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IP)● 찬송가 455장: 예수 더 알기 원하네 ● 복음성가: 다 같이 걸어갑시다.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반대편도 ● 본문: 창세기 36:1-43 1) 창세기 기자가 에서의 톨레도트(족보)를 자세히 기록한 이유를 레마와 연관하여 말해 보자. 2) 에서의 족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기억하고 있다는 반증을 두 가지 실례로 말해보자. 3) 적용하기 ⓵ 빗금철폐를 위해 나의 작음 힘이라도 보탤 수 있는 일은? ⓶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가 함께 걸어가야 할 사람들은? ⓷ 이 일을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제출한 태신자를 위한 기도 스케줄 짜기 2. 지역 셀 대 심방 준비하기: 기도 제목 정리해서 김 전도사에게 문서로 제출 3. 각 기관별, 셀 별 성경퀴즈대회 준비하기 4. 공 예배 잘 지키도록 리더들이 솔선수범하고 독려하기 5. 10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 | 설교요약 (SUMMARY)본론)오늘 본문은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지적하는 에서의 죄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겼다는 경솔함의 죄입니다. 물론 장자로서 큰아들의 권위를 소중히 여겼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그것이 에서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치명적 죄악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리 양보해도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배고픔이라는 이유 때문에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이 죄라고 지적한다면 그건 인간이 본능적인 느낌에 대해 갖는 일체의 행위가 죄라고 동일하게 해석해야 합니다. 하지만 식욕 자체가 뭐가 죄의 인자입니까? 성욕 자체가 뭐가 죄의 인자입니까? 소유욕 자체가 뭐가 죄의 인자입니까? 이런 본능적인 욕구를 차지하기 위해 남을 짓밟고, 폭력을 가하며, 욕심으로 진보할 때 그것이 죄이지 본능 자체가 죄가 된다는 평가에 저는 선뜻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에서가 팥죽이 먹고 싶어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을 죄의 인자로 해석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어떤 설교자는 에서의 범죄 중에 하나는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여인들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죄의 목록으로 열거합니다. 물론, 부모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아내를 맞이한 것이 유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맥락으로 보면 동생과 짜고 장자의 복을 빼앗아 버린 리브가의 소위가 더 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복을 가로채게 만든 제일 원인자, 자신의 앞날을 뭉개버린 어머니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만을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재 강조하지만 에서가 이런 일련의 이유로 저주를 받은 조상의 시조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공평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오늘 본문을 36장 전체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본문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을 정도로 분량이 많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본문을 구체적으로, 의미 있게 해석한 주석도 거의 없기에 본문을 치밀하게 연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 역시 본문을 자세히 연구할 수 없었음을 교우들이 양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만 오늘 설교를 통해 보편적으로 해석되어 온 상투적인 설명을 저는 거꾸로 보고 해석하고자 합니다.
본문 1-19절까지는 에돔의 시조인 에서의 톨레도트(족보)입니다. 20-30절은 에서가 거주하던 땅 즉 세일에 관한 이야기(톨레도트)가 기록되어 있는데, 지역이름이었던 세일이 20절에는 에서 후손으로 세일이라는 자가 등장하는데 세일의 아들들을 에돔 사람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31-43절은 바로 그 땅(세일)에서 왕으로 등극했던 인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36장 전체는 야곱의 반대편에 있었던 에서와 그 후손들의 족적들이 보고되고 있는 셈입니다. 36:1-42절 전체를 한 절, 한 절 해석할 수는 없지만 오늘 레마로 들어서기에 앞서서 본문을 읽으면서 이 정도는 함께 공유해야 하겠다는 보고만 집중해 보겠습니다. 먼저 1-5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이 구절을 보면 에서가 아내로 맞이했던 여인들과 그녀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도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보고된 에서의 아내와 그의 아들들의 명단입니다. 하지만 이 보고를 읽다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기에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우리들이 이미 보았던 창세기 26:34절과 28:9절을 다시 복기하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26:34절입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그 다음은 창세기 28:9절입니다.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 이 구절도 도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무엇을 질문해야 합니까? 왜 에서의 아내들의 이름이 다를까? 왜 성경이 틀렸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오택현 교수의 해제를 소개합니다. “에서의 족보는 이미 창세기 26, 28장에 나와 있는데 앞의 내용과 36장 족보에서는 이름이 일치하고 있지 않다. 이는 서로 다른 전승의 문제이거나 에서에게 앞선 창세기 기록 26,34장에 거론된 아내 외에도 또 다른 아내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아내 이름들을 바꾸어 잘못 기술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대답 중 그 어느 것도 정확하지 않다.” (오택현, 『연세신학백주년 기념 주석-창세기』, 291쪽) 이렇게 에서 족보에 관련하여 주목해야 하는 구절을 찾아본다면 11절입니다.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에서의 아들인 엘리바스가 낳은 아들들 중에 ‘그나스’가 등장합니다. 복음주의 권에 있는 학자 들 중에 민수기 32:12절 말씀을 근거로 가나안 정탐꾼 중에 유일하게 긍정적인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 중에 갈렙의 출신 성분을 그나스 출신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민 32:12) 물론 ‘그나스’를 어떤 학자들은 동명이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더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 때문에 갈렙을 에서의 후손으로 인정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11절 본문을 기초로 민수기 32:12절을 적용하는 데에 있어서 만에 하나 갈렙을 그나스의 후손으로 여길 때, 에돔 족속 중에 어떤 경우에는 이스라엘의 계보로 귀화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을 수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에서의 족보 중에 그나스는 주목받아야 하는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 한 구절만 더 공부하겠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이 구절에서 성경의 전 역사에서 이스라엘과 대척점에 있었던 족속 하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 아멜렉입니다. 아말렉과 이스라엘은 악연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였을 때, 르비딤에 도착한 이스라엘 광야 공동체는 대단히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던 이스라엘을 잘 알고 있었던 아멜렉이 기회를 보다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어쩔 수 없이 모세는 르비딤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물론 많이 지쳐 있는 이스라엘 광야 공동체였지만, 모세, 아론과 훌 그리고 여호수아의 합력한 분투로 이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아말렉에 대해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출애굽기 17:16절입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이 유명한 족속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서의 아들이었던 아말렉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 중에 세 구절을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인 에서의 톨레도트 즉 족보에 관련하여 우리들이 찾아내고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적용해야 할 교훈이 과연 무엇일까요? 긍정의 보고, 부정의 보고도 있는데 우리에게 에서의 톨레도트는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 하나님의 관심은 ‘모두’에게 있다는 교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서론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는 야곱이 주류 인생이고, 에서는 뒤쳐진 인생이라는 가르침에 각인되어있고, 거의 세뇌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거의 모사꾼에 가까운 야곱을 주류로 만들었고, 그냥 민감성에서 떨어진 에서는 버리셨는가를 질문한 뒤에 그 답을 얻으려면 대단히 궁색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흔히 이럴 때 쓰는 답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기에 모른다는 것이 가장 정직한 답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 때문에 구속사의 주된 주류적인 인물로 선택된 자들에 대해서는 비평적인 성찰은 하지 않고, 그 주류적인 대열에서 패배한 소위 말하는 에서의 족보에 대해 저주받은 족보라고 치부하고 매도하는 시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저항합니다. 하나님이 구속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중추적인 도구로 사용하시는 일과 그 중추적 일하심의 선두적인 자리에 서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하나님이 유기하신 패배자로 몰고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포기하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이지 하나님은 당신의 시선에서 그들을 떨어뜨리거나 외면한 영역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고된 에서의 족보를 들여다보면서 다시금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신학적 교훈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일하심이 이럴진대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라가며 섬기려는 자들의 태도 역시 왜곡되면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금 받습니다.
※ 교회와 성도는 어떤 극한 상황이 와도 모든 면에서 결코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작태가 있다면 누군가를 차별하는 행위를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교만한 행태, 너는 나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참담함, 너는 나와 같을 수 없다는 편견, 너는 나와 색깔이 다른 하위 부류는 범죄행위 등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차별함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이편도 사랑하셨고, 저편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좌도 사랑하셨고, 우도 사랑하셨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같은 동네에 있는 다른 아파트를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A 교우가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현관에 이런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습니다. “택배 기사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B 교우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방문하여 1층 출입문으로 들어가다 본 또 다른 플랜카드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택배 기사님의 땀 흘리는 수고에 머리를 숙여 감사드립니다. 직접 올라오는 수고를 하시지 말고 전화를 주시면 내려가겠습니다.” 똑같이 사람이 사는 곳인데, 한 곳에서는 지옥과 같은 분위기를, 또 한 곳에서는 천국과 같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김영하의 소설 『작별인사』를 보면 미래 세대에 충분히 일어날 현상에 대한 소설가의 예언적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인 수단으로 삼기 위해 인간을 꼭 빼닮은 휴먼 노이드 즉 인간을 닮은 로봇들을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내서 인간이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그 로봇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등록 시스템을 만들어 인간은 로봇들을 마음대로 유린하며 차별합니다. 하지만 휴먼 노이드 로봇들 중에 인간의 모든 면에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들에 의해 인간이 통제받는 시기가 도래함을 소설가는 밝힙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오자 상상할 수 없는 지구별이 재탄생합니다. “어쨌든 달마의 예언대로 오래지 않아 인간의 세상이 완전히 끝나고, 그들이 저지르던 온갖 악행도 사라지자 지구에 평화가 찾아왔다. 대기의 기온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발생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른바 인간 세계가 끝나게 된 것은 SF 영화처럼 우리 인공지능들이 인간을 학살하고 외계 생명체가 숙주로 삼아서가 아니었다. 인간들은 점점 더 우리에게 의존했고, 우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멸종해 버렸다.”(김영하, 『작별인사』, 복복서가, 268쪽) 글을 읽다가 인간처럼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동물이 또 어디 있을까를 생각하며 숙연하게 동의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일체의 것들에 빗금을 친 자들은 오직 인간 말고는 없습니다, 저는 서늘하게 김영하 소설가의 예언적 성찰에 귀 기울입니다. 이렇게 가는 것의 끝이 발로 공멸이라는 결론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빗금 철폐에 교회가 나서야하며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족보와 에서의 족보를 차별하지 않고 융성하게 하셨습니다. 방법론이야 다를지 모르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심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듯이 애굽도, 앗수르도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이사야 19:23-25절을 읽겠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에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요나가 니느웨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신경질적으로 불만을 토로할 때 하나님이 요나에게 직격하신 말씀이 오늘 설교의 결어처럼 여겨져 소개하고 기도합니다. 요나 4:11절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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