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6번째 강해) 제목: 왜 사랑이 제일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3:13 서론) 미국 크리스천 프리랜서 작가인 켄 가이어의 대표작인 ‘영혼의 창’을 보면 이런 글이 담겨 있습니다.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주신 말씀을 꽤 정확하게 번역한 말이다. ‘저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했던 강도의 반응과 그리 멀지 않은 번역이다. 그는 그 짧은 찰나 동안, 어쩌면 평생 처음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사랑한 분이 누구인지를 기억했다.” (p,211) 이렇게 말한 켄 가이어는 그래서 이렇게 다시 부연하였습니다. “‘사랑해요, 나도 너를 사랑한다.’는 말에 복음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p,210) 우리는 지난 8주 동안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을 연구하며 은혜를 나누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을 마지막으로 13장 강해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겐 가이어의 글을 만났을 때 저는 그의 말에 대해 대단히 엄청난 성경의 메시지를 기막힌 필채로 표현했다고 생각하며 동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잃은 한 강도가 말한 고백을 사랑의 단어로 해석한 이 면만 보고 그렇게 동의했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구약 성경 39권과 신약성경 27권의 주제는 그 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His love story 이기에 우리는 역사를 History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행하신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정말로 아름답고 위대한 선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양인들이 높은 가치로 인정하는 명심보감 같은 보석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론) 본문을 암송해 보십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구절이 아름다운 말씀인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리스도인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조금은 불편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던져야 하는 질문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단어의 순위 문제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근을 할 때 사실은 신앙인으로 제일 먼저 우선순위로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믿음’ 이라는 단어에 더 많은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믿음보다 더 중요한 PRIORITY가 있으면 그것은 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하나 이런 관점으로 접근해 보면 ‘소망’도 결코 뒤쳐져서 안 되는 개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세적, 종말론적인 기대감이 없는 종교가 무슨 종교이겠습니까? 신앙인들에게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만드는 귀한 요소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제치고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그렇다면 바울이 사랑이라는 단어에 천착하며 사랑을 우선으로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들이 사랑 장을 마무리하면서 찾아내야 하는 교훈입니다. 1) ‘믿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공부하고 있으니까 고린도전서 안에 있는 성경적 내증으로 해석해 보기를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본인이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서 굳게 지키며 전하고 있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언합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 ②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 바울의 이 선언은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의 케리그마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언급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전 이해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사사로운 죽음이 아니었다는 선포였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사사로운 부활이 아니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성경대로’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인 케리그마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예표들은 너무 많아 넘쳐난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세기 3:15) 창세기 3:15절을 필두로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이후에 이루어지는 부활의 상징적 메시지는 역사의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출애굽의 역사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의 거대한 그림자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제사의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실 대속적인 죽음의 모델이었습니다.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는 수난 받는 종의 메시지를 비롯한 수많은 상징의 신탁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주목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믿고 있는 믿음의 본질은 성경의 약속이라는 절대적인 실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믿고 따르고 고백하는 일체의 것들이 믿음의 내용이라는 점은 너무나도 선명합니다. 바로 이 고찰을 통해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첫째 개념인 ‘믿음’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가능해집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은 신앙인들이 동의한 과거 시제의 산물을 토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하며 생명을 걸었던 성경에 기록된 과거적인 실체들입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내용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하늘에 오르사/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성령을 믿사오며/거룩한 공회와/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몸이 다시 사는 것과/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이 고백문 중에 2/3의 해당되는 고백의 내용이 과거적인 사건들이라는 점을 아십니까? 천지를 만드신 것, 성령으로 잉태된 것,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것,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 하늘에 오르신 것,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과거적 사건들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꼭 기억하십시다. 믿음은 과거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던 구속사적인 케리그마를 믿는 것임을 말입니다. 2) ‘소망’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소망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번역된 소망의 원어가 ‘엘피스’입니다. 이 단어는 좋은 기대를 걸 때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나쁜 기대감이 아니라 좋은 기대를 걸 때 쓰는 단어입니다. 저 또한 원어적인 의미에 동의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본문으로 살폈던 1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구절이 주는 희망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은 우리들의 지식, 지혜를 가지고는 도무지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의 일들이 있습니다. 마치 그것들을 이해하고자 하면 구리거울을 보는 것 같은 희미함이 있어 유감스러운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지금은 그렇지만 이 답답함, 이 이해하지 못함, 이 애석함, 이 갑갑함은 한시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언합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믿음으로의 접근이 무엇입니까? 엘피스 즉 소망입니다. 베드로는 AD 64 년경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네로의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사자들의 밥이 되는 참담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 하루를 자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공포의 시절에 베드로는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 안에 있던 형제와 자매들을 향하여 이렇게 편지를 남겼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가 무엇을 강조하였습니까? 우리가 지금과 같은 공포 속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이 좌절하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결코 썩지 않을 것이며, 쇠하지 않을 것이고 분명히 하늘에 간직되어 있는 것인 산 소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를 영어성경 NLT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Now we live with great expectation.” 무슨 말입니까? “위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게 하셨다.” 위대한 기대감이라고 말한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실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앞에서 설명한 사도신경의 메시지로 말하면 바로 이것일 것이 분명합니다. 주께서 심판의 주로 오실 것, 그 나라에서 서로 교통하게 될 것, 우리가 지은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실 것, 우리들의 몸이 부활체로 완전하게 다시 살게 될 것, 그리고 주님과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두 번째로 말한 소망의 신학적 이해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망은 미래적 사건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완전히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케리그마의 완성이라는 그림자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미래에 완벽히 이루실 구원에 대한 소망임을. 3) ‘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자기를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신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차례에 걸쳐서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래되어서 그 출처를 알지 못해 밝히지는 못하겠지만 제가 읽은 글에서 이렇게 해석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베드로야, 너는 어제 나를 사랑했니? 를 물으신 것이고, 두 번째 물음은 베드로야, 너는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있니? 를 물으신 것이며, 세 번째 물음은 베드로야, 너를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겠니? 를 물으신 것이다.” 이 글을 동의하면서 저는 설교자로로 개인적인 적용을 조금은 색다르게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어제 주님을 사랑한 것이 믿음의 기초가 된 것이고, 내일도 주님을 사랑할 것을 고백하는 것이 소망의 기초이며,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의 사랑의 기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은혜를 받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현재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실체라는 교훈 말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뛰어 넘고, 미래를 뛰어넘어 ‘지금 바로 여기’ (now and here)에서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과의 관계 맺기를 현재적으로 믿고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주님과 현재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 즉 사랑을 바울은 가장 감격적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그는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 제목의 답을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을 제치고 사랑이 제일 중요한 이유는 사랑이 바로 내가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재의 삶의 정황에서 주님과 전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기본적 태도입니다. 소망은 성도들이 오늘을 이기는 또 하나의 무기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이 두 가지 즉 믿음과 소망을 유지하게 만드는 지금의 영적 무기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숨 쉬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 바울의 고백은 내 맥박을 고동치게 하는 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방송작가로 유명한 송정림 작가가 쓴 ‘사랑하는 이의 부탁’을 보면 ‘양파 파는 노인’이라는 제하의 글을 소개하고 있는 데 참 감동이 되기에 소개합니다.(pp,62-63) 멕시코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 앞에는 양파 스무 줄이 걸려 있었습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10센트입니다.” 포타라모는 말했다. “두 줄에는 얼마입니까?” “20센트입니다.” “세 줄에는 요?” “30센트입니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습니다. “별로 깎아 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 어떻습니까?” “안된다고 인디언 노인이 말했습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마입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스무 줄 전부는 팔 수 없소.” 인디언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미국인이 재차 물었습니다. 그때 인디언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양파를 팔러 나온 것이 아니라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인디언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페드로와 루이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를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미투 운동이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 땅에 성을 폭력으로 짓누르는 악마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가해자의 가족들이 당해야 하는 또 다른 폭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런 비극의 쳇바퀴가 돌고 도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닮아가는 이타적 사랑의 상실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으로 도배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페드로와 루이스가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작물 얘기를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를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사랑하는 내 삶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노인 포타라모의 촌철살인이 단지 노인의 삶의 철학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철학이자 신앙의 행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 50회 국가 조찬기도회가 일산에 있는 킨텍스에서 있었습니다. 국가 조찬기도회가 끝나고 후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의미심장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후담의 글 중에 가장 비수 같이 저의 심장을 꽂은 한 구절을 인터넷 뉴스에서 찾았습니다. “문재인 목사의 설교와 소강석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국가 조찬기도회의 설교자는 새에덴교회의 담임목사인 소강석 목사였고 전례에 따라 대통령은 축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와 축사를 열고 보니 축사는 설교 같은 축사였고, 설교는 정치적인 목소리의 연설이었다는 기막힌 메타포를 여론이 발표한 것입니다. 작은 자를 위한 배려, 약한 여성들을 위한 포괄적인 돌봄과 포용 그리고 사랑을 말한 대통령의 축사는 희년을 맞이한 조찬 기도회의 적절한 설교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는 명 설교였고, 반면 설교자로 선 소 목사의 설교는 교회를 물리력이나 공권력을 건드리지 말라는 에두른 비난적 공격이었다는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이 후담을 읽고 어쩔 수 없이 문재인 대통령의 축사 전문을 꼼꼼히 찾아 읽었습니다. 그의 축사 메시지 중의 일부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130여 년 전,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고 대한민국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부당한 침략과 지배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찾고 불평등과 억압으로부터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 숭고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한국 교회는 참으로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꺼지지 않는 촛불이 되어, 공의를 선포하고 실천했습니다. 지치고 힘든 국민들을 생명과 사랑으로 품어주었습니다. (중략) 오늘날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봉사가 필요한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달려갈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이탈주민 지원에서도 한국 교회의 역할과 기여가 큽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해 온 성도 여러분의 발자취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읽다가 이런 소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런가? 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이 연설문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한국교회여, 정신 차리고 이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라.” 사랑하기란 현재적으로 내가 주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증언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아니 정답 중의 정답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기도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엔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닮은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 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