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차준희 목사가 예레미야서를 배경으로 말씀사경회를 인도했을 때 가장 인상적인 테마가 바로 예레미야 20:9절의 해석이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당시 친구는 예레미야의 이 심정을 ‘흔들림의 영성’이라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했고, 하나님이 죄라고 하셨기에 죄라고 전했고, 악이라고 하셔서 악이라 전하였건만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것은 구금이요, 린치요, 핍박이었기에 너무 힘들어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다짐 이후, 시대의 예언자로서 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의 영혼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는 예레미야의 그 마음을 ‘흔들림의 영성’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오래 시간이 흘렀지만 친구의 외침이 오늘, 특히 더 더욱 메아리가 되어 종에게 밀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직은 가장 인간적으로 존중 받아야 할 유아들이 폭력이라는 물리력으로 제어당하는 오늘 내가 사는 이 땅, 본인이 자행하는 천인이 공로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피해자에게 큰소리치는 사이코패스들이 즐비한 이 땅, ‘을’의 사람들을 인격을 가진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난도질해도 괜찮은 존재로 여기는 동물적인 ‘갑’들이 수두룩한 이 땅, 나와 같지 않은 이념을 가진 자는 반드시 척결해야 하는 적으로 매도해 버리는 이 땅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이 무엇일까? 목사로서 깊이 생각하는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도달한 영적인 심포니는 ‘흔들림의 영성’ 이었습니다. 이 땅을 향한 흔들림의 영성은 그리스도인들만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기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렸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최인훈 작가가 쓴 ‘광장’이라는 소설을 늦깎이 독자가 되어 읽었습니다. 글을 읽는 내내 남북한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결국 죽음을 택한 주인공 이명준을 만나면서 아이러니하게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시대의 지성적 자존감에 저 또한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는 점입니다. 그의 생각하려는 흔들림은 참 아름답게까지 보였습니다.
1980년 초에 대학생 선교회 총재이셨던 고 김준곤 목사께서 ‘예수 칼럼’ 에서 언급한 ‘무주의’(noism) 라는 단어를 가슴에 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주의의 시대가 목회의 현장이 될 것이라는 나름의 혜안 때문이었습니다. 슬픈 것은 35년이 지난 오늘 이 땅에 한 목회자가 예언적으로 외쳤던 그 불행의 조짐이 그 어느 때보다 만연하고 있다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이 아픔의 흔적이 진한 이 땅에 예레미야가 가졌던 흔들림의 영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의 그 마음이 무감각해지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최고의 비극임을 인지하고 오늘의 아픔을 품고 흔들림의 영성을 견지하는 세인지기들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