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4번째 강해) 제목: 말씀, 그 가운데 서서 본문: 고린도전서 15:1-8 서론) 경북 포항에 가면 제자가 개척한 교회가 있습니다. ‘보배로운 예수교회’ 입니다. 우연히 지난 주간에 제자 목사와 교제할 일이 있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다가 교회를 개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하고 제자가 소개한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교회가 아름답게 서 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궁금한 것은 제자가 어떤 목양의 모습으로 사역하는가? 이기에 교회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제자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소름끼치게 놀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찐개찐의 소름이었습니다. 제자를 처음 만난 것은 부산에서 전도사로 부교역자 사역을 시작할 때였습니다. 전담 사역자였지만 교육기관으로는 고등부를 맡아 지도했는데 주일 오후에 드려지는 고등부 예배 때마다 정말로 예배를 사모하며 잘 자라주는 고등부 학생이 눈에 띠었는데 바로 이 친구였습니다. 훗날 제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응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훈련을 마치고 포항에 있는 아주 건강한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훈련을 받고 이번에 교회를 개척했는데 정말로 괄목할 만한 시작의 승리를 거두고 있음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술했듯이 제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던 이유는 부산에서 사역하면서 전했던 메시지를 그가 다시 리바이벌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시쳇말로 항간에서 자주 쓰는 말이 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다.”라는 말입니다. 부산에서 사역할 때 고등부 학생들에게 전한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십자가의 도’였습니다. 제자가 십자가의 도에 굳게 서서 말씀을 증거 하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르게 가슴 뭉클한 감동에 젖어보았습니다. 목사가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낼 때는 다름 아닌 십자가라는 복음의 핵심 가치에 붙들려 있을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2:2절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구절을 선포할 때의 배경을 우리는 이미 2장을 강해할 때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밀어닥친 수많은 난제들을 에베소에서 보고받는 바울의 마음은 착잡했을 것입니다. 그토록 고린도에서 외쳤던 복음의 핵심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서로 반목과 분열로 4개로 갈라진 상태에서 자기의 분파가 잘 낫다고 우기고 있는 기막힘이 바울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고린도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표적만을 구하는 감각적 신앙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헬라인들은 그들의 자존감이라고 보았던 지혜가 최고의 가치라고 우기고 있던 영적 기상도 앞에서 그래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는데 교회도 이러한 고린도의 세속의 가치에 무너졌거나 무너지고 있었던 현상에 바울은 거룩한 분노를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런 세속적 가치에 함몰되어가고 있는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서슬이 시퍼런 영적 비수를 날린 것이 바로 2:2절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근동의 자료들에 의하면 특별히 언어적인 능력이 탁월했다고 보고됩니다. 그러기에 어느 경우에는 헬라어로 또 어느 경우에는 히브리어로 또 어느 경우에는 로마의 언어로 또 어느 경우에는 아람어로 필요에 따라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무지하거나 무식했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무엇을 엿보게 됩니까? 바로 지금, 바울이 무엇에 붙들려 있는가를 봅니다. 바로 지금 그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엿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엿봄을 통해 전율하는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서 있는 현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현장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역자로 최고의 행복이며 강력한 밑힘이 바로 이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목회 현장에서 살아온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이라는 세월은 저에게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세간에서 흔히들 쉽게 하는 시쳇말로 이런 표현을 씁니다.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다.” 녹록하지 않은 인생을 산 사람들의 넋두리입니다. 저에게도 목회 인생 30년은 바로 이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헌데 그 30년을 뒤돌아보며 순간 위기도 있었고, 위기가 흘러 넘쳐 목사의 로브를 벗을까도 생각할 정도의 치명적인 어려움도 당했지만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 준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울의 그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그랬더니 남은 결과물들이 보입니다. 그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 말입니다. 포항에서, 세종에서, 의정부에서, 성남에서, 대전에서. 인도네시아에서, 미국에서, 대전에서, 파주에서, 밀양에서, 진해에서 등등 죄가 선택적 기호이고 교양적인 선택이라고 말하는 이 기막힌 세대에서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붙들고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재산이 되었고 결과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우리 제천 세인의 지체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강덕 목사가 피를 토하며 외쳤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나의 구주이시며 그리스도 되심을 인정하는 현장에 서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여러분 신앙의 흔들리지 않는 밑힘입니까? 정말로 그러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바울은 부활장이라고 흔히 말하는 본문을 시작하면서 이 밑힘을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재확인합니다. 본문 1절은 이것을 바울이 증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바울은 두 가지를 재확인하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었습니다. 본문 3-4절을 주목하십시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그렇습니다. 바울이 전하고 확인하려고 했던 것은 두 가지 즉 복음의 핵심이었던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다시 언급하며 곱씹으려고 했던 바울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① 이 복음은 너희가 이미 받은 것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② 이 복음 가운데 너희들이 지금 서 있는가? 의 메시지입니다. 바울이 곱씹은 이 두 가지의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의 영적인 핵심이요 가치입니다. 받았는가를 곱씹은 것은 복음의 확신을 다지는 것이었고, 서 있는가를 묻는 것은 그 복음의 확신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 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가 전 세계의 교회에 비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가르침으로 교우들을 강하게 한 영역이 있다면 전자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저는 이것이 한국교회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정체성과 확신에 대하여 강력하게 가르쳤다는 것은 무엇보다 복입니다. 그런데 후자를 되씹을 때마다 갑갑해 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단적으로 말합니다. 전자보다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배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나의 구주라는 메시지는 기독교 교리의 전부이며 성경적 증언의 초점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가르침을 지속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교회가 교리의 본질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장점입니다. 수없이 많이 희석된 유사복음으로 성경을 왜곡하여 전하는 교회들이 산재해 있는 이 때 저와 여러분의 조국교회가 예나 지금이나 이 부분만큼은 뒤로 물러서지 않으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그런데 2절 본문에서 바울이 언급한 내용을 우리 한국교회에 적용하면 조금은 염려스럽고 씁쓸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직역한 그대로의 정설로 이 구절을 받으면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반면 이 구절을 역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쉬움과 유감이 엿보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나의 주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믿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의 근간을 거부했든지 아니면 아예 믿지 않았던 자들이 있었다는 역설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과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부활 사건과는 2000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인지가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과 다시 살아나신 것의 간극은 불과 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불어 지금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목도한 후에도 살아 있기까지 합니다. 또한 이 편지를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 편지를 쓴 바울에게서 내가 직접 살아나신 그 분을 다메섹에서 만났다는 증언도 수없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라는 사실에 대하여 믿지 못하고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2절에서 에두른 표현이지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통하여 질문 하나를 정말로 리얼하게 던져야 할 게 있습니다. 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 부활하신 예수가 나의 주군임을 인정하지 못합니까? ※ 그 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표현이 어느 경우에는 과격하다는 생각이 드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조금은 세련되고 다듬어진 표현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분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목사님, 신앙의 색깔이 사람의 성격과 자라온 배경과 후천적인 지식 습득의 과정과 선천적인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함이고 심지어는 독선일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수긍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수긍했다는 것을 제가 가지고 있는 목회적인 일체의 마인드를 양보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어느 그리스도인은 선천적, 후천적인 성향이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또 어떤 분은 왼쪽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에 따라 좌파, 우파적인 성향의 신앙적 색깔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 것입니다. 성도 중에 어떤 분은 감성적인 면에 풍부하여 감정적인 신앙의 색깔이 지성과 의지에 비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감성적인 면보다는 누군가는 이성적인 면에 뛰어나거나 의지적인 면이 더 강한 성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성향에 맞는 신앙의 장점은 개발하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신앙생활을 조금 더 효과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여지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론입니다. 총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신앙의 총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 분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임을 믿는 유일한 통로는 그 분을 만나야 한다는 것에서는 좌우가 있을 수 없고, 이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켜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주로 믿을 수 없고, 부활하신 주님을 인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도 생기셨을 것입니다. 맞는다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그 분의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을 믿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이 맞는 말이라고 수긍하는 자들이 그래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또 항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도대체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그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구름 잡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당연한 질문이고,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질문에 대하여 정말로 다시는 질문을 하지 못할 쐐기를 박는 대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배운 게 도둑질이기에 목회 30년 동안 줄곧 단 한 번도 다른 방법이 아닌 이 방법으로 주님은 저를 만나주셨기에 이것 말고는 다른 것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가장 정확하게 담임목사가 확신하고 있는 만남의 방법은 이것입니다. ※ 말씀하심으로 만나주십니다.
이것은 제 주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고집하는 단순한 고집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을 통하여 수도 없이 증언하고 있는 실례이며 확실한 내증이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육신으로는 그렇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영적인 방법은 대단히 신비로운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오신 주님이기에 또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지속적으로 그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거하신다는 점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주님은 또 말씀으로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오늘도 인격적으로 만나는 방법은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입니다. 재독학자 한병철 교수의 글인 ‘심리 정치’를 읽다가 밑줄을 그었던 대목이 있었습니다. “모든 명령 체계, 모든 지배의 기술은 피지배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고유한 성물(Devotionalie)을 만들어 낸다. 성물은 지배 관계의 물질화로서 지배 관계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다. 성물을 곧 예속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마트 폰은 일종의 디지털 성물이다. 아니, 디지털의 성물이 곧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은 묵주처럼 예속의 도구로 기능한다. 스마트 폰과 묵주는 모두 자기 검열과 자기 통제에 사용된다. 지배는 감시 업무를 개인에게 떠넘김으로서 효율성을 제고한다. ‘좋아요’는 디지털의 아멘이다. 우리는 ‘좋아요.’ 를 클릭하는 순간 스스로 지배에 예속되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효과적인 감시 도구일 뿐 아니라, 모바일 고해실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은 디지털 교회, 글로벌한 디지털 시나고그이다.”(pp,25-26) 한 교수가 왜 이 글을 남겼을까요? 단적으로 이렇게 선포하고 싶었던 것을 학자적인 양심으로 순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믿고 있는 것, 그리고 꼭 들어야할 것이 스마트폰으로 베풀어지는 말씀 같은 것의 성찬(聖餐)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가장 위험스럽게 생각하고 또 경계의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너무나 소름끼치게 무서운 존재로 다가왔다는 사실입니다. 말씀 같은 것의 말씀으로의 둔갑입니다. 예배 같은 것의 예배로의 둔갑입니다. 성령 같은 것의 성령으로의 둔갑입니다. 두렵고 소름끼치는 사탄의 공격입니다. 말씀 같은 것이 말씀으로 둔갑하였기에 말씀을 들음으로 가능한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봉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말씀을 듣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함으로 내 자아의 불신앙을 인정하지 않게까지 하는 영적 식물인간을 만듭니다. 사실, 제가 40대 목사로 사역할 때만 하더라도 이런 걱정은 없었습니다. 말씀 같은 것이 말씀의 자리를 꿰차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저는 말씀 같은 것과의 영적인 싸움을 치열하게 치루고 있습니다. 지난 고난주간 기간 동안 실시한 말씀사경회가 있었습니다. 그 사경회에 대한 소감을 교우 한 분으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사경회 내내 불편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경험한 말씀 사경회가 내내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전에 참석했던 일체의 부흥회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설교들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 만난 사경회는 불편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말씀들이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가끔 물러나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도 결코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교우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진하는 정체성의 탈바꿈이라는 귀한 여정에 있겠구나 싶어 승리하도록 화살기도를 드려주었습니다. 말씀 같은 것은 유연성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타협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유연성이 없습니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말씀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같은 것은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말씀은 하나님께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통로는 말씀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만 만날 수 있음을 말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성서일과는 역대상과 역대하였습니다. 특히 역대하 5장을 읽던 금요일, 저는 한 구절을 읽으면서 소리 없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만나주심에 가슴 떨림으로 심쿵했습니다. 역대하 5:4-7절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매 레위 사람들이 궤를 메니라 궤와 회막과 장막 안에 모든 거룩한 기구를 메고 올라가되 레위인 제사장들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모든 이스라엘 회중이 궤 앞에서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무슨 장면인지 아십니까? 솔로몬이 7년에 걸친 성전 건축의 역사를 마치고 민간 지역에 방치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드디어 하나님의 천사들의 호위하고 있는 지성소로 옮기는 대역사의 장면입니다. 법궤를 옮기는 장면의 짧은 기사에서 역대기 역사가는 무려 4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었다고. 나는 그날 또 주님을 인격적으로 뵈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손쉬운 수레로 옮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짊어지는 것입니다. 라마 불교의 사원에 가면 라마 불교의 경전이 들어가 있는 마니퇴라는 기구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로 라마 사원에 올라온 사람들은 그 마니퇴를 돌립니다. 이유는 마니퇴를 한 번 돌리면 불교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들어있는 통을 돌린다고 그 말씀이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나 늘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사모하여 묵상하고 읽고 행할 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또 다시 사신 예수께서 나를 만나주신다는 것입니다. 지체들이여, 그 말씀 위에 서십시다. 그 말씀의 은혜 위에 서십시다. 오늘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소리치며 선포한 외침이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외치는 담임목사의 외침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 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