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응원하십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12:21-27 서론) 도널드 트럼프가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적인 선언을 하자 세계가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혔습니다. 예루살렘을 공동의 성소로 여기고 있는 팔레스타인은 물론 서구 기독교 국가들 그리고 제 삼 세계 국가들마저도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을 편들기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는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다분히 정치역학적인 계산 때문입니다. 미국 경제 구도의 막후를 조정 하고 있는 유대계 미국인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국 경제의 실권을 차지하고 있는 부류들인데 그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은 부동산 재벌인 도널드 트럼프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고 미국 사회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는 것은 미국 대통령 퇴임 이후 본인의 재산권 형성에 나쁘지 않기에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편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트럼프의 이런 행태는 소위가 아주 질 나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랍은 이스마엘의 후손이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에서 탈락되었고, 이스라엘은 이삭의 후손이기에 마땅히 주인이고 축복의 자손들이라고 배운 것입니다. 이 공식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구원사를 왜곡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주 별 볼일이 없는 한 계보 즉 아브라함의 가계를 택해 당신의 인류 구원의 지렛대로 삼으셨기에 도리어 하나님의 전적인 구원사에 대한 주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이고 하나님의 그 전적인 은혜에 감사해야 대상자임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계보를 택하신 주님의 일하심은 아브라함이 위대하고 특별한 계보를 갖고 있는 가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사를 이루시기위해 사용하신 도구임을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을 훑어보겠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간의 미묘한 긴장감이 그려져 있습니다. 형이었던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보고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였던 하갈을 브엘세바 광야로 쫓아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광야로 쫓겨난 하갈이 아들이 광야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자 대성통곡을 하고 울자 하나님이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렇게 반응하셨습니다. 창세기 21:18-19절입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이 구절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갈의 계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구원사에서 탈락된 족보요 가계도라고 인정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항상 우리는 이삭의 계보에 집중하지 이스마엘의 족보는 별로 관심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이 구절이 놀랍지 않습니까? ‘일어나 아이를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큰 민족을 이루는 주체는 이스마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는 21장의 하갈과 이스마엘과 관련하여 14년 전 하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창세 16장의 기록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갈은 당시 주류였던 사라의 몸종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스마엘을 잉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믿지 못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을 역임한 김중기 박사는 이 사건을 빗댄 ‘약자에게 일어난 신앙사건’이라는 본인의 글에서 하갈은 인류 최초의 여성 인권운동가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유는 하갈은 당대 족장으로서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가의 씨받이요 노예였는데 아브라함의 씨를 잉태하고 난 뒤에 팽 당하여 그곳을 탈출했던 여인이라고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를 추적해 보면 하갈이 주인의 집을 탈출하여 자유를 원했지만 결국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하갈이 도망하던 길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힘들어도 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권고하시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배려를 창세기 16장에서 보게 됩니다. 그 배려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16:11-14절은 이것을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나님의 살피심이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임했다는 성경적 교훈이 하나님은 어느 한 편에 기울기를 기울여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에게 편만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의 기사를 통해 조금 더 깊이 묵상하다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아주는 통찰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 주목할 만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붙들어주신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특히 약한 자를 ‘브엘라해로이’(살피시는 하나님) 하신다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누가복음 4:18-19절에서 선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포로 된 자에게 자유 함을 주시는 것,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오늘 설교 제목과 연관하여 설명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를 응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몸의 비유를 통해 은사에 대한 총론을 마무리하는 발언도 대단히 중요한 통찰을 주는 교훈임을 알게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오늘 본문은 설교자인 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표현으로 은사에 대한 유익을 알려주는 두 번째의 메타포를 선사합니다. 본문 22-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주목해야 하는 22절의 구절이 무엇입니까?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라는 표현입니다. 23절에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등등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단어들을 소개하면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런 몸의 부분들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어느 경우에는 더 요긴함을 역설합니다.(22절 후반절) 덜 귀하게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여긴다고도 했습니다. 압권은 아름답지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더 아름다운 것으로 취급당한다고 한 23절의 발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본인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교훈을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주저 없이 선포합니다. 본문 25-26절을 보겠습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흔히들 하는 말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의 장기 중에 정말로 쓸모없는 장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맹장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처럼 여기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신경외과의 의사들은 말합니다. 맹장이 없어지면 사람이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맹장이 없는 사람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해도 조정사가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장기 중에 가장 늦게 퇴화된 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아무 쓸모없이 보이는 맹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바로 서는 균형감각에 있어서 매우 곤란함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장기 중에 필요 없는 다시 말해 의미 없이 만들어진 장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의 권면에 참 적절한 의미 해석이 아니겠습니까? 몸의 구조는 유기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장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 팩트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아주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까? 왜 이렇게 역설하였을까요? 은사 때문이었습니다. 은사가 바로 이런 유기적 관계라는 점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각 부분의 역할을 하는 지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재 강조하지만 높고 낮음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은사이고, 좋고 나쁨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요하고 안 중요하고 라는 관점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 은사입니다. 저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주시는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 바람직한 은사 활용법은 각종 은사를 받은 자들끼리 서로 응원해 주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받은 은사자와 지식의 말씀은 받은 은사자가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그리고 하나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서로 응원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병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들과 함께 서로 응원함으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예언하는 은사자들과 서로 응원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영들 분별의 은사를 받은 교우들은 방언하는 자와 통역하는 자와 서로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응원의 관계를 가지라는 것이 오늘 바울의 권면이자 명령입니다. 저는 이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와 성도는 언제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빌립보서 4: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기사에 의하면 바울이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의 여 집사들입니다. 유오디아는 ‘순조로운 여행’이라는 뜻의 이름이고, 순두게는 ‘행복한 기회’라는 뜻을 갖고 있는 이름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아름다운 뜻을 갖고 있다면 아마도 이들은 빌립보라는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중요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두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권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의 동사가 보입니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 참으라, 도우라입니다. 이 단어들만 가지런히 놓고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당시 빌립보교회의 정황이 엿 보입니다. 무언가 이 두 사람은 대립의 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빌립보서가 침묵하고 있기에 자세히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서로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두 여인의 반목과 갈등은 빌립보라는 좋은 환경의 교회를 좀 먹고 있었기에 바울은 두 여인에게 강력하게 함께 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나오는 단어 중에 헬라어 접두어 중 ‘함께’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쉬’라는 접두사 단어의 합성어가 무려 5번에 걸쳐 등장하는 것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의 화해와 일치를 얼마나 간절하게 기대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유기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망하는 가장 중요한 지름길은 공동체 전체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한 지체를 고장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고장 나게 하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오늘 본문의 언어를 재등장시킨다면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 ‘아름답지 못한 지체’ 등을 공격하여 그것들을 무력화시키면 교회는 와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회를 무력화시키고 공격하는 일체의 사탄적인 시도에 항거하는 방법은 은사를 받은 지체들이 서로를 격려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쓸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훌륭한 교회, 훌륭하지 않은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네 교회, 내 교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냥 하나(una)의 교회입니다. 어제 신학교 동기 중에 한 명이 제천에 화재로 인해 저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현장 목회를 하는 친구가 아니라 기독교 사회운동을 하는 친구입니다. 세월호 진상 조사를 하는 기독교 연대에서 활동을 하고, 이번에 세금 납부에 대해 보수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세금 혜택을 금하라는 운동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고, 명성 교회세습에 대해 법적인 고발을 하는 등등 이렇게 아주 진보적인 입장을 보이는 친구입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제가 쓴 글에 대해 때로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여주고 또 때로는 자기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쓴 소리를 하는 친구입니다. 금요일, 저에게 전화를 주어 안부를 물었습니다. 대화중에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이 목사는 중도 개혁이야. 어떤 때는 마음에 들고 어떤 때는 조금 아쉽고 그래.” 친구의 말을 저는 부정적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느낀 소회를 그대로 진정성이 있게 말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친구의 말을 듣고 제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난 중도개혁이 아니야. 난 그냥 상식적인 목회를 하는 것뿐이야!” 저는 극단을 싫어합니다. 저는 가능한 균형을 택하려고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목회자가 택하는 균형이 상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혜의 말씀만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말씀만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방언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예언만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영들 분별의 은사만도 지지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지지하는 것은 이 모든 은사가 조화롭게 사용되는 것을 지지합니다. 누군가가 자기은사에 대하여 최고의 은사라고 우기면 저는 그 사람과 싸우되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역할이 교회에서 최고라고 우긴다면 저는 그 사람과 피 흘리기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각을 바꿀 때까지 말입니다. 반대로 누군가가 자기의 은사를 갖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겸손하게 사용하고 또 다른 지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존중하여 그 은사자를 응원해 주면 저는 그 사람을 열심히 응원할 것입니다. 동시에 그 삶이 가지고 있는 은사도 높이 평가하여 열심히 응원해 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바울이 말한 본문의 교훈이자 가르침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행전 7:54-5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제가 참 개인적으로 많이 묵상하기에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이 장면의 압권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그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 서셨다는 표현입니다. 도무지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자리에 앉아 계실 수 없으셨던 주님, 그래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응원해 주셨던 주님이 보고됩니다. 참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응원하심이 있었던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자리에 오늘 고린도전서를 쓴 저자인 바울이 돌 던지는 자들의 옷을 관리하며 함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드라마 같지 않습니까? 오늘 이 감동을 보았던 바울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은사를 받은 자끼리 서로 응원하라는 메시지는 또 다른 감동의 감동을 자아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제천이 많이 우울합니다. 여러분이 발걸음을 옮기는 장소에서 여러분이 받은 은사로 잘 그들을 섬기고 응원하게 되면 아픔을 두 배나 빨리 극복하게 하는 요인이 될 줄로 믿고 그런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우리 세인지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란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찌어다 열방과 세계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사랑합니다 내 아버지 찬양합니다 내 온 맘 다하여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