讀書와 毒書 작년, 박형서 작가의 ‘새벽의 나나’ 를 시작으로 셀리 모건의 ‘니웅가의 노래’ 까지 1월부터 3월까지 순발력과 가속도가 붙어 무려 33권의 책을 섭렵했습니다. 한 달에 평균 11권의 책을 읽었다는 통계입니다. 뒤돌아보니 저는 말 그대로 책 속에 파묻혀 살았고 그래서 그런지 저와 함께 독서 여행을 떠난 후배가 저에게 ‘미친 독서’ 라고 말할 정도로 2014년 1-3월에 그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허나 금년 들어 어제(14일) 까지 금년에 읽은 책들을 모아둔 목록표를 보니 김기석 목사의 ‘아슬아슬한 희망’으로 시작해서 여성학자 정희진 파워 라이터가 쓴 ‘정희진처럼 읽기’ 까지 21권의 책을 읽은 것으로 비교되니 성적표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21권의 책 중에서 3권은 존 스토트와 톰 라이트 그리고 김세윤 박사의 데살로니가 전서 연구 학술서이다보니 실질적으로 지난주까지 제가 친구 삼아 완독한 책은 18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성적표에 대하여 유구무언이지만 용기를 내서 변명 하나할까 합니다. 사고 이후 정식으로 세명대학교 한방 병원에서 한방치료를 받은 지 3개월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3번 치료를 받다가 근래 두 번으로 줄였습니다. 호전의 기미도 있어서이지만 실은 한방 치료를 받는 데에 있어서 체력이 뒷받침이 안 되기를 때문입니다. 치료를 받고 온 날은 흔히 하는 말로 초죽음 상태가 3-4 시간 이어지다보니 쉬어야 다음 사역을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지난 2월은 상태가 가장 좋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책하고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독서 목록표를 보니 2월 한 달 완독한 책이 존 맥아도 목사와 레슬리 뉴비긴의 책 고작 2권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저에게 떨어진 독서 성적표는 F 학점이었습니다. 3월에 들어 기를 쓰고 다시 급격히 떨어진 독서 페이스를 올려보려고 하는 데 이번 달에는 치료를 받고 오면 빈혈 환자처럼 한 동안 어지러워 녹록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지난 주 경향신문 칼럼에 기고된 대안 공동체 김종락 소장의 “독서(讀書)가 독서(毒書)다(?)” 라는 제하의 책읽기 모임에서 일어난 칼럼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문학, 역사, 정치와 경제, 철학, 문화예술은 물론이고 만화까지도 섭렵하며 미친 둣이 책을 읽는 연구소 안 사람들의 공통점을 소개하고 있는데 성경 말씀 구절을 굳이 패러디하여 소개한다면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하니라” 라고. 아마도 지금 저의 모습인 것 같아 그의 글이 더욱 가슴에 찔렸습니다. 그는 칼럼 말미에 아주 친절하게 이렇게 에둘러 독서를 찬양합니다. “어떤 경우든 독서(讀書)는 독서(毒書)가 되지 않는다.”고. 지난 주 대 심방 셀에서 교제를 하다가 우연히 책읽기에 대한 소재가 대화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해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이야기 중에 앞서 말한 저의 변명들을 변명들로 늘어놓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체 한 명이 지나가는 말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래서 요즈음 설교에 예전보다 책 인용이 줄었군요.” 듣고 났는데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식은땀이 났습니다. 교우들 중에 저의 독서량까지도 체크 리스트 하고 있는 지체도 있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목사에게 이런 지체가 있다는 것은 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목사를 공부하게 하는 복덩이이니 말입니다. 저도 분명히 압니다. 독서(讀書)는 결코 배신하여 독서(毒書)가 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독서는 영혼의 배부름이라는 호사임을. 이참에 핑계대고 한방 치료를 계속해야 하나 하는 마음으로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땡땡이(?)를 치고 싶지만 호랑이 같은 아내가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도 쉽지 않습니다. 요새는 아내가 더 무섭습니다.(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