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7번째 강해) 제목: 중요한 바로미터 본문: 고린도전서 14:1-5 서론) 미국 시카고에 위치해 있는 대형교회인 윌로우크릭(willow-creek)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빌스는 2000년 초반에 우리나라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 목사로 유명합니다. 소위 말하는 ‘구도자 예배’ (seeker-service)를 도입하여 대단히 많은 불신자 그룹의 미국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에 있어서 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 하이빌스 목사가 2007년에 본인이 시무한 윌로우크릭 교회의 32년간의 사역을 총 점검한 보고서 “Reveal: Where Are You?”를 세상에 내놓았는데 정말로 충격의 충격으로 교계를 뒤흔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보고서는 윌로우크릭 교회 아이디어 뱅크의 역할을 하는 동역자인 그렉 허킨스(GREG L.HAWKINS)와 콜리 파킨슨(CALLY PARKINSON)이 공동으로 집필한 방대한 보고서인데 윌로우크릭 안에 있는 그룹을 통틀어서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3년간 조사한 내용과 120명을 일대일로 면담한 이후에 그들의 영적 변화를 추적한 결과 보고서입니다. 손이 안으로 굽는다고 조사 책임자들은 이 보고의 결과가 지난 32년 동안 윌로우크릭이 보여준 엄청난 양적 성장처럼 대단히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결과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정말로 충격적인 결과를 알려주었다고 솔직하게 보고합니다. “넓이는 1마일인데 깊이는 1인치” 이런 교회를 어떤 교회라고 합니까? 괴물 교회입니다. 모이는 인원들은 수없이 많은 데 그 인원이 에스겔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인 교회, 무슨 교회입니까? 해골교회입니다. 이 충격적인 보고를 받은 빌 하이빌스 목사는 대단히 중요한 결심을 했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부흥하는 교회의 롤 모델로 삼은 교회의 담임목사가 그런 전 세계 교회들은 향하여 정직한 고백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세 가지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정직한 보고를 합니다. ① WHERE ARE WE?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② WHAT DO WE SEE?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③ HOW DO WE GET THERE?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것을 얻었나?) 32년의 윌로우크릭의 목회에서 빌 하이빌스가 던진 질문은 대단히 본질적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답했습니다. WE ARE FAILED. (우리는 실패했다.) 이 경천벽지의 충격적인 보고가 전 세계에 발표된 이후 많은 교회에서 멘붕에 빠질 줄 알았는데 생각이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도리어 빌 하이빌스 목사의 진심어린 자기 고백에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양상으로 판을 뒤바꾸는 일이 되어 저 또한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다면 빌 하이빌스 목사는 누가 보더라도 대단히 성공한 교회처럼 보이는 본인이 섬기는 교회가 왜 실패한 교회라고 진단했을까요? 보고서는 대단히 중요한 팩트를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의 필요(NEED)가 아니라 사람들의 필요(NEED)를 맞추는 사역 교회였기 때문이다.” 단 한 줄의 이 보고 결과는 오늘 저를 비롯한 한국교회를 섬기는 목사들은 물론 교회에서 중직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일체의 사역자들이 뼈를 깎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윌로우크릭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수없이 많은 재정과 인력을 동원하여 사람을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심어주어야 하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는 눈을 감았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윌로우크릭은 무리들로 넘쳐났습니다. 일전에 수요 기도회 설교를 통해 無理란 理가 없는(無) 자라는 설명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리(理)는 고린도전서 1:18절에 기록된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을 배제한 설교. 이것을 도외시한 말씀 잔치, 이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신자들이 모인 모임은 로터리 클럽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이런 모임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 클럽과 동일합니다. 어제 국민일보 신문에 ‘욜로’ 족에 대한 특집 기사가 미션 라이프 판에 게재되었습니다. ‘욜로’라는 단어가 우리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염된 것은 미국의 힙합 가수인 드레이크가 부른 ‘YOU ONLY LIVE ONCE’라는 노래가 대중들의 인기를 얻으며 전이된 미국과는 달리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욜로 족을 테마로 삼은 방송이 진행됨으로 우리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졌습니다. ‘욜로’는 말 그대로 ‘YOU ONLY LIVE ONCE’ 즉 ‘네 인생은 단 한 번뿐이야!’ 라는 캐치 플레이스를 내 걸고 그런 인생을 놓치지 말고 즐기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집단의 이니셜 네임입니다. 문제는 이런 욜로 족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 욜로 족도 근래에는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빌 하이빌스는 우리 교회가 실패했다고 평가한 이유 중에 하나를 이렇게 적용해 보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욜로 족에 맞는 예배를 만들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만들어 맞춤 예배를 실시했고, 그들이 여행지에서 취사선택할 수 있는 아주 부담 없는 예배를 만들어 가상공간에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단히 좋은 평가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들이 신앙을 포기하지 않게 한 것은 우리들의 공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가한 윌로우크릭이 32년 만에 다음과 같이 질문한 것입니다. ① WHERE ARE WE?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② WHAT DO WE SEE?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나?) ③ HOW DO WE GET THERE? (우리는 거기에서 어떤 것을 얻었나?) 이 질문에 단어는 들어있지 않지만 저는 한 단어를 삽입하고 싶었습니다. ‘바르게’ (rightly)입니다. 바르게 가고 있는가? 바른 것을 보고 있는가? 바른 것을 얻고 있는가? 질문했더니 답이 어떻게 나온 것입니까? 실패한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윌로우크릭은 2007년에 이 교회 양심고백을 한 이후 그들의 사역 핵심을 프로그램이 아닌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방향으로 목표 설정을 전환하는 대 혁명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지금 윌로우크릭은 미국 교회의 또 다른 건강성을 지향하는 교회로 우뚝 서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설교의 서두에서 내 던진 화두에 대한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땅에 세워진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되려면 분명한 바로미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로 존재할 수 있는 양보할 수 없는 바로미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필요한 것’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오늘 본문에서도 찾아볼까 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바울이 말한 아가페의 특성들을 조금은 깊게 성찰했습니다. 오늘부터는 14장을 여행하겠습니다. 원래 고린도전서의 구성 배열은 12장에 이어 14장이 나오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유는 오늘부터 살펴볼 14장은 고린도교회에서 대단히 치열하게 대척점에 서서 서로를 견제하고 심지어는 투쟁한다고 말할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두 은사 곧 방언과 예언에 대한 집요한 바울의 교통정리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로 보면 12장에 이어 14장이 붙어 있고 이 14장의 기록을 마친 뒤에 13장이 배열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편집에 대한 성경적인 분명한 고집은 사랑 장(章) 뒤에 두 은사에 대한 기록이 순서이기에 저자의 고집대로 다시 두 은사에 대한 최종적인 바울의 판결을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사랑장의 메시지를 의미 있게 설명한 뒤에 이런 사랑을 추구하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12장에서 이미 언급했던 여러 가지의 은사들을 신령한 것이라고 종합한 뒤에 이런 은사들을 사모하는 것도 역시 지속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후반절의 메시지입니다.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라고 말한 바울은 대단히 의미 있는 권면을 남겨놓습니다.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그 중에서 특별히 예언하는 것을 노력하라고 합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바울은 예언 신봉자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들을 연이어 보면 왜 바울이 예언하기를 강조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바울의 신학적인 은사 이해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언 기도를 하는 자는 그 기도를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예언을 하는 자들은 그 은사를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그러면서 방언은 이런 이유 때문에 하는 사람만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함으로 영적인 기도라고 못 박습니다. 반면,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예언은 사람들이 다 알아들 수 있는 말로 한다는 것을 에둘러 강조하기에 도리어 예언을 많이 할 것을 바울은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의 은사에서도 우리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음을 바울은 놓치지 않습니다. 무엇입니까? 덕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4절을 보면 덕을 세우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알게 해줍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바울의 초점은 은사를 활용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날을 세웁니다. 이 목적이 함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은사 활용법이며 사용법입니다. 여기까지 언급한 바울은 본문 마지막 5절을 통해 덕에 대한 이론을 근거로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더욱 사모하라는 끝맺음을 하며 본문 텍스트를 마감합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2-3절에서 살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영적인 은사이고, 예언은 사람들에게 행하는 은사라고 했습니다. 방언은 이런 이유로 하는 사람만 아는 언어를 사용하고, 예언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방언 폐기론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방언에 대하여 적대시 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바울은 하는 사람만 알아듣는 방언의 은사보다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하기를 더욱 힘쓰라고 권합니다. 만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자와 함께 기도를 하라고 종용합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본문에서 방언에 대한 사용법을 제시합니다. 방언하는 자는 통역의 은사를 하는 자를 대동하여 그 방언을 통해 교회의 덕을 세우려고 하는 데 전심하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상의 본문 텍스트를 통해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 강조한 것처럼 보이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예언의 은사 찬양론자처럼 본문에서 예언을 강조합니까? 저는 답을 제시하면서 여러분이 혹시 가지고 있을 선입견에 대하여 먼저 사전 교통정라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 내용에 집중하다보면 본문이 마치 예언과 방언 은사에 대한 대립 구도를 형성한 것처럼 읽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설교자인 저는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주시는 메시지를 은사의 우선순위로 해석하지 않고 은사활용을 교회 공동체에서 행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바로미터로 해석하기를 지지합니다. 어떤 은사가 나은 은사인가? 를 주장하는 것이 본문의 주제가 아니라 어떻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본문 텍스트의 교훈이라고 말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 은사의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기준점)는 은사를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예언의 은사를 가능하면 많이 하라고 했습니까? 본문 3절을 다시 곱씹겠습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이 본문에 기록된 ‘사람에게’라는 단어의 의미는 단지 생물학적인 존재인 사람이라는 단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저는 해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사람에게’라는 단위는 고린도교회를 이루고 있는 고린도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즉 고린도지역에 있는 비가시적 교회인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비가시적 교회인 사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게 하기 위하여 예언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통역하는 자를 대동하여 역시 비가시적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적으로 기도함으로 인해 덕을 세우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통역하는 은사를 가진 자가 많지 않은 고린도교회 구조상 도리어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기에 더 용이한 예언을 많이 하라고 바울은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언이든, 방언이든 은사 활용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기준점 즉 바로미터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은사를 자기만족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철저하게 교회를 세워가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크리스천 연합신문에 기고하고 있는 24번째 외고를 송고했습니다. 저는 이번 글에 미국 댈러스의 빌리지 교회에서 목회하는 매트 첸들러 목사가 ‘완전한 복음’(the explicit gospel)에서 갈파한 글을 첨부해서 보냈습니다. 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책이지, 우리에 대한 책은 아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조명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나의 일상의 지침서로 읽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조명하시는가를 집중하며 읽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위한 책이지, 우리에 대한 책이 아니다.’ 기막힌 촌철살인입니다. 이 글을 읽었을 때 저에게 임했던 소회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신앙이란 것이 무엇일까? “주군이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선언한 것이기에 이후로는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신앙이다.” 여러분의 지금의 신앙적인 레벨로 이것을 이해할지는 정말로 예단할 수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강력하게 선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를 위한 기도는 2순위입니다. 먼저 할 기도는 주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내가 만족해하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느끼는 자는 다시 재고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숭배하는 에고-나르시시즘이라는 종교에 빠졌을 가능성이 농후함을. 방언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속이 뻥 뚫리는 영적 쾌감을 가도 후에 느꼈다면 경성하십시오. 그는 아마도 주술을 외운 것과 동일함을. 예언을 했는데 위로와 권면과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통해 내가 무언가 영적 권위를 느끼는 마음이 들었다면 두려워하십시오. 나는 예언의 은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해 넋두리를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새벽예배 시간에 읽은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아멜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울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명령을 보란 듯이 어기고 탈취한 노획물을 감추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세운 것을 후회하시고 그를 폐하시는 선포를 하기 위해 사무엘을 그가 있는 갈멜로 보냅니다. 그런데 허탕이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길갈로 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을 기록한 이 대목에서 신명기 역사가는 후대 독자들에게 사울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졌는지를 알려주는 서늘한 경종의 한 구절을 남겨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상 15:12절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육비에 새겨야 할 지침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가 시작된 자는 무섭게 경종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있기에 말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을 수 있는 가능성, 둘째, 하나님이 나를 지금 떠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 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 김문숙 집사 친정아버지 상을 듣고 대구로 문상차 내려갔습니다. 위로 예배를 마치고 잠간 다과를 나누며 교제하는 시간, 아버님의 위독함을 왜 미리 알리고 중보의 은혜를 나누지 않았느냐는 아내의 말에 김 집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모님, 알리지 않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환우들을 위해 전체적으로 기도하실 때 저는 목사님의 기도가 저의 아버지를 위한 기도도 승화될 것을 믿었습니다. 소천의 복을 달라는 기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해달라는 담임목사님의 기도가 아버지의 투병 생활을 모르고 있는 목사님이지만 난 그 기도가 우리 아버지에게도 적용되는 기도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버님은 주님을 영접하고 주무시는 것처럼 떠나셨습니다.” 김 집사의 이 말을 듣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한 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사역의 일선에서 나름 움츠려 있었던 김문숙 집사의 영적 장점이 바로 이것이었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긍정의 모드로 읽으려는 집중력, 바로 이게 김 집사의 신앙적 장점이었어.”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묻겠습니다. 은사를 비롯한 여러분의 일체의 신앙적 기준점이 ‘나’입니까? 아니면 ‘주님’이십니까? 내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이 인도하시고 있다는 신앙의 기준점이 지금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에서 그래서 이렇게 역설했는데 가슴을 때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믿음이란 교리나 신조에 대한 승인이나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철저한 신뢰이고 사랑이다. 삶을 그 분께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이다.”(pp,46-47) 모쪼록 나는 우리 세인지기들이 은사를 비롯한 일체의 신앙적 행위들을 나를 만족하게 올바르지 않은 바로미터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가늠 질하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와 공동체를 올바르게 세워가게 하는 진정한 도구요 바로미터로 삼는 승리하는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 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