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6)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서론)
설 명절에 아침 식사를 하고 서재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펴서 묵상하는 데 출애굽기 12:36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그날따라 제 눈에 크게 들어온 단어가 ‘은혜를 입히게 하사’였습니다.
이 구절을 잠시 설명하면 이런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10번째의 재앙인 장자의 죽음이 애굽의 전 지역을 강타했을 때를 배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탈출하게 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보너스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장자와 첫 것들이 죽는 비극을 지금 눈으로 보고 현실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을 맛보게 된 이유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때문임을 이미 벌어졌던 9가지의 재앙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빨리 자신들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떠나주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물품들, 아마도 재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며 속히 떠나줄 것을 종용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출애굽기 기자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렇습니다.
저 역시 출애굽기 기자와 생각을 같이 합니다.
기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왜 이 은혜를 주셨습니까?
430년 간 억울하게 종살이했던 것에 대한 보상이었습니까?
그동안 혹사를 당한 것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하나님이 받게 하신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광야로 나아가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해야 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훗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은혜로 내려주신 이 물품들을 하나님의 성막을 지을 때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하시겠다는 복안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실이 어떠했습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지고 나온 물품들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가 아닌 금송아지를 만드는 도구로 변질시키고 되고 마는 볼썽사나움이 연출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 알고 말았습니다.
설 명절 아침에 출근하려 이 말씀을 접했을 때 저에게 강하게 휘몰아친 소회는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변질) 알고 계셨을 텐데 왜 그들에게 이런 보너스를 주셨을까? 라는 소회 말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런 생뚱맞은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냥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보내시지 왜 당신 스스로 속 끓는 일을 자초하셨을까?
하나님이 착각하셨는가? 하나님은 그것에 대하여 센스가 없으셨던 것일까?
이렇게 철없는 생각을 하다가 저에게 휘몰아친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본질의 본질 그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해야 할 것은 마땅히 그 사랑의 본질이신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내용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사한 것은 믿음의 선진인 바울이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정의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계속해서 이 사랑의 정의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본문 7절을 읽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본문에 4가지 동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참는다. ② 믿는다. ③ 바란다. ④ 견딘다.
먼저는 저는 이 4가지의 동사 중에 첫 번째 동사와 네 번째 동사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참으며’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헬라어 동사 ‘스테게이’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지붕을 덮는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덮는다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단어로 연결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성경적 내증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 기록된 노아의 실수와 그의 아들들의 반응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노아가 스스로 경작한 포도원에서 얻는 열매를 통해 만든 포도주를 먹은 뒤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함이 보고 아버지의 벗은 몸을 셈과 야벳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며느리들이 볼까 염려하여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창세기 9:23절은 보고합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에 기록된 하체를 덮었다는 바로 그 의미가 ‘스테게이’의 의미입니다.
오늘 바울이 본문 7절에서 언급한 참는다는 단어 ‘스테게이’ 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분명한 잘못과 허물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까발리지 않고 덮는 것 말입니다.
그러려면 한 가지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참아주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이어서 본문에 4번째로 등장하는 단어를 해석하겠습니다.
‘견디느니라’
이 단어는 두 단어가 결합한 단어입니다.
‘휘포’+‘메네이’의 결합입니다.
‘휘포’ 는 ‘under’ 즉 ‘밑으로’라는 전치사이고, ‘메네이’는 ‘stay’ 즉 ‘머문다.’ 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견딘다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포메네이’ 를 합쳐서 해석하면 ‘밑에 머문다.’는 의미가 됩니다.
밑에 머무는(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적절한 영어단어가 떠오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understand’ 즉 ‘이해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피를 토하고 싶은 일을 당해도 그것을 참아내려면 반드시 그 피해를 입힌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야 가능하다는 교훈 말입니다.
그러니 견딘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모세는 기가 막힌 억울한 일을 40년 동안 수도 없이 당했습니다.
반란, 누명, 비아냥, 살해위협 등등 그가 광야 40년 동안 당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잘못 말했다가는 하나님께서 노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은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이중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성정을 가진 모세라고 왜 분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고, 왜 욱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막중한 부담감과 고통이 모세에게 임했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참고(스테게이), 견뎌냈습니다.(휘포메네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는 동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모세가 이런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이스라엘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해석을 통하여 사랑하기란 무엇인가의 12번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2) 사랑하기란 상대방의 밑에 서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도착하면 우리는 너무나 잘 아는 간음하다가 잡혀 온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기사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헌데 이 기사의 압권이 여러분에게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치라’ 이겠죠.
물론입니다.
기막힌 주님의 정면 돌파의 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사의 압권을 다른 구절에서 찾습니다.
요한복음 8:10-11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여인이 지은 죄는 당시 율법의 예로는 돌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죄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왜 이 여인을 개인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도 보호하셨고 돌보셨습니까?
주님은 이 여인의 삶의 밑에 서보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간음을 하였다면 간음의 현장에는 이 여인 말고 그 죄에 동참한 남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한복음 8장의 현장에는 여인만 끌려왔지 같은 죄를 지은 남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얼마나 억지춘향으로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지를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남성들의 가부장적인 권위주의라는 또 다른 맥락의 폭력에 희생양이 되고 있는 여인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의 죄를 덮기로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죄와 허물을 덮으려면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상황 밑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 그를 이해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허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란 타인의 밑에 서 보는 것입니다.
농촌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선교비로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월 자급 70,000원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했기에 외부 선교비를 받지 못하면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선교의 물질을 보내주었던 고마웠던 지체들이 있었기에 여러분의 담임목사는 도움을 받아 생활도 했고 공부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선교비를 받는 목사로 살아갈 때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선교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선교하는 교회의 종용이었습니다.
그냥 존재해 주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농촌교회에 사역의 변화를 보고하라는 무언의 압박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다음 회계연도에 선교비를 중단하겠다는 으름장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죽기보다 하기 싫은 거짓된 선교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고했던 일은 목회 사역의 수치요, 고통이었습니다.
수 년 후 조직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신분이 선교하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제일 먼저 행했던 정책이 피선교지 선교보고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선교위원회의 반대도 있었지만 밀고 나갔습니다.
왜요?
피선교지 교회 목사로 3년을 그 고통의 밑에 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밑에 서 보지 않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밑에 서 보면 상대방의 무례함을 이해하게 됩니다.
밑에 서 보면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란 밑에 서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하고 그들의 허물을 덮는 사랑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란 상대방의 밑에 서 보는 것입니다.
13) 사랑하기란 믿어주는 것입니다.
본문 7절 중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모든 것을 믿으며”
사랑하기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 ‘피스튜오’는 원래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가만히 숙고해 보면 이 말은 정말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먼저 12:6-7절입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예수님을 죽이는데 1등 공신이었던 헤롯 대왕의 바로 그 손자인 아그립바 1세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를 살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더불어 기독교인들의 수장 격인 베드로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갇힌 감옥은 정치적인 흉악범을 가두는 지하 감옥이었습니다.
더불어 4인이 지키는 중죄인의 모습으로 수감된 상태임을 사도행전 12:4절이 증언합니다.
유월절 절기였기에 베드로의 형 집행이 유예되었지만 날이 밝으면 그도 야고보처럼 될 가능성이 있는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 속에 있었던 베드로의 의외의 상태를 사도행전 기자인 누가는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워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뒤의 구절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자고 있는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해 온 천사의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사도행전 12:7절에 기록된 ‘쳐’라는 헬라어 ‘파탓소’는 ‘치명적으로 세게 때리는 것’ 즉 강타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추론할 때 천사가 베드로는 깨운 것은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을 전제한다면 베드로는 아마도 거의 실신 직전의 깊은 잠에 빠졌다는 해석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날이 밝으면 동역자 야고보처럼 죽임이 기다기고 있음을 베드로가 모를 리 없건만 그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상태에 어떤 해석이 가능하겠습니까?
“자포자기의 상태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도행전 3장 이후 11장까지 보여준 영적 행동들을 대입해 볼 때 그런 해석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한 가지 해석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베드로의 영적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이런 상황을 염두 해 볼 수 있습니다.
죽든지 살든지 이제는 그것이 별로 베드로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해석 말입니다.
베드로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조반을 잡수신 뒤에 주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던 그 말씀을 유념하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성령 경험 이후 사역을 감당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8절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그의 전 인생을 주군께 맡겼다는 것 말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오늘 설교의 테마로 바꾸어 적용한다면 이런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진짜로 믿어주기로 했다.”
결코 불손한 표현이 아닙니다.
믿어준다는 것은 맡긴다는 강력한 대체 언어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믿어주기로 했다는 확신의 단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별로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주님이 자기에게 어떠한 선택을 하셔도 그것은 주님이 인도하시는 주님의 선택임을 100% 수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면 믿는 것이고, 믿는다면 반드시 그 믿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공지영 작가가 쓴 ‘수도원 기행 2’를 보면 가톨릭 신자로 의미 있게 신앙의 여정으로 들어선 작가의 믿음을 보게 해주는 아름다운 고백이 나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믿는다는 것일까? 주 예수가 그리스도, 그러니까 나의 주인임을 믿는다고? 그건 믿는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내 생애 전체를 통틀어 2%도 되지 않는다. 나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그것을 깨닫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분은 나의 주인이 맞다. 그러면 그게 다일까? 한참 후에 나는 깨달았다.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 설사 내 눈앞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나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사랑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 싶게 나쁜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산 같은 고통이 닥쳐온다 해도, 설사 내가 어이없이 죽는다고 해도, 내 식구가 내 자식이 죽는다고 해도,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여 벗을 삼고 싶어 하심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pp,65-66)
그렇습니다.
사랑하기란 믿어주는 것입니다.
유익이 되든지, 유익이 되지 않든지 주군을 믿는 것처럼 사랑하기란 대상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차준희 교수 집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한 친구가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떠날 때 친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그냥 가난한 유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독일에서 공부를 해서 학위를 반드시 딸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독일로 떠나는 공항에서 그의 아내가 이렇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보, 이젠 나는 당신만 믿어!”
순간 그 부담감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음을 고백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담으로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때 아내의 그 한 마디가 나를 옹골차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은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면 사랑이라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대입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어주는 것임을 잊지 않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14) 사랑하기란 희망을 주는 마음입니다.
본문 중반절입니다.
“모든 것을 바라며”
여기에 기록된 ‘바라며’의 번역인 헬라어 ‘엘피조’는 ‘희망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도식이 가능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또한 그에게 희망이 있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 모두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고, 또 누군가에게 희망을 선포하는 것을 전제할 때 가져야 하는 유념입니다.
그것은 앞에 나온 ‘모든 것’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희망은 조건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희망하는 것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기란 쉽지 않은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멍에이기도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고 희망을 갖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못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문제는 내가 도무지 바라보아도 가능성이 안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그 안 보이는 자에게 뭔가를 희망한다는 것은 차라리 절망적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사랑은 그 절망적인 것에게도 희망을 품는 것이라고.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아주 의미 있는 예수님 사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든 환자 한 명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께 자기의 몸을 보이며 이렇게 절규합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면 나를 깨끗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환자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13절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여기에 번역된 ‘내가 원하노니’를 영어성경 대부분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I am willing.”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의지가 있다.”, “내 뜻이 그렇다.”입니다.
나병은 당시에 절망적인 질병이었습니다.
희망이 단절된 저주 받은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내가 원한다. 내가 의지가 있다. 내 의지다.”
저는 주님의 이 선언이 단지 나병환자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 마음은 자와 여러분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고백이라고 믿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모든 것에는 제가 사랑하는 조국교회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 바른교회 아카데미 세미나를 참석했습니다.
마침 프로그램 중에 제주 4.3 평화 공원 탐방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제주도를 가면 들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세미나 참석자들과 함께 4.3 사건 70주년을 맞이해 함께 방문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헌데 이번에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의 아픔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인지 그곳은 유난히 까마귀들이 많이 서식하는 장소로 유명한데 그 날 까마귀 한 마리가 로드 킬을 당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까마귀의 사체가 도로 한 복판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순간 죽은 까마귀의 시체로 다른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분 전에 같이 날개 치며 움직이던 동료 까마귀의 사체를 몰려든 까마귀들이 뜯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세상이 바라보는 교회의 본질적 모습은 어떨까? 에 대한 오버랩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조국교회는 널브러져 있는 까마귀 같은 모습으로 그로기 상태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까마귀 떼 같은 일체의 세속적 공격과 교회가 내부적으로 당하고 있는 자정 능력의 상실이라는 이중의 공격에 KO 직전입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를 절망스럽게 여기게 하는 빈사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결코 쉽지 않는 조국교회의 회복이라는 테마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으실 것이라는 희망 때문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조국교회를 향한 끈을 놓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조국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조국교회를 사랑합니다.
바울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로마서 9: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사랑하기란 무엇인가? 에 대하여 함께 나누어 보았습니다.
14가지로 나누어 본 사랑하기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쪼록 나는 우리 공동체가 이 사랑 행하기 보여주는 살아 있는 실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일어섭니다.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향한 내 비웃음
나를 향해 돌아오고
어리석고 미련한 그 백성들
나의 모습과 같네
찢기고 상한 나의 영혼을
끝까지 사랑한 아버지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요
내 생명 다해 주 노래하리라
내 생명의 근원되신
나의 삶의 이유 되신
내 모든 것 나의 전부 아버지
나 다시 일어섭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나
믿음 없어 실패한 나
그런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