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사랑은? (3)2024-02-26 15:44
작성자 Level 10

2월 4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1번째 강해)

 

제목사랑은? (3)

본문고린도전서 13:4-7

 

서론)

 

시인 정호승 작가가 쓴 산문집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습니다.’를 보면 김수환 추기경께서 살아 있을 때 자주했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오는데 70년이 걸렸다.”(p,42)

같은 책에 나오는 글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푸르메 재단 상임이사인 백경학 씨의 이야기입니다.

백 이사는 장애우 아이들 10명을 데리고 백두산 등정을 앞둔 시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린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게 중요해그게 우리가 백두산을 찾은 까닭이야많은 사람들이 혼자 먼저 올라가려고 하니까 다들 살기가 힘든 거야.”(p,24)

저는 세상을 정의할 때는 신 사사시대를 방불(彷佛하는 신 랜덤의 시대라고 정의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신 사사시대를 살면서도 그래도 이 정도로라도 선방하는 이유는 바로 김수환 추기경백경학 씨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을 소개했지만 이들의 이런 정신과 마음가짐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완벽한 추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그 기저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경학 이사도 가톨릭 신자이고 보니 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마치신 주님께서 율법 교사들에게 날리신 직격탄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이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전하셨던 메시지는 사랑하라’ 라는 테마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2주 걸쳐서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기독교적인 의미로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자세히 살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란 사랑은 오래 참으며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온유한 마음을 갖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동시에 지난주일 설교를 통해서는 사랑은 자신을 뽐내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진심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상대를 자기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 것임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4절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정의와 5절에서 언급된 정의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렇습니다.

 

5) 사랑하기란 교만하지 않기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교만하다는 헬라어 프시오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를 적절하게 묘사한 설명이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번쩍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보았던 솜사탕입니다.

지금이야 먹거리가 많아 그리고 단 것을 먹는 것이 몸에 치명적인 해를 준다는 것을 알기에 기피하는 주전부리이지만 과거에는 이것은 참 괜찮은 군것질 거리였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 설탕가루를 기계에 부으면 마치 솜사탕 같은 모양으로 부풀러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가루가 큼지막한 솜털 같은 모양으로 커지는 것은 동심의 심정으로 보면 정말 경이롭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탐스럽기까지 했던 솜사탕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주 작고 보잘 것이 없는 설탕가루가 솜사탕의 본질입니다.

다만 설탕의 화학적인 성분을 기계적인 매커니즘을 통해 극대화하여 상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부풀린 것이 솜사탕입니다.

저는 교만하다라고 번역된 본문 원어의 문자적인 원래의 의미를 솜사탕이 너무나 적절하게 표현하고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상대적 부풀리기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왜 상대에게 본질을 숨기고 부풀려 포장합니까?

아주 쉽고 단순하게 답을 말씀드린다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본인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 자신이 있다면 옆에서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도 괘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질은 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두 번째의 돌 판을 하나님께로 수여 받고 내려올 때의 극적 상황을 출애굽기 기자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34:29-35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받는 감동이 있습니다.

자세히 출애굽기에 기록된 이 말씀을 이해해 보십시다.

이런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전할 때는 본인의 얼굴에 비치는 빛에 상관이 없이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전할 때가 아닌 모세 개인으로 백성들과 만날 때는 수건으로 자기를 가렸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반응을 모세가 보였을까요?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 공동체에게서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 그 이상의 여론몰이에 성공했습니다.

모세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만든 대중적인 여론몰이 즉 포플리즘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붐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모세는 본인의 대중적인 인기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권위하나님의 자리를 마음만 먹으면 꿰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거기에다 그의 얼굴에서는 마치 하나님과 같은 광채까지 비치기까지 합니다.

이런 호기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

사람들이 자기를 추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백성 공동체가 자기를 주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모세는 하나님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교만한 자로 굳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또 그래야 모세는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중보자로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전제는 내 스스로가 교만하지 않을 때라는 분명한 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풀러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리처드 마우어 박사는 무례한 기독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독교인들이 가져야 통찰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그 은혜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려면 먼저 승리주의 정신을 버려야 합니다우리가 고대하는 그 승리는 우리 것이 아니고 바로 그 어린 양의 승리이기 때문입니다그러므로 승리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겸손이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것을 바라보며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피조물에게 가장 어울리는 태도입니다.”(p,215)

나는 우리 교우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6) 사랑하기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5절 전반절을 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여기에 무례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케모네오는 문자적으로 격에 맞지 않은 일을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격에 맞지 않는 것을 요구하는 자들은 대체적으로 버릇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현대인의 성경 번역은 아스케모네오를 버릇없이 행동하다라고 번역했는데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전에도 한 번 설교를 통해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주군이신 예수님조차도 당신의 제자들 앞에서는 반드시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그러나 세족식을 마치신 주님께서 만찬을 집례하실 때 당신의 옷을 다시 갖추어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3:12절입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베드로 역시 디베랴 바닷가로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갈릴리 지역의 습한 더위로 인해 고기를 잡을 때 윗옷을 벗고 일을 했기에 아무리 급해도 예의를 갖추기 위해 벗고 있던 옷을 다시 입고 주님이 계신 쪽의 갈릴리 호수로 뛰어내렸음을 요한이 보고합니다.

요한복음 21:7절을 읽어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격에 맞지 않는 것이 무례하다는 헬라적인 사고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이 단어를 생각하다가 갑자가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왜 합니까?

공부한 사람은 피치 못해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들의 불편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라고 공부하게 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입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왜 그렇게 운이 좋았을까?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웃을 위해 함께 돕고 살라고 돈을 버는 행운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분배를 이웃을 향해 나누는 것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본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물질적인 여유국가적인 권력을 이용하여 그것을 갑 질의 근거요빌미로 삼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 일을 행하는 자의 무례함을 보여주는 극치인 것입니다.

또 하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끔 당하는 황당함은 친숙함이라는 이유로 어떤 공동체에서 만난 연배가 한참 아래인 후배들이 말을 놓을 때입니다.

저는 지금도 운동하는 탁구장에서 30대 동아리 회원들에게 극존칭을 씁니다.

여러 차례 그들이 저에게 말을 놓을 것을 허용해 주었지만 그들 누구에게도 존칭을 빼놓지 않습니다.

경어를 반드시 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득이나 목사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기는 세상의 기상도에서 그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가볍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랑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인격 그대로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천박하고 가볍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직전 교회 담임목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터넷을 우연히 보다가 그 선배의 장례식을 영상으로 올려놓은 것을 발견하고 애석한 마음으로 시청했습니다.

그날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한 목회자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헌데 영상을 보다가 경악할 만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장례식에 설교를 맡은 설교자가 입은 옷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이 장례식을 인도하며 설교를 하기 위해 입고 나온 옷이 소위 말하는 박사 가운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함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목사에게 주어진 말씀 선포의 권위로 별세한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사의 주관자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 장례식장에서의 목사의 태도입니다.

목사가 왜 검은 색 로브를 입습니까?

말씀을 전할 때 나는 죽고 예수만 살아계시다는 것을 전하는 상징 때문입니다.

하물며 장례식 설교는 나도 이렇게 죽음이라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겸손하게 순종하겠다고 머리 숙임이어야 하는데 그 자리에 박사 가운을 입고 나온 이 어처구니없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때문에 또 그 무례함 때문에 정말로 속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강단에서 박사 학위 가운을 입고 나와 설교를 하는 것도 무식함을 드러내는 일인데 하물며 장례식장에 박사 가운을 입은 그 소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에 아연실색했습니다.

저는 지난 설교에서 사랑은 배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배려는 무례하지 않음을 전제함을 오늘 설교를 통해 다시 한 번 강력하게 선포합니다.

사랑하기란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것임을 명심하고 무례히 행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7) 사랑하기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임을 선언하였습니다.

자기의 유익이라고 본문 5절에서는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유익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라는 표현의 대명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번역된 본문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 것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의 것이라는 표현 속에 담보되어 있는 것은 상당히 광범위합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사물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것이라는 대상은 상당히 포괄적일 수밖에 없기에 저는 이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일체의 이기성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란 일체의 이기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감동적인 글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지난여름이었습니다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로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 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어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하셨습니다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 주셨습니다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의 행동을 넌지시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순간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왜 그리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을 안 느끼게 조심다가와 성냥갑만 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일순 간나는 참고 있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 냈습니다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눈물은 왜 짠가? (pp,50-51)

강화도 시인으로 불리는 함민복 시인이 쓴 눈물은 왜 짠가?’에 나오는 글입니다.

2014년에 후배 목사 선물로 준 이 책을 읽으며 이 글을 만났을 때 저의 어머님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서 투병 생활을 하고 계실 때였기에 어머님께서 젊어서 자식들을 위해 당신의 인생을 희생하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눈물로 범벅이게 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유대인의 속담에 있는 말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

미국 워싱톤 사귐의 교회를 시무하는 김영봉 목사가 쓴 엄마가 희망입니다.’를 보면 자서전적인 그의 글이 기록되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포기하고 허공만 보고 있을 때어머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셨습니다자식들이 돈이 필요하다면 없는 살림에도 어떻게든 만들어내셨고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어떻게든 먹을 것을 만들어냈습니다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이고무로부터 유를 창조해 내는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인데우리 어머니들은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p,67)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가장 근접한 하나님의 사랑을 대입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과 사람의 사랑 중에 가장 하나님 사랑을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의 사랑이 왜 하나님의 사랑에 가장 근접하게 매치됩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자식에게 향할 때 당신의 이기성은 완전히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위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주군이신 예수를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사랑입니다.

왜 이 사랑을 가장 위대한 사랑이라고 제가 증언하고 있습니까?

적어도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에게 보내시고 결정하셨을 때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당신만의 고집당신만의 권위말 표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당신만의 이기성을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기주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이라고.

크로스웨이 7기가 셋째 주에 졸업식을 하게 됩니다.

크로스웨이 30과의 전 과정에서 거의 일률적으로 계속 반복되는 그림과 교훈이 있습니다.

섬김의 대척점이 이기주의라는 속성임을 가르쳐 줍니다.

미국 멘로파크 장로교회를 섬기는 존 오트버그 목사는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영혼이 헌신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이다.”(p,117)

몇 년 전이글을 책에서 만나고 저는 그 페이지에 이렇게 사족을 달아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우상은 바로 이기주의이다.”

사랑하기란 자기의 것을 주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사랑하기란 그래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고 나니 제가 청년 때 많이 불렀던 대중가요 가사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사실은 대중가요의 장르에 들어가지만 저는 이런 노래는 복음성가로 집어넣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사가 참 아름답고 귀했습니다.

설교 준비를 마치고 서재에 있는 오디오에서 LP 판으로 이 노래를 들었습니다.

참 행복했는데 오늘은 교우들과 함께 손을 붙잡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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