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나의 남은 삶의 여백을 기초로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꿈은? | 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542장: 주여 지난 밤 내 꿈에 ● 복음성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과유불급 ● 본문: 창세기 37:1-11 1) 어린 시절 요셉이 갖고 있었던 편향되었던 삶을 살았던 흔적들을 열거해보자. 2) 요셉이 삼았던 비전이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을 알려주는 성서적 근거들을 제시해 보자. ⓵ 창세기 42:6절과 9절 ⓶ 창세기 39:9, 41:16, 45:7-8, 50:19-21 등등 |
3) 적용하기 ⓵ 요셉의 비전을 기초로 내가 교훈 받아야 할 메시지는? ⓶ 하나님이 비전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⓷ 두 번째 항목을 실천하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11월 추수감사주일 축제를 위해 셀 별 사역 세우기 2. 지역 셀 대 심방 준비하기: 기도 제목 정리해서 김 전도사에게 문서로 제출 3. 셀 별 전교인 성경퀴즈대회 준비하기 4. 공 예배 잘 지키도록 리더들이 솔선수범하고 독려하기 5. 10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 | 설교요약 (SUMMARY)본론) 성경에 기록된 요셉이라는 인물을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마치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는 시각으로 꿰맞추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압도해 왔기 때문에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요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해석하려는 무모함으로 인해 요셉에 대한 진짜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과유불급은 비일비재하게 행해졌습니다. 그 실례를 하나 들겠습니다.
“창세기 37장에는 요셉의 어린 시절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어린 시절을 통해 요셉의 사람 됨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리 시절의 묘판을 통해서 비전 인생의 씨앗을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요셉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아주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7: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 순진하니까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고자질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결코 나쁜 고자질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버지에게 고한 것이 뭐 그리 잘못입니까? 엉뚱한 사람에게 가서 배 다른 형제들에 대해 말했다면 중상모략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의 과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는 아버지에게 이야기 한 것뿐이니 절대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순진하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합니다.”(이동원, 『창세기 강해 3-꿈으로 사는 비전 인생』, 172쪽)
이동원 목사의 창세기 강해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목사께서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요셉을 비전의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앞으로 그의 인생을 해석해야 했기 때문인데 과유불급입니다. 이제부터 이동원 목사의 설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하겠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이야기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는 꿈을 꾸는 자 즉 비전을 품고 산 사람이었다는 표현입니다.
저는 요셉이 꿈을 꾼 사람이었다는 점에 조금의 이견 없이 동의합니다. 형들의 곡식 더미들이 자기의 곡식 더미에 절하는 꿈, 형들의 별과 동생의 별을 말하는 11개의 별과 심지어는 부모를 상징하는 해와 달까지 자기를 상징하는 별에게 절하는 꿈 등등을 꾸었던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창세기 37:6-7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이어지는 창세기 37:9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분명히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요셉이 꾼 꿈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요셉이 꿈을 꾼 자라는 말은 매우 성경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과유불급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꿈을 꾼 요셉이 그 꿈을 비전 삼아 그의 인생을 살아냈다는 말도 안 되는 해석입니다. 요셉이 자기가 꾼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인생을 살았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과유불급입니다. 왜 제가 이런 통상적인 해석에 반대합니까? 답을 제시하기 위해 추적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42장은 요셉이 형들에게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한 창세기 37장에 비해 약 20년 이상이 지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립니다. 졸지에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힙니다. 그곳에서 참담한 시간을 보내다가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바로 앞에 서게 되었고, 바로의 꿈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지혜로 해몽한 뒤에 총리의 반열에 서게 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애굽을 비롯한 중동의 전 지역에 임한 7년 풍년 뒤에 엄습한 대흉년으로 인해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요셉의 형들이 곡식이 있다는 애굽으로 내려가 곡식을 구하는 과정에 약 20년 전에 본인들이 팔았던 요셉을 만나는 기구한 신세가 됩니다. 총리의 신분을 감춘 요셉은 자신의 형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경험합니다. 창세기 42:6절을 봅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20년 만에 만난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본 요셉의 반응을 청세기 기자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창세기 42:9절은 중요한 구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생각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자카르’를 영어 성경에서 공히 과거동사 ‘remembered’로 번역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거완료 시제로 번역했다면 요셉이 형들을 만났을 때 자기가 꾼 꿈을 그 꿈을 꾼 그날부터 지금까지 줄 곧 기억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꿈을 비전으로 삼아 살아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일체의 번역 성경들은 ‘자카르’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단순히 과거 동사로 해석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해석의 의미를 제공합니다. 요셉이 꿈을 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20년 전에 본인이 꾸었던 꿈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잊어버리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형들을 만나고 총리가 된 자기에게 형들이 절하는 것을 본 뒤에야 비로소 20년 전 꾸었던 꿈을 복기해 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성서해석의 전제로 세운다면 요셉을 꿈의 사람으로 긍정화 시키려 했던 시도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가 꾸었던 꿈을 그의 삶의 비전으로 삼았다는 그동안에 익숙하게 보편화시킨 꿰맞추기 식의 과유불급의 해석은 중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꿈을 비전으로 삼은 자가 아니었다면 그가 갖고 있었던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 그는 비전을 꿈이 아닌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39:9절을 읽겠습니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견지하고 있는 요셉을 알게 해준 대표적인 성서구절입니다. 요셉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고통이 연속적으로 임하는 삶의 굴곡을 경험했지만, 그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친 삶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꿈이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비전인 삶의 주인공이 요셉이었다는 말입니다. 21세기라는 과학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 우상인 세상을 살다보니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그리스인들 역시 착각하며 잘못 붙들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원본의 삶이 아니라 이상하게도 복사본을 붙들려고 하거나, 기웃거리는 어처구니없는 기형적인 신앙입니다. 화요일 아침에 묵상한 사사기 16장에 기록된 한 구절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사사기 16:21-22절을 읽어드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나실인으로 부름 받은 삼손이었지만 전혀 나실인답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삼손은 주색에 빠져 인생을 망쳤습니다. 결국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모든 영적 자존심을 다 바치는 어리석음을 선택함으로 동족을 압박하는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야 하는 사사가 도리어 그들에게 끌려가 두 눈이 뽑힌 채로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맷돌을 돌리는 비극적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사사기 저자는 16:22절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은유 구절을 남겨 놓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은유였습니다. 저는 화요일에 접한 이 구절에 대한 신학적 묵상을 이렇게 글로 적었습니다.
“삼손이 머리털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이 구절은 오래 전부터 묵상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왜곡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구절이라고 경종했다. 머리털이 다시 자란 삼손은 힘을 다시 얻게 되어 블레셋에게 받은 치욕을 갚을 수 있었다고 말도 안 되는 해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말이다. 삼손의 힘이 머리털에 기인했다면 이것만큼 샤먼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신학교를 다닐 때 기독교는 고등종교라고 배웠다. 샤먼이 아니라는 의미다. 하나님이 나를 직접 찾아오신 사건은 대단히 인격적인 사건이다.
그런데도 내가 믿는 주군이신 하나님을 샤먼적인 신으로 강등시키려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버젓이 자행한다. 성서일과로 본 사사기 16:22절의 의미는 삼손이 머리털이 다시 나서 힘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삼손의 머리털이 자랐다는 말은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지만, 전혀 나실인답지 않은 삶을 살던 삼손에게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다시 형성되고 있다는 메타포다. 나는 나의 힘의 원천인 종교적인 주술인 그 무언가가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싸운다.
근래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아무개’가 전도자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적인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고 들썩인다. 거기에 열광하는 부류들은 여론을 부축이기까지 한다. 그걸 인정하지 않는 일체의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는 심판의 대상자라고 몰아붙이기까지 한다. 유구무언이다. 그가 행한 퍼포먼스를 유트브를 통해 시청했다. 보다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0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 ‘빈야드’라는 이름으로 일어났던 종교적 쇼 엔터테인먼트를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것이 다시 떠올랐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샤먼적인 퍼포먼스로 변질시키는 일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벳세다의 회중들이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분위기를 알고 가버나움으로 피신한 예수를 집요하게 다시 추적하여 따라온 뒤에 다시 제 2, 3의 오병이어 기적을 보여 달라는 종교적 마약에 중독된 자들이 오늘도 여전한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냐고 고백한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에 있을 리 만무다. 말씀보다 종교적 퍼포먼스에 열광하는 무리들에게 말씀으로 성육신 하나님이 보일 리 만무다. 이렇게 기형적 종교인들을 만든 공범자 중에는 광적인 신비주의를 도입한 일련의 교회들도 존재한다. 부인할 수 없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시편 18:1-3) 가슴 절절한 고백이다. 유대인인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은 이렇게 천명했다. “하나님을 앎이라는 것은 그분과의 인격적 결합이 전제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예언자들』,116쪽)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주술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다. 종교적인 쇼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그 분과의 전인격적인 하나 됨이다. 삼손의 머리털 자람은 주술적인 상징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관계의 회복이다. 머리털, 머리털 하지 말자, 그리고 헷갈리지 말자. 삼손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머리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케토넷 파심’이라고 기록된 이 단어를 우리나라 성경에는 ‘채색 옷’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케토넷 파심’을 장로교신학대학교 하경택 교수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요셉이 입고 있었던 ‘채색 옷’은 일종의 예복으로서 옷의 길이와 소매의 길이를 통해서 다른 옷과 구별되었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옷이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혀준 것은 그를 특별히 상속자로 지명하는 것과 같았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킹덤북스, 311쪽)
아버지의 이런 편애를 발판으로 대단히 싸가지 없게, 교만하게, 그리고 형들에게 갑 질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자가 요셉인데 그를 순진한 사람이었다고, 꿈을 비전으로 삼았던 자라고 칭송하는 것은 아무리 양보해도 과유불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요셉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고난의 고난을 경험하면서 그렇게 교만했고, 싸가지 없었고, 갑 질을 인생의 낙으로 여겼던 요셉이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나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꿈이 아닌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던 요셉이었기에 그는 훗날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41:16절입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창세기 45:7-8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50:19-21절을 읽어드립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요셉은 자신의 꿈을 비전으로 삼았던 자가 아닙니다. 요셉은 자신의 꿈을 하나님으로 삼았던 자였습니다. 우리 세인지체들은 억지춘향으로 요셉을 꿈의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틀에서 이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를 들은 이후부터는 요셉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을 자신의 전 인생의 비전으로 삼고 달려갔던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재정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더불어 나도 하나님이 비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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