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24일 (네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사람들이 나와 닮은 사람이 누구라고 말하는 것을 경험한 에피소드 나누기 2. 찬양 (WORSHIP)
● 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 복음성가: 예수 닮기를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43장 16-34절 ● 제목 : 닮은 꼴 1) 창세기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와 관련된 5가지 예표를 나누어 보자. ⓵ ⓶ ⓷ ⓸ ⓹
2) 예수 그리스도와 요셉의 닮은 점을 설교와 연관하여 설명해 보자.
설교를 중심으로
3) 적용하기
⓵ 댓가없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⓶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어떤 삶을 결단해야 할까? ⓷ 2번 질문에 답하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내 삶이 되도록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2024년 선정된 태신자 명단 반드시 제출하기. 2. 셀 원들의 기도제목 셀 리더가 받고 기도 수첩에 정리하여 매 번 셀 예배 시간에 중보하기 3. 내가 섬기는 지역 셀의 피선교지와 목회자를 위하여 중보하기. 4. 셀 묵상 팀 조직 확인하기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본문 18-22절은 형들이 요셉에게 돈 사건의 정황을 있는 대로 청지기에게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요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동생을 데리고 오라는 총리의 명을 받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어간, 여관에서 짐 보따리를 풀었는데 거기에 우리들도 알지 못하는 돈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돈이 왜 거기에 있었는지, 또 그 돈을 거기에 누가 넣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합니다. 이런 생각을 들게 합니다. 죄 짓고는 살지 말아야 한다. 이런 형들의 항변을 들은 요셉의 청지기가 뜻밖의 말문을 여는데 주목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23-26절을 만나 보십시다.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내고 그들을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며 그들의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 그들이 거기서 음식을 먹겠다 함을 들었으므로 예물을 정돈하고 요셉이 정오에 오기를 기다리더니 요셉이 집으로 오매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서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니” 이방의 땅에서 총리를 보필하는 청지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두려움을 극을 느끼고 있는 요셉의 형들에게 청지기는 마치 가나안에 살고 있는 믿음 좋은 하나님의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도리어 형들을 위로하며 안심시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참 오묘합니다. 이윽고 청지기는 요셉의 관저로 들어가 억류되어 있었던 시므온을 다시 만납니다. 더불어 그들은 극진한 환영의 예우인 발을 씻을 물을 받고 발을 정결하게 합니다. 청지기에 의하면 오찬은 정오에 진행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총리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얼마나 길고 초조했을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정오가 되자 요셉이 형들에게 오자 다시 형들은 요셉에게 절을 합니다. 요셉이 꾼 꿈의 지속적 성취입니다. 절을 받은 요셉은 형들에게 묻습니다. 고향에 있는 노인(야곱)이 안녕하신가를 묻고 생존해 계신가도 묻습니다. 야곱의 강건함을 보고 받은 요셉은 이번에는 함께 온 베냐민을 살핍니다. 29절입니다.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이르되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 이 아이냐 그가 또 이르되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본문에는 베냐민을 작은 동생. 소자(히브리어 베니)라고 기록했지만 실은 베냐민은 작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46:21절을 소개합니다. “베냐민의 아들 곧 벨라와 베겔과 아스벨과 게라와 나아만과 에히와 로스와 뭅빔과 훕빔과 아릇이니” 야곱과 함께 그의 아들들이 요셉의 배려로 애굽으로 이주할 때 창세기 기자가 보고한 야곱의 아들들의 족보 중, 베냐민의 족보입니다. 이미 베냐민은 최소한 10명의 아들들을 둔 가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베냐민을 이렇게 부른 이유는 어머니 라헬을 통해 낳은 친동생이라는 혈육의 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동생을 20년이 훌쩍 넣은 세월 만에 만난 그 격정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요셉은 급히 자리를 안방으로 이동해 통곡한 뒤, 다시 감정을 억제한 후에 오찬에 참여하여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헌데 오찬의 형식이 의미가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구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32-34절입니다.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 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오찬 식탁은 세 개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는 요셉만이 먹는 식탁, 둘째는 요셉의 형제들이 먹는 식탁, 그리고 세 번째는 애굽 사람들이 먹는 식탁이었습니다. 이 구분은 시대적 정황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타민족들을 미개하게 여겼기에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당시 사회적 관습이었기에 애굽 사람들은 따로 식탁에서 먹었습니다. 형들의 식탁도 특징이 있었습니다. 장자인 르우벤으로부터 막내 베냐민에 이르기까지 서열에 따라 자리를 배정하여 형들의 위계를 인정해 주는 호의를 베풀기까지 합니다. 다만 베냐민의 식탁에는 5배나 더 많은 음식물을 공급함으로써 특별한 대우를 합니다. 친동생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셈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34절 마지막 후반 절은 설교자인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요셉의 형들, 요셉의 관저에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또 다른 해를 입을까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던 요셉의 형들이 이제는 그러한 마음이 사라지고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다고 보고함으로 43장을 마무리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묵상하고 원고에 설교 문을 기록하다가 요한계시록 19:7-10절이 기억났습니다. 계시록 19:7-1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보고해 줍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9절) 요한계시록에서 규정하고 있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 받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신랑으로 맞이한 구원 받은 신부들입니다. 신부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단지 한 가지, 신랑이 행한 일들을 인정하고 믿은 것뿐입니다. 신부의 자격은 전적으로 신랑이신 예수께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절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대단히 명백한 신부 된 자들의 공통분모를 소개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형들은 동생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요셉의 사건이 일단락될 것으로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여 가나안의 흉년이라는 환란이 임했습니다. 그 환란은 팔아넘긴 자들에게 팔아넘긴 대상이었던 요셉을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한 사건으로 작용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에게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도무지 무슨 일인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에 심리적으로 당하고 있는 압박이 동생을 팔아넘긴 것에 대한 상응한 징벌이라고 수용할 따름이었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스스로의 돌이킴이나 회개를 전제하고 있지 않음을 지금까지 나눈 요셉 담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본문 스토리를 통해 한 가지 어렴풋하지만 접근할 수 있는 영적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받고 있는 호의는 형들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호의라는 것을 알았다는 점입니다. 애굽 총리의 관저에서 애굽 총리가 배설한 극진한 오찬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혜라는 것을 형들은 어리둥절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막판보고에 의하면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던 형들에게 그 두려움과 공포는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그렇게 호의를 베푸는 애굽 총리와 함께 식탁에서 즐거워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은 예상하지 못한 예외입니다. 마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계시록 보고의 주인공들이 요셉의 형들이지 않나 싶을 정도의 전적인 혜택이자 은혜였습니다. 다른 대상을 거론하지 않고 담임목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목사가 될 것이라는 꿈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영어 교사나 영문과 교수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고 평범하게 살아가겠다는 소박한 꿈을 꿨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급변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어 경제적인 고통이 극대화되었고, 대학 공부를 접어야 하는 슬픈 현실에 제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절망이 제게 임했던 우울한 시기에 하나님은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해 본 적이 없이 그냥 들은 풍월로 종교 생활이 신앙생활인양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던 제게 하나님은 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신 뒤에 인격적으로 찾아와 나를 견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요구하신 것이 목회자의 길이었습니다. 단 한 번도 목사라는 직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제게 하나님은 강권하셔서 서울신학대학교로 이끄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2024년 1월 24일까지 목사로 교우들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목사로 만드시기 위해 철저하게 계획하신 시나리오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게 오셔서 이렇게 저를 만지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위해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너를 위해 내가 2000년 전에 직접 행한 일이란다. 너는 나를 위해 아무 것도 행한 것이 없는 것을 너도 알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를 이미 알고 있었고 너를 사용하기 위해 너를 연단했고, 이제 그 때가 되었단다. 네가 나를 위해 잘 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나를 너를 사랑하고 너를 구원하기 위해 죽었단다. 이제 그 사랑을 너도 알고 나를 위해 너의 남은 인생을 날 위해 살아다오.” 제가 목사로 살아가기로 결단한 가장 결정적인 주님의 조명인 이것이었습니다. “너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행한 특별한 자가 아니란다. 하지만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단다.” 주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내가 무지하여 몰랐을 뿐이지, 주님은 이미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셨고, 그 사랑을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오늘 요셉을 반추해 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렸습니다. 사실상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애굽에서 재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렇게 재기한 요셉은 자기를 정서적으로 살해한 형들을 도리어 용서하고 보살피는 형제애를 보여줍니다. 형들이 완전히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해달라고 간구한 일도 없었는데 요셉은 형들을 사랑하고 극진히 보호하며 흉년이라는 고통에서 구원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로 미워해도 전혀 할 말이 없는 형들을 집으로 초청해 오찬을 베풀며 그들에게 베푼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무엇이 그려집니까? 나는 오늘 본문 요셉의 행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행하신 사랑의 닮은꼴을 봅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한 그대로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 올려진 요셉을 십자가에서 육신으로 당한 죽음의 구덩이에서 하나님이 건져 올려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이해하는 것이 그리 틀리지 않는 신학적 이해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요셉의 행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의 닮은꼴을 알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감사의 내용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셨던 분입니다. 소중하고 감동적인 것은 내가 완벽한 의인이었기에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었기에 죽으셨다는 믿기지 않는 사랑 때문에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정서적 살해를 당했던 자였습니다. 재론하지만 형들은 요셉에게 그 어떤 회개의 고백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품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셨던 그 사랑처럼 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미국의 건강한 교회 중애 하나인 서밋 교회를 시무하는 J.D. 그리어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알고 그것에 놀라운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어, 『복음 본색』, 새물결플러스, 266쪽) 몇 번을 곱씹어도 정말로 적확한 영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진하게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메시지를 통해 나에게 이것을 더 진하게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요셉은 예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극치와 많이 닮아 있는 사람입니다. 바라기는 나는 우리 교우들이 예수 닮아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를 닮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자 삶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