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은? (4)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서론)
C.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 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사람의 영적 건강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도에 정비례한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P,16)
저 역시 루이스의 이 갈파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도리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루이스의 말에 대하여 한 가지를 덧붙이며 패러디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적 건강은 타인을 향해 사랑하는 것과 정비례한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읽은 말씀 중에 벼락처럼 온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 1;31절이었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신명기는 모세가 요단 반대편 쪽 동편 광야에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선포한 설교입니다.
신명기에 기록된 그의 설교는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 제시하신 첫 번째의 강령을 재 강조하는 두 번째의 선포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해서 광야 40년의 삶을 반추하며 곱씹는 형태의 설교가 신명기 율법서입니다.
신명기 1:31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서기 직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출애굽 이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이 때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제 1세대 사람과 그 외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2세대 약 200만 명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모세가 설교하고 있는 그대로 정말로 모압 동편 광야에 모여 있었던 이스라엘 2세대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으셔서 여기까지 왔다고 믿었겠는가? 의 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그것은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 2세들은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우리들을 안으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여기까지 질질 끌려왔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모세는 이렇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향하여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전혀 아니올시다! 라고 말 할지 모르지만 모세는 지난 40년이라는 광야 생활이 그의 고백 그대로 하나님이 본인을 늘 안으셨기에 가능했던 기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안아주심이 지금 본인 스스로 요단 동편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였음을 선언하는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의 안아주심에 대하여 별로 느낌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냉정히 말하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지향성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모세는 하나님의 안아주심에 민감했습니다.
감격해 했습니다.
비록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모세였지만 그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40년 동안 체휼하고 느끼고 살았기에 그토록 힘들게 했던 이스라엘을 품고 중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성경 강독 시간에 또 다른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금요일 새벽 예배 시간에 읽은 민수기 9장에 나오는 한 구절을 보다가 그냥 잊고 있었던 은혜가 귀하게 임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한 것이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패역한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모세에게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안 모세의 반응이 바로 민수기 9장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다시 읽는데 감동이 새롭게 임했습니다.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니하였더니’ (신 9:9 하반절)
‘내가 전과 같이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려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니’ (신 9:1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멸하겠다 하셨으므로 내가 여전히 사십 주 사십 야를 여호와 앞에 엎드리고’ (신 9:25)
저는 그 날 읽은 이 구절들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안으신 것처럼 모세도 이스라엘을 안은 사랑 때문이었다.”
결국은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허락하신 주의 말씀들을 소개한 것은 오늘 설교의 주제를 알려주는 은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역시 사랑하기란 어떤 것들인가에 대하여 주어진 말씀들을 통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본문 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8) 사랑하기란 ‘너’와 ‘그’의 허물을 덮는 삶입니다.
바울은 사랑하기의 정의를 ‘성내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곳에 기록된 ‘성내다.’라는 헬라어 단어 ‘파록쉬네타이’는 문자적으로 ‘연장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 연필을 깎아서 심을 날카롭게 한다는 경우이거나, 창을 갈아서 날을 세워 날카롭게 하는 뭐 그런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성낸다는 의미는 문자적으로 남을 찌른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가는 곳에 항상 불화와 싸움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파록쉬네타이’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성내다’ 는 좌충우돌하며 너와 그와 그녀를 찌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문자적인 풀이를 전제하여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선언 그대로 반면교사의 은혜를 이 문장을 통해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대로 적용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찌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란 단어의 8번째 교훈을 역발상의 은혜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기란 ‘너’와 ‘그’의 허물을 덮는 것이라고.
나이가 들면서 목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하여 젊은 날보다 훨씬 더 깊게 생각하고 노력하며 사역하려고 하는 제 자신을 보면서 나름 헛웃음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내 죄에 대하여는 날카롭게 대해야 한다. 그러나 타인의 죄는 할 수 있는 대로 가려주고 덮어주어야 한다.”
물론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특히 타인에 대한 태도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전서 4:8절을 함께 읽어보십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저는 베드로가 말한 이 구절이 진한 진심의 고백으로 다가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베드로가 이 말을 한 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는 AD 63년경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AD 64년에 있었던 네로가 저지른 로마의 대 화재로 인해 누명을 쓰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할 바로 그 때 말입니다.
주지할 것은 베드로도 이 즈음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전서 4:8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이 내용의 진정성을 담보하게 됩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젊은 날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베드로, 좌충우돌하던 베드로,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던 베드로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인생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 체험을 경험한 이후 그가 어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서 살았는지를 또한 독자이자 신앙의 후배들인 저와 여러분은 성격을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의 인생 여정에서 베드로에게 가장 강력한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전인격적인 만남의 기사를 제시하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디베랴에서의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베랴에서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육지로 올라와서 그곳에 있었던 7명의 제자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치신 주님께서 그들과 교제를 하셨습니다.
이윽고 베드로에게 주님이 세 번에 걸쳐 명령하신 내용이 요한에 의해 보고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7)였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세 가지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역시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7)
이 세 질문에 사용하신 사랑하느냐? 는 단어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살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첫 번째, 두 번째 질문 시에 사용하신 사랑하느냐는 단어는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아가파스 메?)
그러나 세 번째 주님이 물으신 사랑하느냐는 단어는 한 단계 낮은 ‘필레오’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필레이스 메?)
왜 주님이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시다가 ‘필레오’의 사랑으로 격을 낮추셨을까요?
오늘 설교의 교훈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허물을 찌르지 않고 덮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약한 심령으로 인해 자행했던 일체의 허물들을 덮겠다는 것이었고, 그를 안으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잠언 기자가 일찍이 천명한 선포는 정답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12)
작가 고도원 씨가 쓴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에 보면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등 뒤에서 너를 끌어안으면 너의 왼쪽과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과 나의 오른쪽이 정확하게 겹쳐진다. 나의 심장은 너의 심장과 같은 자리에서 뛰고, 나의 왼쪽 손은 너의 왼쪽 손을 잡는다. 너는 내 눈을 보고 있지 않지만 내 마음을 읽고 있고, 날 완전히 상대에게 내맡기고 놓아버렸을 때의 평안함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pp,112-113)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거기서 거기다. 특별한 잘 난 사람 없고, 유별나게 못 난 사람도 없다.’
왜 내가 너와 그의 허물을 덮어야 합니까?
너와 그의 그 허물이 곧 나의 허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몸을 포개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러기에 사랑하기란 서로가 필요한 것입니다.
허물이 보이십니까?
그것이 내 허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덮어야 합니다.
불완전한 상대방의 자아가 보입니까?
그것이 곧 나의 자아인 것을 알고 덮어주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이런 생각으로 본인들의 삶을 영위해 나아가기를 기대합니다.
9) 사랑하기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강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여기에 기록된 ‘악한 것’은 헬라어 단어 ‘카콘’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누군가에게 악이라는 약을 주사하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조금 더 심하게 설명한다면 악을 누군가에게 주입시키는 질이 나쁜 행위를 말하는 단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YLT 번역에서 ‘카콘’ 이라는 이 단어를 impute evil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바꾸면 악을 짊어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악한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삼자에게 혹은 타자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악한 일을 하게 하는 행위, 바로 이것이 카콘입니다.
그렇다면 9번째로 바울이 언급한 사랑하기라는 단어의 영적 교훈은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강제적으로 떠맡게 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이 시용하는 단어 중에 ‘폭력’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가 주는 흔쾌하지 않은 기분의 뉘앙스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물리력 때문에, 금력 때문에, 권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기분 나쁨입니다.
돈으로 누군가를 매수하여 상대방이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하는 자는 사랑과는 담 쌓은 사람입니다.
갖고 있는 위치를 이용해서 을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자는 사랑과는 담 쌓은 사람입니다.
악을 행하게 만드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금요일에 청해 짬뽕을 다녀왔습니다.
마침 제가 식사하는 테이블 옆에 일련의 같은 직장을 다니는 동료들이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앉아 있었습니다.
듣기위해 들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들이 하는 말이 옆 테이블이니까 들렸습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런 말이었습니다.
“사장은 ○○○이다.”
출퇴근을 관리하는 데 사장이 직원들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점을 집중적으로 성토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직원들의 출퇴근 관리는 물론, 사무실에서 자리를 뜨고 밖으로 나가는 횟수, 화장실을 다녀오는 횟수까지 안구 인식이라는 컴퓨터 시스템으로 인해 철저히 감시하는 것에 대한 볼멘 소리였습니다.
이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직장 생활이 곧 형무소 생활 같다는 비토였습니다.
듣고 있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사장은 장수할 것 같다. 왜?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둘째, 그렇게 안구 인식 시스템으로 직원들의 근무 태도를 관리한다고 그들의 마음까지 관리할 수 있겠는가? 의 아쉬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차원이 4차원, 5차원의 세계가 되면 정말로 행복한 컴퓨토피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인가?
5G, 6G, 7-8G의 빠른 기가 시스템의 시대가 도래 하면 우리 인간의 세상이 정말로 풍요로워질까?
갑자기 이 말씀이 다시 오버랩이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비상식적인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가장 상식의 선을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며 그 선을 함께 이루어 가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를 우리는 사랑하기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씨알 사상 연구소장인 박재순 박사는 일찍이 이렇게 갈파한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진정한 주체성은 아가페 사랑에 의해 형성된다.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사랑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한다. 사랑만이 삶에 보람과 기쁨을 준다. 사랑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러나 타산적인 사랑이나 조건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환멸을 주고 갈증을 일으킨다.”(예수 운동과 밥상 공동체, p,49)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하면서 많은 지인들에게 듣는 말은 칭찬의 말이 많습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의 메시지에 이런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지 몰랐는데 그것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생각할 思와 헤아릴 量인 사량에서 파생되었다는 갈파는 참 신선했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눈물로 나고, 또 갑자기 찔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는 전언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언들을 듣다가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은혜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토록 말씀에 천착하는 것인가?
그것뿐이면 어떻게 하지.
그러다가 저야 말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오늘 듣는 이 설교를 감동의 메시지로 듣고 만족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강덕 목사가 지금 시리즈로 전하고 있는 말씀 선포의 목적은 사랑행하기입니다.
직접 사랑의 현장으로 그렇게 사랑하기입니다.
김기석 목사께서 저의 졸저를 격려해 주시기 위해서 추천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글의 한 부분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욕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옛사람은 ‘인간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핵심을 꼭 붙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핵심을 붙들기 위해서는 늘 인식에의 목마름을 품고 살아야 한다. 시대정신을 분별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 위태롭게 허둥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삶의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추천사 중에서)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향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치열하게 나누고 있는 사랑장 강해의 목적은 은혜 받기가 아니라 사랑하기임을.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슬퍼하느냐
왜 걱정하느냐
무얼 두려워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큰 어려움에도 큰 아픔 있어도
이젠 아무 걱정하지마
내가 너를 붙들어주리
내가 너와 항상 함께함이라
내가 너를 지키리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실망치 말고 나를 보아라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