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오셨습니다. 어린 소년 조니는 항상 학교를 가는 길에 교회를 지나쳤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날마다 교회 문을 열면서 말했다. “하나님, 안녕하셨지요? 저에요. 조니!” 그러고는 미소를 짓고는 문을 닫고 학교로 향했다. 소년은 나이가 들어서도 매일같이 교회 안으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며 말했다. “하나님, 저에요. 조니!” 여름에 런던으로 졸업여행을 갔을 때도 그는 언제나 열려 있는 교회 문을 열고는, 자신이 런던에 있는 방심하고 있을 하나님을 놀라게 하려는 듯 웃으며 그의 존재를 알렸다. 그리고는 몇 년이 지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조니는 그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죽기 바로 직전 조니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조니, 나야, 하나님!” 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호스피스 사역자로 살았던 엘리자베스 퀴블로스 케슬리가 쓴 ‘상실수업’ 에 담겨 있는 글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녀가 이 글을 소개한 이유는 인간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죽음조차도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 주 전, 경향신문 특집 기사에서 대한민국의 종교 인구가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표적인 3대 종교에 부합되는 불교, 천주교 할 것 없이 전반적인 감소 추세라는 진단을 심도 있게 내놓은 것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기사는 종교 인구의 감소라는 대세의 가장 큰 원인을 종교의 본질 상실과 소득 수준의 상승 두 마리 토끼 때문이라는 사회학적인 분석을 내 놓았는데 목사인 저 역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처럼 의미 있게 종교를 분석한 특집 기사는 제일 마지막 결어 부분에서 이렇게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이제 사라질 것인가? 아이러니하지만 소득의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예전에 맹목적인 추구라는 종교적인 패러다임의 모습이 아니라도 더 더욱 종교성은 심화될 것이라는 기사의 편집자들이 내놓은 진단을 보면서 정확한 예측이라고 저 또한 놀라며 동의했습니다. 나름 석학들로 구성된 특집 기사의 대담자들은 결국은 예리한 통찰과 이론적, 사회학적인 분석의 결과 정답이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죽음 때문이라는 한계를 읽으면서 목사인 저에게는 영적인 흉통(胸痛)이 느껴졌습니다. 왜 일까요? 너무 작고 초라한 인간 한계라는 좌표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인 죽음을 분석하려고 하는 무모함이 진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조니의 일례는 죽음조차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죽음이라는 놈이 기독교적인 특별한 관리 대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함께할 친구 정도의 일이라는 점은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충격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은 정답입니다. 이렇게 선포하며 저를 보고 객기라고 비난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제가 기독교를 택한 이유는 기독교가 종교가 아니라 오늘도 나의 삶에서 예수라 일컫는 숨 쉬는 생명의 호흡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예수라는 생명의 호흡은 오늘도 나의 심장의 맥을 용솟음치게 만드는 유일한 제일 원인입니다. 이 예수는 그래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나의 전부입니다. 나의 전부이신 예수님께 나아오신 여러분, 참 잘 오셨습니다. 세인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여러분께 선물 하나, 드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