕에 편히 캐나다에 입국했습니다. 노인들에게 휠체어 서비스 따봉입니다. 그 덕에 세관도 무사히 통과하고 애인 같은 아들과 상봉했습니다. 나름 가다듬고 왔건만 몇 올 남지 않은 앞 대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한 아들의 일성은 왜 이렇게 늙었어! 이었습니다. 그러는 아들에게 “너도 늙었구나! 그렇게 우문현답했습니다. 스스로 디아스포라가 된 아들의 얼굴에도 고단했을 삶의 흔적이 내려앉았습니다. 모자는 서로를 깊이 연민하며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오이지같이 푹 절은 영감은 며느리의 꽃다발을 받고 부축 받으며 힘겹게 공항을 나섰습니다. 여기는 캐나다 벌링턴입니다. 무사히 도착했음을 보고 드립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홍 권사님과 송 권사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둘째 아들 가정에서의 체류가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저 또한 화살기도 해 봅니다.
하지만 교우 여러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일은 마지막 그날, 아들이 잡아 주는 따뜻한 손보다, 며느리가 건네는 예쁜 꽃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이 손잡아 주시는 감격과 하나님이 두 팔 벌리신 환영의 꽃다발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코 세인 지체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하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