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 인생에 정말로 의미 있었던 시간의 기억이 있다면?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428장: 내 영혼에 햇빛 비치니 ● 복음성가: 날마나 숨쉬는 순간마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 본문: 창세기 41:1-36 1) 요셉이 겪었던 고난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해석해 보자. 2) 베드로와 바울의 삶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비교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나는 지금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카이로스의 선상에서 살고 있는가? ⓶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반추하고 되새겨 보자. ⓷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로 옮겨타는 신앙적 결단을 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성탄 축하의 밤 행사 준비 2. 12월 사역에 최선을 다해 중보하고 참여하기 3. 제16회 사무총회가 은혜롭도록 4. 송구영신예배에 은혜가 임하도록 5. 환우들을 위해 중보하기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서론) 성 어거스틴이 말한 그 유명한 ‘시간’에 대한 정의로 오늘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도대체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자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 시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시간을 모른다.” (성한용, 『성 어거스틴에게 있어서-시 간과 영원』, 성광문화사, 81쪽) 이해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어거스틴이 말한 시간의 시간의 정의이자 그가 갖고 있는 독특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바울의 회심 텍스트로 가보겠습니다.
사도행전 9:5-7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바울이 회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첫 번째 기록입니다, 설명드린 사도행전 9장에 첫 번째로 기록 된 이 회심 사건은 사도행전 안에 다시 두 번이나 복기됩니다. 첫 번째 복기는 사도행전 22:6-16절인데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마자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유대인에게 체포를 당하였지만, 예루살렘 치안을 담당한 천부 장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는 극적인 돌보심을 받습니다. 이때를 기회로 알고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변증하며 전도 하는 텍스트가 사도행전 22장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 26:12-18절 기록인데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한 베스도와 분봉왕으로 있던 헤롯 아그립바, 그의 정부(情婦)인 버니게, 그리고 더불어 총독 관저 안으로 몰려들었던 바울에게 앙심을 품은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다시 한 번 다메섹의 회심 사건을 간증하는 기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시간적인 정리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1-9절에 기록된 다메섹 사건을 기점으로 해석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다메섹 현장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입니다. 그러나 천부장의 허락을 받고 다메섹 회심을 간증한 사도행전 22:6-16과 베스도총독 앞에서 간증한 26:12-18절의 다메섹 사건은 사도행전 9장을 시간의 중심에 놓고 볼 때 둘 다 과거일 것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해석할 때 시간이 어떤 것인지 나나 여러분은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철저하게 크로노스의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과거, 현재로 해석한 것입니다.
본론)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이 꿈을 해몽해 준 대로 사면 복권이 되어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에게 풀려나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오게 된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의 말을 잊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철저히 ‘크로노스’ 즉 물리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물리적인 시간 2년은 요셉에게는 적지 않은 고통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요셉에게나 술맡은 관원장에게나 그냥 흘러가는 시간 즉 크로노스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크로노스에 억매이지 않는 자존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이 되자 요셉을 위해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1절을 주목하십시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당시 최고의 제국을 이루었던 애굽의 통치자 바로가 꿈을 꾸었다고 창세기 저자는 보고합니다. 술맡은 관원장 이 방면 된 이후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을 명시한 것입니다. 바로가 꾼 꿈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2-7절이 보고합니다. 두 가지의 상징어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암소 일곱 마리와 또 다른 하나는 일곱 이삭이었습니다.
7마리의 암소는 두 종류였는데 살진 일곱 마리 암소와 비쩍 마른7마리 암소였습니다. 바로가 꾼 꿈의 내용은 비쩍 마른 7마리 암소가 살진 암소 7마리를 잡아먹는 첫 번째 꿈과 같은 맥으로 마른 일곱 이삭이 튼실한 이삭 일곱을 삼키는 두 번째 꿈이었습니다. 도무지 바로는 이 꿈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애굽이 갖고 있었던 종교적인 힘을 빌어 꿈을 풀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바로가 이렇게 난감해 하고 있는 어간, 술맡은 관원장이 등장 합니다. 그가 2년 전, 자신이 경험했던 요셉과의 일을 바로에게 고하자 바로는 즉각적으로 요셉을 부릅니다. 관원장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요청한 지2년 만에 요셉이 바로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25-36절은 요셉이 바로가 꾼 꿈을 해몽함과 동시에 그 꿈이 제시하는 것을 통해7년 풍년과7년 흉년을 대비하는 대안적 프로젝트까지 알려줌으로 바로의 신뢰를 받게 되는 극적 장면을 여과 없이 보고합니다. 본문 스토리는 우리 교우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텍스트이기에 이 정도로 해석하고 마치려합니다. 오늘 우리는 시간 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신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본문에 제시된 구절 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다시 본문 1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이제 26-30절을 만납니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1절에 번역된 ‘이 년 후에’의 ‘년’과 26절 이하에 반복된 ‘해’ 는 모두가 히브리어 ‘솨나’의 번역입니다. ‘솨나’는 철저히 물리적인 시간의 ‘년’과 ‘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24일에 주일을 맞이하고, 그 다음날인 25일에 성탄절이라는 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2023년 12월 31일에는 송구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만나게 될 것이고, 2024년 1월 7일에는 영신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시각으로 이 시간들은 철저히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요셉이 술맡은 관원장이 방면된 지2년이 지나서였을까? 왜 애굽은 7년이라는 풍년과 7년이라는 흉년이라는 시간이 정해졌던 것일까?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시간(역사)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이렇게 환언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 요셉이 술맡은 관원장에게 요청한 청원이 곧바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아니라 요셉이 스스로 승리한 것이 됩니다. 7년이라는 시간은 요셉이 임의로 해석한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구속 사라는 대서사를 쓰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정하신 시간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공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것을 알았기에 바로 앞에 섰던 요셉은 바로 이 믿음으로 이렇게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자 권력자였던 바로에게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6절을 읽어봅시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내가 당신의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꿈까지도 주관하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꿈을 준 의미가 알려주겠다는 엄청난 선언이 16절입니다. 본문 25절도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이렇게 요셉처럼 시간과 역사의 주인공이 하나님임을 믿는 자가 항상 주목하는 것이 있습니다.
※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시간에 집중합니다.
쉽게 말하면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에 주목합니다. 너무 유명한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갈라디아서 6:9절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바울은 ‘때’라는 단어를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편지에 썼습니다. 왜 바울은 갈라디아서 6:9절에서 ‘때’ 라는 단어를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너무 단순하지만 기막힌 답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내가 정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정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기에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는 글에서 과감하게 이렇게 고백하며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3:7-8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이 알고 있었던 세속적인 지식과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얻은 것 들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누려왔던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 치열하게 살았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가 충격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가치를 얻고 보니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선포하니 말입니다. 왜 바울은 이토록 처절하게 고백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시간에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서 다메섹 사건은 크로 노스의 시간이 아닌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확신했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신앙고백 하나 들어보시겠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지만, 우리가 써가는 삶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은결든 마음에 하늘빛이 스며든다. 그 용기와 더불어 그분의 역사가 시작된다.” (김기석, 『당신의 친구는 안녕한가?』, 33쪽)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만의 독단으로 쓰는 자는 그 시간이 크로노스이기에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이루시려는 구원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구원이야기로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 시간의 주인공이 하나님임을 믿기에 선을 행하고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카이로스’가 임하면 반드시 거두게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는 자가 아니라,자신이 꾼 꿈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헛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내 시간 속에 스며들기를 기도하며 삽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60-62절을 만나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 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저는 개인적인 소견이기는 하지만 누가복음 저자는 천재적인 글쓰기의 달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동의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째로 부인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기록한 누가의 필채 중에 소름끼치게 하는 묘사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아랫뜰, 앞뜰로 옮겨다니면서 불안한 마음을 갖고 점층화법으로 주님을 첫 번째, 두 번째 강하게 부인했을 때 예수께서는 가야바와 면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세 번째 부인할 때 닭이 울었다고 표현하면서 누가는 한 가지 문장을 첨부했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고”
가야바를 보고 계시던 주님이 얼굴을 바깥뜰 쪽으로 돌리셔서 베드로를 쳐다보았다고 기술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베드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주께서 지적하셨던 바로 그 뼈아픈 말이 비수로 다가와 박혔다고 보고합니다.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혈기 왕성하게 부인할 때 베드로는 크로노스의 현장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얼굴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 역시 주님의 얼굴과 마주쳤고 바로 그 시간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뛰쳐나가 쓰라리게 회개하며 울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쓰라리게 울었던 그 현장은 크로노스 시간 선에 머물던 베드로가 카이로스라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은혜의 시간으로 갈아탄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 혼자서 충분하다고,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고 객기를 부리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써 가시는 구원의 이야기를 여러분의 사도행전 29장에 기록할 수 있는 카이 로스의 시간 속으로 갈아타십시다. 요셉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알려준 믿음의 선배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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