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부분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맙시다.2024-02-26 15:45
작성자 Level 10

3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5번째 강해)

 

제목부분적인 것에 목숨 걸지 맙시다.

본문고린도전서 13:8-12

 

서론)

 

작년 말사랑했던 장모님을 하나님 나라로 모셨습니다.

40대에 남편과 사별한 뒤에 평생 동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장모님이셨기에 자식 된 저희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게 소천하신 장모님께 제대로 효도를 한 번도 못해 못내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죄송하고 또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수없이 많은 장례식을 인도한 목사입니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식들이 경험해야 하는 부모님들의 장례 일정 중에 가장 힘든 일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입관과 화장 예식이라고 말할 것 같습니다.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장모님을 모시는 입관 때에는 정말로 힘이 들었던 소회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장모님을 입관하는 날장례 지도사가 장모님의 입관에 따른 일체의 절차를 정말로 최선을 다해 주었습니다.

고인에 대한 최대의 예우를 보여주어 자식 된 입장에서 나름 감사했습니다.

헌데 당일 날 관에 덮을 명정을 쓰는 글귀를 보니 고 김상임 권사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 그래도 격식은 따라야 할 것 같아 장례 지도사에게 고 김상임 권사 지구(之柩)’라고 쓰기를 원해 그렇게 정정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왠지 모르게 난색을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유족들이 원하는 것을 조금의 수고를 들이면 해 줄 수 있는데 그걸 마다하는 상조회의 소위가 불쾌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강하게 밀어 붙이면 제가 원하는 대로 명정을 정정해서 충분히 관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쾌한 마음을 가진 것은 1분도 채 되지 않았고 제가 마음을 접었습니다.

이유는 제 논리가 타당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모님의 관을 덮은 명정은 그 다음 날이면 재로 바뀔 하찮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채 하루도 되지 않아 재로 바뀔 것에 목숨을 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주 오래 전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구독한 책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리처드 컬슨이 쓴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입니다.

책에 수록된 프롤로그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1년 전쯤 한 외국 출판사가 내게 연락을 해서는 내가 쓴 당신은 다시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책의 번역판에 베스트셀러 작가인 웨인 다이어 박사의 서명을 실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왔다나는 이전에 다이어 박사가 내 책에 서명을 해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또 다시 그렇게 해 줄지는 모르겠다는 말을 출판사측에 전했다그러나 시도는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때론 출판계의 일이라는 것이 그렇듯그에게 서명을 요청하고 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아무 답변을 듣지 못했다얼마 후 나는 다이어 박사가 아주 바쁘거나 본인이 서명을 넣는 것을 꺼린다는 결론을 내렸다결국 나는 그의 결정을 존중하며책의 판매 촉진을 위해 그의 이름을 이용할 수 없을 거라고 그 출판사에 알렸다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 건은 끝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 책의 번역서 한 권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책표지 오른쪽에 다이어 박사가 다른 책에 써주었던 서명이 실려 있었다분명히 내가 다이어 박사의 서명을 넣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는데 불구하고 그 출판사가 이전의 서명을 허락 없이 가져다가 새 책에 넣은 것이었다나는 무척 화가 났고이 일로 빚어질 결과와 그 영향에 대하여 걱정이 되었다나는 출판사 대리인에게 연락하여 이 사실을 알렸고그는 그 출판사에게 즉시 책들을 회수하라고 요구했다그러는 가운데 다이어 박사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 상황 설명을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기로 결심했다편지를 보내고 다이어 박사에게 어떤 회신이 올지 노심초사하며 몇 주를 보낸 후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p,13.)

리처드조화롭게 사는 데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소첫째 사소한 것에 연연해하지 말라둘째 모든 것은 다 사소하다서명은 그냥 놔두시오친애하는 웨인.”(p,14.)

 

설교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의 예를 든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져야 할 신앙인으로서의 지혜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목록 중에 본질과 비 본질이 있을 때 우리는 마땅히 본질적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총론과 개론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우리는 총론을 선택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무한 것과 유한한 것이 있을 때 마땅히 무한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이 있을 때 당연히 영원한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만에 하나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전체적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분적인 것은 순간적인 것이고유한한 것이며개론적이며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한 사랑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는 논거는 주목할 만한 것은 물론대단히 큰 울림이 됩니다.

본문으로의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본론)

 

우리는 은사에 대한 이야기를 12장에서 나누었습니다.

더불어 12장을 마감하는 마지막 구절에서 앞에서 열거한 16가지의 은사를 소개한 바울은 이 은사들도 중요하지만 더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했음도 살폈습니다.

바울이 이토록 강조했던 사랑의 은사를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조금은 세밀하게 살폈습니다.

바울이 사랑의 은사를 다른 여타 은사들에 비해 더 강조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바로 이 질문의 답을 본문 8-10절이 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 구절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통찰력을 제공해 줍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사랑이라는 은사 이외의 다른 여타 은사들은 부분적인 은사라는 것을 바울이 강조합니다.

반면 사랑이라는 은사는 부분적인 은사가 아니라 영원한 은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갈파를 조금만 더 깊어 들어가 보십시다.

예언은 폐하여질 때가 온다고 했습니다.

방언도 그칠 때가 온다고 바울은 역설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12장을 시작하면서 바울이 의미 부여를 했던 지식의 은사도 반드시 폐하여질 때가 올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편지의 여백 문제로 이 정도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바울은 분명히 사랑을 제외한 본인이 열거한 일체의 은사들도 동일하게 때가 되면 사라지는 은사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어진 본문 구절에서 바울이 갈파한 내용들을 살피다가 깊이 와 닿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부분적이라는 단어입니다.

부분은 전체에 비해 불완전 도식입니다.

부분은 완성체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부분이 완성체인 전체에게 대항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지성이었던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가 말한 대로 내가 아는 지식은 원으로 비유하자면 원 안에 있는 점이라고 했듯이 점이 원을 설명하려고 하거나 비교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교만하고 건방진 일이겠습니까?

마찬가지 공식으로 부분이 전체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울의 토로는 너무나 적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 8-10절을 재음미해 보십시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여기에 기록된 부분적이라는 단어를 바울은 이어지는 11-12절에서 정말로 탁월한 예로 설명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작년인가 싶습니다.

고전도사님이 우리 교회로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로 기억합니다.

아들 태웅이가 원주에서 제천으로 이사를 해서 신백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친구들도 낯설고교과과정도 낯설고담임 선생님도 생소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자리를 잡고 공부하는 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학교에 전학을 온 이후에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별로 시원치 않았습니다.

사석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태웅이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전도사님 가정과 식사를 같이 하는 날태웅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목사님이 태웅이네 집으로 가서 살기로 했다고한 달 동안 태웅이에게 받아쓰기를 하는 선생님으로 목사님이 부임하기로 했다고.

그 말을 하고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태웅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호랑이처럼 보이는 목사가 집에 와서 산다니 이게 지옥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 것입니다.

통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재미있는 것은 오빠는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는데 동생 은비는 아주 시크하게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빠왜 울어그건 거짓말이야!”

저는 그날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태웅이와 같은 심령이 천국의 마음이라는 것둘째앞으로 은비는 큰일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딸로 성장할 것을.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을 제외한 일체의 은사들이 부분적이란 단어로 설명한 실례가 이해가 되십니까?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동시에 깨닫는 것도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바울이 은사 장에서 제시한 16가지의 은사들은 각기 그 때 그때마다 필요한 이해의 폭으로 교회의 질서와 신앙의 유익을 주고자 한 마치 어린아이의 시기에 어린아이들이 이해하는 정도의 도구들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이해와 도구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이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 것처럼 은사도 더 큰 은사를 사모해야 하는 것임을 바울은 11절 하반절에서 역설한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본문 실례를 통하여 사랑이라는 은사와 다른 여타 은사의 차이점을 구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거울은 헬라어 에습트론의 번역입니다.

에습트론은 고린도 지역에서 생산되던 유명한 구리거울입니다.

구리거울은 잘 닦아주어야 얼굴이 보입니다.

그런데도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에습트론’ 은 아무리 잘 닦아도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유리 거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염두 해 두었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렇다면 무엇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는 말입니까?

사랑의 은사가 아닌 여타 은사들로 설명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대한 지식 등등은 희미할 수밖에 없다는 강조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예언의 은사를 하는 자들지식의 은사를 받고 능력을 행하는 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이지 완전할 수 없다는 강조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하게 알게 되는 것하나님을 온전하게 아는 것은 12절에서 말한 그대로 그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은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고 하는 것에 넘어가지 말아야 하며 혹하지 말아야 함을 바울은 힘 있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에 기록된 말씀은 참 은혜가 됩니다.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결국그때가 되어야 주님이 나를 아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는 이 역설은 그래서 은사를 갖고 장난질치지 말라는 경종으로도 들립니다.

그때는 주님을 만나는 그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우리는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을 담아야 하겠습니다.

 

※ 내가 알고 있는 부분적인 앎을 고집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특별히 영적인 은사에 대하여 적용하고 말할 때는 더 더욱 철저해야 합니다.

재 강조하지만 바울은 사랑의 은사 외에는 다 떨어질 것들이라고 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것들은 폐기처분 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유일하게 간직하게 될 은사는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가지고 전부를 다 아는 것처럼 고집하고 주장하려는 자세는 대단히 위험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방언으로만 기도하는 것이 진정성이 있는 기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적인 앎을 전부의 앎이라고 착각하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가 내가 하는 예언만이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내가 무식한 자라는 것을 천명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은사는 최고임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없다고 치부한다면 그는 정말로 교회 공동체에서 사라져 주어야 할 암적인 존재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까지 교회의 유익을 주며성도 공동체를 든든하게 만들기 위해 선물로 주신 한시적이고도 부분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의 한 방편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헌데 이런 일들이 어디 은사에만 국한되겠습니까?

교회 공동체에서나 가지고 있는 일체의 획일적이고도 설익은 지식들도 매일반입니다.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아주 민감하게 경계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공주의입니다.

성공주의라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는 것이지만 곧잘 교회에서 쓰이는 단어이기에 한 예로 든 것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를 나누어 보십시다.

역대상 4:10절을 읽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우리는 십여 년 전에 한국교회에 불어 닥친 야베스 신드롬을 분명히 기억합니다.

지금 읽은 이 구절은 요한삼서 1:2절을 구실삼아 전혀 성서적이지도신학적이지도 않은 복을 말한 삼박자 축복과 더불어 한국교회에 불어 닥친 기복신앙의 구절로 이용된 대표적인 성경 텍스트입니다.

이른바 야베스의 기도의 주류적인 해석은 나의 지역을 넓히시는 복은 곧 물질적인 축복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습니다.

역대상 4:10절에 기록된 지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게불은 문자적인 의미가 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가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라고 기도한 것은 이런 의미의 기도였다는 말입니다.

그 유명한 야베스의 기도가 드려지기 직전의 성경 텍스트인 역대상 4:9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에 기록된 히브리어 야베쯔는 슬픔’ 혹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9절의 기록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이렇게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저는 고통 가운데에서 태어났습니다저는 슬픔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나의 어머니가 이렇게 나를 힘들게 낳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야베스는 본인의 출생 비밀에 담겨 있는 고통을 거울삼아 본인의 삶을 역전시키며 살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뒤에 이어지는 10절의 기도문 때문입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이런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에게 이런 고통이 임해도나에게 이런 슬픔이 임해도 이런 고통과 슬픔에 좌절하지 않고 그 슬픔과 고통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는 은혜의 복을믿음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게 하옵소서!”

왜 이렇게 해석합니까?

야베스의 기도는 물질적인 복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훌륭하게 낼 테니까 더 많은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복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건강의 복만이 진정한 복이니 건강만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성공을 허락하시면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겠다고 흥정하는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기복적인 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야베스의 기도는 내 삶을 주님께 의탁하겠다는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내가 이런 고통 속에 태어난 자이지만 하나님께 내 인생과 삶을 맡기겠사오니 내 신앙의 지경과 지평과 성숙의 정도가 넓어지는 은혜를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야베스의 기도가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복을 쏟아부어주신다는 것으로 둔갑하여 성공주의의 잣대가 되는 기도로 변질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면 성경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은혜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결코 성공주의를 부추기는 구절이 아니라고 가르치면 심정적으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는 적반하장을 경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부분적인 성공에 대한 지식이 전부인 것인 양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바른 교회 아카데미세미나에 주 강사로 오셨던 분 중에 한 명이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우종학 교수입니다.

우 교수는 크리스천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과학적 진화를 인정하는 유신론적인 과학자입니다.

그가 강의 중에 했던 수준 높은 담론을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7일 창조기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그래서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즈음 되었다는 창조과학자들의 주장을 우 교수는 그의 과학적인 메커니즘들을 동원하여 맹공하며 비판했습니다.

설교시간을 통해 그가 주장하는 유신론적인 과학을 설명 드리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유신론적인 과학에 대한 이론들은 오늘 여기서는 차치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교수의 강의를 제가 아주 은혜롭게(?) 들은 이유는 바로 이 대목 때문이었습니다.

7일간의 창조 기사는 과학적 증명을 위해 기록한 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창조의 기사를 과학적인 증명의 데이터로 사용한다면 엄청난 오류들과 허점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창세기 1:11-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들과 나무들이 만들어진 것을 묘사했는데 그 날이 셋째 날이라고 적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19절을 보면 넷째 날의 창조기사가 소개되고 있는 데 낮과 밤계절과 날 그리고 해를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낮과 밤이 없고해와 달과 별이 없는 데 어떻게 채소와 씨가진 열매와 나무들이 자랄 수 있단 말인가?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는 순서이지 않습니까?

우종학 교수의 강의 중에 파안대소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모순에 대하여 설명을 하라고 했더니 창조과학자들 중에 이렇게 답변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루 즈음은 괜찮다.”

그렇다면 성경에 기록된 창조 기사는 모순임으로 허구입니까?

우 교수의 자문에 의한 자담이 저는 참 은혜롭게 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귀를 기울여야 하는 태도라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는 과학적인 데이터를 근거로 창조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 기록된 창조의 기사는 창조의 주권적인 역사는 철저한 하나님의 것임을 강조하는 초자연적인 영역임을 선포하는 글이라는 것이 우 교수의 지론이었습니다.

제가 우 교수의 이론에 나른 동의한 대목은 이것이었습니다.

성경이라는 특별 계시의 영역은 상당수가 해석적 담론의 영역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을 오늘의 설교에 대입하여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영적 지식이나 성경적 지식은 너무나도 불완전하고 얄팍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날마다 배우기에 힘써야 한다는 교훈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욥기 38:4-5절에서 하나님께서 친구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노출되어 주저하고 있는 그리고 한편으로는 암묵적으로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는 욥에게 하셨던 일침이 너무나도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욥에게 하셨던 일침이 이론적인 설명의 담론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론적 설명의 담론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담론입니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에서 이렇게 설파하였는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것처럼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아는 것이 너무 작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p,376.)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사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은사를 제외한 일체의 은사들은 폐기되고 사라지고 떨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부분적인 것의 대명사들인 은사에 목숨을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도리어 사랑만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린도 교회 지체들에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본문 8)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를 드리고 기도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 만 섬기리 온 맘 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