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사랑은? (5)2024-02-26 15:45
작성자 Level 10

2월 1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3번째 강해)

 

제목사랑은? (5)

본문고린도전서 13:4-7

 

서론)

 

소위 여성들이 여러 가지의 성적 폭력으로 인해 당한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 (me too) 운동이 미국에서 시작되어 지금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남성가부장적인 체계와 제도라는 고리 안에서 억압당해야 했던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냄으로 인해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당당한 여성의 권리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운동이 바로 미투’ 운동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운동을 메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면서 저는 작년에 읽었던 미국 출신이 여성 사회 운동가이자 평론가인 레베카 솔닛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읽은 글이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말라고아니면 아예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다건물 안에 있으라는 말이었다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 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 붙였다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p,111)

레베카 솔닛이 여성들이 불의한 체계 안에서 당하는 일체의 것들에 항거하면서 조금은 더 적극적인 소리를 내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메타포의 글을 읽으면서는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지지를 보냈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것을 금력이나물리력 그리고 공권력으로 인정하라는 것은 목사인 저에게도 결코 용인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2인자가 엄청난 살아 있던 권력에게 주었던 204억의 돈이 대가성이 아니라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상납한 돈이라고 판결함으로서 뇌물 공여자를 풀어주는 작금의 대한민국 사법부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게 되었습니다.

금력에 굴복하여 공평하지 않은 것에 면죄부를 준 치욕적인 역사로 남을 일이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백주에 벌어진 것입니다.

전 정부와는 달리 경쟁은 공정할 것이라고 대통령 취임사에서 분명히 밝힌 이 정부가 1년 만에 대를 위하여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 선수단 중의 일부를 토사구팽 시키는 불의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비난 받아야 마땅한 불공정한 논리의 강제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높은 뜻 숭의 교회에서 분립된 교회 중에 하나가 높은 뜻 정의교회입니다.

얼마 전 이 교회 분립 시 담임을 했던 목사가 다시 교회를 분립해서 개척을 했다는 교계 뉴스가 연일 화두가 되어 저 역시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一喜一悲입니다.

한 가지 면은 기쁜 일이고또 한 가지 면은 유감스러운 슬픈 일이라고.

기쁜 것을 먼저 말씀드린다면 이번에 개척을 감행한 높은 뜻 정의교회는 대단히 건강하고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는 목회자가 높은 뜻 숭의 교회에서 분립된 교회를 이끌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상당한 부흥을 일으킨 모범적인 교회로 평가됩니다.

헌데 이렇게 안정적인 교회를 이끌던 담임목사가 출석 신자 3,000명이 넘어서자 부 교역자가 아닌 본인이 새롭게 분립 개척을 했다는 것은 갖은 불법을 동원하여 아들에게 대를 이어 교회를 물려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보란 듯이 일어나고 있는 기가 막힌 세태에서 대단히 고무적이며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참 기쁜 일이고 귀한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참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쁜 일 뒤에 못내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는 자화상이 똬리를 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슬픈 일입니다.

이번에 분립하여 개척된 교회의 이름을 높은 뜻 덕소 교회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것이 왜 슬픈 담론일까요?

덕소라는 지역은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을 지칭하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당당하게 발표한 이유는 자신감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자신감입니까?

세속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에 인구 70,000명도 안 되는 이곳에 이마트롯데 마트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형 쇼핑몰인 이마트와 롯데마트를 이길 동네 슈퍼마켓이 있습니까?

그것을 물어보는 사람이 바보이지 않겠습니까?

높은 뜻 ○○교회라는 것은 싫든 좋든 대한민국 개신교회를 대표할 만한 유명 브랜드입니다.

이 유명 브랜드를 그대로 가지고 소읍에 들어가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그 방법과 절차가 아무리 신선하고 투명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공정한 게임이 아닙니다.

앞으로 지켜보겠지만 와부읍에 있는 상당수 교회들이 이 대형 고급 브랜드 교회로의 수평이동으로 인해 적지 않은 곤혹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를 대형교회의 담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인정하는 것은 그의 시작이 공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당 사랑의 교회라고 이름을 짓고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개척할 당시 사랑의 교회라는 브랜드는 전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교회의 옥한흠 목사의 후광이 전혀 없었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런 브랜드화 되어 있는 길을 가면 걸 수 있는 꽃길을 걷지 않고 노력한 목회자입니다.

저는 이번에 덕소에 교회를 개척한 목사와 나름 친분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 소속의 같은 멤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그를 만나 교제할 예정입니다.

그의 신학적 건강성교회를 사랑하는 올바른 교회론을 가진 목회자임을 진정성을 갖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번 높은 뜻 덕소 교회라는 이름으로 개척하는 악수(惡手)를 둔 것에 대하여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것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평하지 않거나 정직하지 않은 것은 곧 불의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왜 설교의 서두에 사족이 벌써부터 이렇게 길까라고 지루해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 그 이유에 대한 답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시되는 사랑하기의 10번째, 11번째의 정의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본론)

 

10) 사랑하기란 다른 사람에게 임한 피해를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 구절에서 바울이 동원한 불의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디키아의 번역입니다.

헬라어 명사 아디키아는 원래 법정에서 행해지는 법률적인 단어입니다.

직역한다면 공평하지 않게 재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삼성 부회장에 내려진 재판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 법률적인 용어인 아디키아가 종교적인 영역으로 그 범위를 넓혀 번역하면 그 뜻의 의미는 당연히 영적인 해석으로 외연이 넓어집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디키아는 인간의 마음과 삶의 궤적에서 일어나는 부정직함을 말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선언하고 있는 오늘 본문 6절 전반절의 선포는 대단히 적절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기란 타인이 부정직함과 불의함이라는 매개를 통해 당한 피해를 보고 기뻐하거나 박수치지 않는 행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이 힘이 없어서물질이 없어서배경이 없어서 억울하게 당하는 일체의 일들을 보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임을 바울이 천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사인이자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23장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앞으로 어림잡아 4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아시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내리신 언약 법전의 내용을 기록한 텍스트입니다.

그 중에 오늘 설교와 관련이 있는 출애굽기 23:6-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정의를 굽게 하지 말며 거짓 일을 멀리 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야웨 하나님의 관심은 공의로움이었습니다.

공평하심이었습니다.

편벽됨이 없는 공정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야웨 하나님은 만에 하나 이런 공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판결이나 재판으로 인해 억울한 자가 생겨 그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나에게 호소하면 내가 그의 호소를 들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혹독한 어조로 이 대목을 강조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가 바로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속성이 공의라는 말은 곧 사랑이라는 주님의 속성과 연결됩니다.

공의의 결과는 반드시 사랑을 담보합니다.

공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공정성이 기초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공의는 그러므로 곧 사랑하기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누군가가 불의한 방식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면 공의로운 사람은 반드시 그 결과를 아파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세금을 부과해서 포항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치인과 목회자 중에 그런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습니다.

포항에 지진이 나서 수많은 이웃들이 아픔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하늘이 진노라고 말하기에 앞서 그 아픔을 당한 자들졸지에 살아가야 할 터전을 잃은 그들을 품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기본적인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남이 당한 아픔을 외면하는 자야 말로 불의와 함께 즐거워하는 자이지 않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담임목사의 두 번째 신간이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1-2주 정도 인쇄가 딜레이 되었습니다.

이유는 저작권료 지불 때문입니다.

제 책에 인용된 것들 중에 시와 노래 가사는 책에 인용하여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저작권자에게 상응하는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저작권료 지불의 권이 밀려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출판사의 이야기로는 설 명절 지나고 1-2주 정도면 가능할 것 같다는 전언이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본인이 갖고 모든 내공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시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작사가가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노랫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글들을 상업적인 목적으로 인용하는 데 적절한 사용료를 내는 것은 그들의 노력에 대해 인정하고 보상하겠다는 정직한 행위입니다.

만에 하나 그들의 글을 상응하는 대가 없이 사용한다면 그것은 사용이 아니라 도용이 됩니다.

도용은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일입니다.

상대방에게 공의롭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제된 일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기란 정직한 마음으로 공의롭게 행동함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 표절논문 도용글 인용 시에 출처를 밝히지 않는 행위는 정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정직하고공평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 교회 지체들이 이런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11) 사랑하기란 다른 사람이 올바른 일을 행할 때 박수를 쳐 주는 것입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6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선언한 외침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라는 단어는 헬라어 알레데이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앞에 언급한 아카디아’ 즉 불의라는 단어의 반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언급한 진리라는 이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옳음입니다.

주군이 말씀하신 성서적 밑힘을 근거하는 옳음의 일체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가 516장 1절 가사를 음미해 보십시다.

1절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세계 만민의 참된 길 이 길 따라서 살기를 온 세계에 전하세 만 백성이 나갈 길

그런데 4절 가사는 반전이 있습니다.

고난 길 헤치고 달려온 길 많은 백성을 구한 길 모두 나와서 믿으면 온 세상이 마침내 이 진리에 살겠네

작사가 콜린 스턴은 옥스퍼드 출신의 수재였습니다.

그런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추구하면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일체 세속적 음악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오직 주님을 찬양하는 음악만을 고집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한 가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음악으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그에게 음악적인 재능을 안 세속적인 뮤지션이 상당한 개런티를 보장하며 곡을 쓸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 곡을 만들고 노랫말까지 만들었습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투의 길입니다.

어려움의 연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는 이유는 참된 길이며진리의 길이며 곧 올바른 길이기 때문임을 콜린 스턴은 선포합니다.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유별나게 굴 것 없다고 평가절하 합니다.

아무리 네가 그렇게 잘난 체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초를 뿌립니다.

진리가 밥 먹여 주냐고 비아냥댑니다.

그럴 때마다 흔들리고 요동하는 자아가 있음을 저도 여러분도 부인하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이 구절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는 바로 이 구절을 말입니다.

진리는 함께 기뻐할 만한 가치입니다.

진리는 그 만한 가치입니다.

저는 가끔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주님을 즉각적으로 따라 나선 기사를 읽을 때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낍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가치가 세속적 가치를 뒤집어 업는 감동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2:14절을 읽어드립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이 구절을 보면 부르심과 따름이라는 긴박한 상황에 주변잡기의 여러 내용들을 다 삭제하고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이 불렀더니 알패오의 아들 레위 즉 마태가 곧 따랐다는 방식으로 극적 효과를 노렸습니다.

잘 나가던 부유한 자 레위가 어떻게 단 한 번의 노숙자처럼 보이는 예수의 부르심에 그렇게 즉각적으로 예스했을까는 대단한 흥미를 유발합니다.

그런데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마태의 이름에서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당시 돈을 잘 버는 직업군에 속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 살기 괜찮은 직업이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유대인이면서도 동족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지배국에 돈을 상납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로 부를 유지해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정체성 말입니다.

그는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알패오라는 헬라식 이름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는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유대이인기도 했습니다.

이 두 정체성은 수없이 마태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한 마태였는데 예수께서 그의 정체성을 단 한 방에 정리해 주는 일이 생겼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알패오로 살던 마태는 그 날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레위로 다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한 사람의 삶의 흔적을 조명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기사는 적어도 진리를 포기하고 살았던 자가 다시 진리로 돌아서기로 결심한 위대한 삶의 전기를 보여주는 기사입니다.

이제 본문의 설교 내용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사도 마태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사랑의 삶과는 담을 쌓고 살던 자였습니다.

의도적으로 진리를 배격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부터는 마태는 이제는 허망했던 비 진리의 삶이 아닌 공동체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다잡이 한 것입니다.

저는 마태의 이 결단에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옳은 길로의 진입은 사랑하기로의 진입이기에 마땅히 박수를 받을 만 합니다.

박수를 친다는 것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누가복음 19:8절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박수를 쳐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지는 누가복음 19: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진리로 돌아서는 자와 함께 해 주시면서 박수를 쳐 주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올바른 길로 돌아서는 자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이야 말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결론)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주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를 응원한다는 것이 곧 무엇을 상징하며 대변하는 것입니까?

그를 무한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불의한 삶에 손 놓고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올바른 길이라는 인식이 들면 주님께 의지하여 그 길을 걸어가십시다.

그 길을 갈 때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극치인 박수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길은 고독하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그 길을 주님이 먼저 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함께 걸어요

주의 인도하심 따라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요

주의 사랑 우리 안에 있네

 

우리 서로 섬기며

주의 사랑 나눌 때

모든 사람 다 알게 되리라

우리 주의 가족임을

 

우린 주의 한 가족

주 우릴 하나 되게 했네

주의 사랑 나누며 서로 섬길 때

주의 나라 이뤄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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