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세워주고 있습니까?
본문: 고린도전서 14:6-12
서론)
지난 주간에 가나안 성도를 만났습니다.
제가 목회 사역 중에 정말로 관심을 갖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약 1시간 정도, 가나안 성도의 이야기를 아주 정성을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얼마나 깊은 영적인 골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예수가 전부인 사람들, 그렇게 포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누가 보더라도 예수 잘 믿는 사람들, 예수 때문에 승승장구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예수는 진짜일까요? 만에 하나 그들이 잘 되고 있는 꺼풀들이 벗겨져나가면 그들은 정말로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살까요? 목사님은 목회를 하면서 가지고 계신 특별한 은사, 예를 들어 심방을 잘하는 은사, 잘 가르치는 은사, 설교도 은혜롭게 하는 은사 등등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에 하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면 목사님은 그래도 예수님이 전부라고 진짜로 고백하실 수 있나요?”라고 도전했습니다.
물론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불완전한 자아의 모습을 보았지만 그가 왜 가나안 성도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어서 그에게 다그치거나 공격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모드로 첫 번째 만남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상태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참 마음 아팠습니다.
제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포용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 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야기할 것 없고 만에 하나 제가 설교도 못하고, 심방도 못하고, 찬양의 은사도 없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스킬도 없고, 목사라는 직업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아무 것도 없는 정말로 빈껍데기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나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를 물으셨는데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는 나의 전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가 가지고 은사로 보고 목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전혀 그런 소임을 감당할 만한 은사가 저에게는 하나도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때문에 나를 더 더욱 목사로 사용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연약함을 더 사랑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김광석이라는 고인 된 가수가 있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언젠가 차 안에서 이 노래를 듣다가 대중가요가 아니라 복음성가처럼 들렸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행하여 주셨던 사랑은 너무 아픈 사랑이었습니다.
왜 아픈 사랑이었습니까?
죽을 이유가 없는데 진짜 죽어야 할 대상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대신 죽으신 기막힌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아픈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이 죽었기에 내가 다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아픈 사랑을 사랑이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아픈 사랑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나를 다시 세워준 기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클라이맥스는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일으켜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다시 세워줌이라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들을 통해 최고의 은사가 사랑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여타 다른 은사들 역시 기본적인 베이스가 공통적인 분모가 있어야 한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세워주는 것입니다.
제가 가나안 성도를 만나서 하려고 했던 것은 그를 짓누르고 있는 영적인 압박을 주님의 이름으로 해방시켜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녹록하지 않은 싸움입니다.
그러나 이 세워짐은 성도나 교회나 하나님의 목적이시자 목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 세우심은 기적들을 만드시기 위해 오늘 우리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일하시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론)
저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하여 바울은 방언을 폐하기를 바라는 방언 폐기론자가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만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하는 자들이 교회에서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방언은 개인이 하나님께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에 철저하게 개인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자칫 잘못하면 그것이 자기만족의 종교적 수단으로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임을 지적했습니다.
반면 예언은 교회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더욱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음도 살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분명히 방언을 하는 것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신학적 바탕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성서적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조금은 냉정하게 방언에 대한 신학적, 성서적 이해에 접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왜 이렇게 소극적이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제일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고 예언의 은사만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방언의 신비로운 영적 희열을 몰랐기에 방언에 대한 경계하며 소극적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의심을 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답에 대하여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18절이 그 답을 제시합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구절을 적용한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방언 예찬론자들에 비해 방언을 더 유창하게 했지 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필요에 따라 방언 기도를 하나님께 자주 드렸던 것이 분명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한 자가 방언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비판적이라면 맛을 모르니까 하고 평가절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에 대하여 익숙한 기도를 한 자라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본인의 고백을 통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 바울이 방언을 경계한 이유를 설명하는 세 가지의 실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음을 내는 악기를 통한 본 이유입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이해를 돕기 위해 7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가령 풀루트나 하프 같은 악기들이 각기 독특한 음색으로 조화를 이루며 연주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떤 선율을 알아듣고 음악을 즐기겠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악기는 제 각기의 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각 악기가 치고 들어오는 세션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전문가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케스트라의 장점은 부분별로 나오는 각기 악기의 고유한 음색을 가장 조화롭게 만들어 최고의 선율을 창조해 낼 때 청중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화를 무시하고 바이올린이 연주해야 할 때, 바이올린이 아니라 비올라가 치고 들어온다든지, 하프가 치고 들어오면 소리의 극대화된 미를 잃어버리고 도리어 그것이 무슨 악기의 소리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잡음과 소음처럼 변하여 역효과를 내는 것과 같음을 본문 7절이 알려줍니다.
만에 하나 방언을 교회 공동체에서 하는데 이 방언이 지난 주일에 선포한 메시지의 주제처럼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자기만족의 종교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자기만을 위한 언어의 발산이라면 오케스트라와 같은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기 때문임을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② 나팔소리를 통해 본 이유입니다.
본문 8절을 읽습니다.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같은 맥락입니다.
나팔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주후 53-55년 시대의 나팔은 군사용이었습니다.
적의 침입을 알리고 방어하기 위한 신호였습니다.
이렇게 나팔소리는 공동이 함께 아는 소리를 내야지 그 소리를 듣고 긴장을 할 텐데 나팔소리가 전쟁을 알리는 나팔 음이 아니라 누군가를 환영하는 팡파르 소리가 된다면 군사들이 헷갈리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소리 하나 때문에 군대가 일사분란 한 행동을 하지 못하면 그게 어디 군대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방언을 말하는 자들이 방언을 행함으로 같은 목표를 위하여 달려가는 선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방언이 최고의 방언이라고 서로 우기는 볼썽사나운 일이 고린도교회 안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민낯에 대하여 바울은 방언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경고함과 동시에 고린도교회 공동체에게 경성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을 통해 본 이유입니다.
본문 9절을 읽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듀크 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리처드 헤이스 교수의 주석을 참고해야 할 것 같아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일부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는 천상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이 자신들의 영적 권능과 성숙의 궁극적 사안이라고 믿었다. 그러다보니 공동체의 예배 모임은 여러 교인들이 성령의 영감 아래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동시에 하면서 무질서의 혼란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방언의 과시 속에서 서로 잘하려고 경쟁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p,384)
리처드 헤이스의 주석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말한 바울의 연이은 방언에 대한 통찰 때문입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방언이라는 성령께서 주시는 유익한 은사가 뜻을 알지 못하는 소리로 전락되는 일에 대하여 바울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감정을 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론적으로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바울은 악기, 나팔, 그리고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 간의 대화라는 실례를 통하여 방언을 하는 자들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피력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 결론을 본문 12절에서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방언의 은사를 포함하여 모든 은사들을 사용하는 단 한 가지의 경우를 바울은 공격적으로 마지막 절에서 공표합니다.
무엇입니까?
★ 교회를 세우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세우기 위하여’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인’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 자체는 많이 사용되는 단어라고 볼 수 없지만 이 단어의 원형인 ‘오이코노모스’는 상당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오이코노모스’는 ‘청지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청지기’는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혹은 집을 관리하여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는 사람입니다.
집과 공동체를 세워가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청지기입니다.
은사는 무엇일까?
교회의 청지기들인 우리들을 위해 주신 성령의 선물이기에 당연히 교회를 세워가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만에 하나, 은사를 내세워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는데 사용한다면 그건 정말로 은사를 한참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 가는데 사용되는 도구, 바로 이것이 은사인 것입니다.
물론 방언, 예언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2016년에 졸필이지만 인문학 도서와 사회학도서 중에 3년간 읽은 약 300여권의 책 중에 27권을 선별해서 서평집을 출간했습니다.
그 저서에 담은 글 중에서 제가 많이 아파하며 쓴 글이 있는데 ‘망루’라는 소설입니다.
이 ‘망루’라는 소설의 작가는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목사인 주원규 목사의 글입니다.
그는 이 ‘망루’라는 소설을 통해 용산에 일어난 제 4구역 철거 사건을 주제로 삼은 아픈 소설입니다.
저자가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교회가 기득권을 갖고 있는 살아 있는 권력에 아부하여 잘못된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침묵하고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에 대하여 신날하게 비판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가 한편 교회가 그렇게 국가권력에 아부한 것에 대하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을 부인할 수 없어 많이 아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원규의 글을 서평한 제 글에서 이렇게 반론을 폈던 흔적을 남겼습니다.
현직 목사인 그가 ‘망루’라는 소설을 통하여 아주 농후하게 한국교회의 소멸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보였기에 그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제 스스로 밝힌 것입니다.
그 대목을 이렇게 썼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셨던 삶의 내용들을 그대로 살고 또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환언한다면 예루살렘 중심적인 삶이 아닌 갈릴리 중심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교회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다시 사는 방법은 예루살렘 행이 아닌 갈릴리 행 열차를 타는 것이라고 진단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고언에 대하여 다른 변명으로 구차하게 비겁해지지 말자. 나는 그것이 용기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균형을 잡아야 하겠다. 저자는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썼을까? 이 기막힌 뒤틀어짐을 반성하고 돌이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무슨 일을 해도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에 근거하여 일어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저자가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는 그의 자유의지일 것이다. 허나 만에 하나, 전자가 아닌 후자가 소설을 쓴 목적이라면 대단한 유감이다. 내가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바람 앞에 촛불인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한국교회가 예언자 이사야 신탁의 언어처럼 남은 그루터기가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에게 주어진 자정의 기회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한국교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의인들이 있을 것을 믿기에 희망을 갖는다. 아마도 하루에도 수없이 목사의 직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열두 번도 더 있는 아픔을 느끼지만 이것이 지금까지 목사의 로브를 벗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르지 못한 교회를 향하여 날선 비난의 화살을 날리는 것은 얼마든지 맞아야 하는 것이며, 또 그 매 맞음을 통해 유행가 가사처럼 교회가 아픈 만큼 성숙해 지는 것은 역설의 의미로 박수까지 보내고 싶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을 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속의 가치에는 유감스럽게도 손을 들어주고 싶지는 않다. 필자는 하나님이 패역한 교회를 고쳐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을 지금도 고지식하게 믿는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현직 목사이다. 물론 전적인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겠지만. 나의 이 균형의 추가 흔들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이강덕,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pp,183-184)
소설을 쓸 수 있는 은사를 어떤 한 개인에게 주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어진 은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 나아가는 즉 ‘오이코노메인’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은사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건 그 때부터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주어진 악의 도구가 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 두 번째 책을 펴내면서 들어가는 말에 이런 내용을 삽입했습니다.
“시골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이기에 언제나 보는 소견이 좁고 촌스럽습니다. 그래서 글을 내놓기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낸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한국교회 때문입니다. 신념과 신앙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일부 몰지각한 자들의 교회 사유화, 전혀 신학적, 성서적 사유함이 없이 해석되어지는 교회만을 위한 수구적 방어 논리, 그리고 이런 취약함을 빌미로 침소봉대하여 교회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있는 세속적 가치라는 다양한 공격들에 대항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강덕,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p,15.)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저는 교회의 사유화인 세습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해서 많이 염려스럽습니다.
동시에 신학적, 성서적 사유함이 없는 공부하지 않는 강단의 취약함도 교회를 나약하게 하고 쓰러지게 하는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 돌이켜야 하고 상식의 선으로 교회가 회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들보다 더 심각하게 경계하는 것은 이런 일들을 빌미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일체의 사탄적인 행태와 세속화된 공격들입니다.
목사와 성도의 몫이 교회의 교회되지 못함을 바르게 하고 돌이키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임은 수없이 강조하고 곱씹어도 과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 목적이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16-18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주님은 교회를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세우는 분이셨습니다.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만드는데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이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은사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뉴스프링 교회를 담임하였던 페리노블이 알콜 중독으로 교회에서 담임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이유는 심각한 우울증을 벗어나기 위해 술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 대형교회목사였습니다.
또한 아주 설교를 잘 하는 목사였습니다.
그런 그가 일순간 급전직하한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사탄에게 무너졌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아 완치되었고 얼마 전부터 스티븐 퍼틱 목사가 시무하는 엘리베이션 교회에서 동사 목사로 다시 서서 설교를 하는 회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페리 노블을 복기한 이유는 그가 다시 목사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선 것이 마치 그가 이전에 했던 설교의 말과 오버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전에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온갖 추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여기신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시며, 교회를 세상의 변화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 그 분의 계획이다. 교회를 경멸하는 것은 그 분의 신부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과의 관계는 좋아질 수 없다.” (해방, p,197)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교회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왜?
교회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인 교회를 위해 우리들은 성령의 은사를 각자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은사는 교회를 사랑하셨던 주님처럼 교회를 사랑하고 다시 세우는 도구로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다.
은사는 교회와 성도를 다시 세우는 도구임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각 사람에게 주어진 각양의 은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를 예배하리라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찬양하리라
아무도 헌신하지 않는 그곳에서 주께 헌신하리라
누구도 증거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 주를 증거하리라
내가 밟는 모든 땅 주를 예배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덮어지게 하소서
내가 선 이곳 주의 거룩한 곳 되게 하소서
주의 향기로 물들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