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2)
본문: 고린도전서 12:8-11
서론)
지난 주일부터 저는 우리 교우들과 고린도전서 12장에 기록된 9가지 은사에 대한 공부를 하나씩 열거하며 구체적으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살폈듯이 첫 번째 시간에 바울이 본문에서 소개한 9가지 은사 중에 2가지 은사를 먼저 살폈습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설교 원고를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개인 블로그에도 가감 없이 올립니다.
그 이유는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말씀을 드린 대로 공개한다는 것은 누구든지 제 설교의 원고 내용을 공유하도록 함으로서 제 스스로 공부하는 것에 소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공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누구의 설교를 표절하거나 베껴 쓴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영적 사유함과 성찰함의 지난한 과정을 겪었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경우에 따라 제 설교 원고의 내용을 공감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제 설교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반론도 적지 않게 많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를 공개한 이후, 나름 예상은 했지만 은사에 대한 익명의 사람들 중에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은사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는 전혀 다른 이해를 하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또 다시 발견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공격적으로 제 설교에 대하여 반감의식을 갖고 비난의 멘트를 남긴 익명의 글을 소개합니다.
“당신은 은사의 개념을 혹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지는 않으신지. 당신은 주님께 빚이 있나요? 그 빚을 어떻게 갚고 나가시나요?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나요? 헌데 은사의 우선 1순위가 말씀이라 하나요? 당신은 아직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군요. 성경 지식이 많다고 은혜 받은 거라 생각하지 마소. 머리가 좋으니 읽으면 금방 외워지겠지요. 하지만 성경말씀 하나님 말씀 진리는 지식이 아니네요, 지혜이지요. 그 지혜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먼저 깨달아야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겠지요. 은혜 받지 않고 성경지식 얻는 것은 독이 될 것입니다 지혜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이 독설적인 글을 읽고 답변의 글을 올릴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제 마음을 접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댓글을 단 사람은 제가 무슨 신학적, 성서적 답변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선포한 설교의 내용을 이 사람이 정말로 올바른 신학적 균형의 틀을 전제로 제대로 읽었는가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음은 물론, 은사에 대한 신학적 조명을 지식으로 치부하는 자와 무슨 대화가 되겠는가? 에 대한 회의가 저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바로 이렇게 은사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해지고, 심지어는 이단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것은 물론 자칫 잘못하면 교회가 와해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기에 바울은 이 부분만큼은 매우 단호하게 분명한 신학적인 접근을 전제로 은사론을 정리함으로 교회 바로 세우기에 올인 한 것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두 가지의 은사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오늘 다룰 2가지의 은사도 우리들의 신앙 여정에 매우 중요한 은사이기에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주셔서 명확한 은사 이해라는 은혜의 장으로 들어오시기를 기대합니다.
본론)
본문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3) 믿음이라는 은사입니다.
여기에서 제시된 ‘믿음’이라는 은사에 대하여 어느 경우에 놀라시는 교우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요?
믿음이라는 것은 신앙을 가진 자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생기는 산물이지 그것이 은사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교우들이 태반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하게도 믿음은 분명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입니다.
오늘 이 사실에 대하여 연구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제일 두드러진 부분을 저 역시 터치하겠습니다.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는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이라는 은사는 구원 받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주어지는 열매인 충성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낙관주의도 아닙니다. 고지식함도, 멍청하게 속는 것도, 가벼이 믿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 기록된 믿음이라는 은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는 것입니다.”(pp,273-274)
프라이어의 갈파를 의지한 이유는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지향하는 믿음이라는 은사와 일맥상통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인간의 의지로 인하여 믿음이 생겨난다면 이런 공식이 같이 도입되어야 합니다.
구원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은혜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축복도 매일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이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거나 배태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탄생되고 생겨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자, 성령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사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구절을 전제하여 데이빗 프라이어 목사의 주장을 접목하여 설명한다면 이렇게 믿음이라는 은사를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들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시는 은사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라는 이 은사에 대한 해석을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을 읽다보면 베드로가 욥바에서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주하고 있을 때 웬 사람들이 들이닥쳤음을 보고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처음 본 베드로에게 소개합니다.
우리들은 가이사랴에 거하는 고넬료의 심부름으로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인데 이유는 고넬료가 당신에게 심방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부지불식중에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심방요청을 받은 베드로는 그 사람들과 함께 욥바에서 가이사랴로 이동합니다.
마침 베드로가 도착한 가이사랴에는 고넬료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체들을 친척들과 함께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고넬료를 만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0:28-2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배경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실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보낸 사람들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신호를 보내셨는데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다만 그 일에 대하여 거부하지 말라는 사인으로 받았기에 오늘 나는 당신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를 부른 이유를 말해 주십시오.”
베드로의 이 선언을 접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참 중요한 믿음의 특성에 대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부연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 부정한 음식에 대한 거부를 하나님께서 나무라는 목소리로 들었지만 그것이 바로 고넬료라는 이방인을 심방하라는 사인인지는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따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가이사랴에 왔지만 사실은 기분이 별로 내키지 않았던 일임을 베드로가 분명하고 솔직하게 시인한 셈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받은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하는 시간에 먼저 경험한 하나님의 환상에 대해 소상히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욥바에 사는 베드로를 청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해서 자기가 사람들을 보내 당신을 청했고 여기에서 당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음도 고지하기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모여 있다는 고넬료의 신앙 고백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0:34-35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감동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여기에 기록된 ‘깨달았도다’의 번역인 ‘카타람마노마이’는 ‘손으로 움켜쥐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지만, 아무 것도 체감할 수 없지만 마치 ‘손위에 올려놓고 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믿음이라면 그것은 분명 성령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신 선물이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의 은혜를 이미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믿음의 선배였던 아브라함을 설명했는데 기막힌 통찰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8-10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미국의 평신도 크리스천 프리랜서인 필립 얀시는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에서 미국 탐험가인 리처드 버드의 남극 탐험 어록을 하나 소개합니다.
“나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이 빛을 열망했다. 남극에서는 겨울이 되면 4개월 동안 태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음울한 빛이 하늘을 감싸고 있다. 아마도 죽음 직전의 사람들이 보이는 세상이라고 할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겨울이 지나면 너무나도 광대하고 강렬한 태양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점이다.”(p,113)
그렇습니다.
믿음은 남극에서 겨울이 끝나면 반드시 태양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존재하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은혜, 바로 이것이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세 번째의 은사입니다.
4) 병 고치는 은사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읽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이 4번째의 은사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한 교회사의 한 흐름이라고 보아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치유라는 은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여정 안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는 은사 중에 하나입니다.
김요한 목사는 ‘상식이 통하는 목사’라는 책에서 교회에서 가장 중심 되어야 할 성도는 ‘아픈 자’ 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저 역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목양터 마당에서 언급했듯이 아들에게 기필코 교회를 사유물인양 넘겨준 한 사람이 말한 대로 교회의 중심은 결코 목사가 아닙니다.
다시 재론하거니와 교회의 중심은 아픈 자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중심이 아픈 자라면 당연히 교회 사역 중에 대단히 중요한 것은 병 고침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 병 고침이라는 은사가 상업화되었다는 절망입니다.
병 고침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꾼들이 한국교회에 즐비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병 고침을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상담학에서 말하는 단어 중에 집단적 최면 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착시 현상을 동원해 가상의 간절함이 현실적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드는 현상을 말합니다.
열광적인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거나, 감정적인 억제가 어렵도록 만드는 종교적인 수단들을 동원하여 본인이 혹은 타인이 가지고 있는 질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착각하게 하는 일련의 현상들을 말합니다.
이 현상은 20세기 말에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많이 횡행시켰던 종교적 일탈이었고 오늘날에는 신사도적 경향의 단체들이 근근이 그 맥을 이어가며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차원에서 치유의 은사를 인위적으로 이용한 악한 자들의 면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우리 성도들이 절대로 간과하거나 지나치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2017년 11월 19일에도 하나님은 치유 즉 병 고침의 은사들은 성령의 전적인 일하심으로 우리들의 현장에서 일어남으로 인해 수많은 아픈 자들의 고통을 치료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9절 본문에 기록된 ‘병 고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이아마이온’은 그 문자적인 뜻이 원래는 ‘치료도구’ 혹은 ‘약’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통하여 치유라는 단어의 의미가 이렇게 확장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치유란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이기도 하지만 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연 은총을 통한 병 고침도 함께 포괄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영과 육의 질병이 고스란히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영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마땅히 성령의 능력으로 고쳐주는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동시에 육체적인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자들을 먼저는 자연은총으로 치료하고 동시에 그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 질병들을 떠나가게 하는 능력을 교회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 최정희 집사의 유족들이 몇 주 전, 교회를 찾았습니다.
동생의 신앙의 흔적, 아내의 흔적, 어머니의 영적인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현장에 유족들이 함께 한 것입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서재에서 잠시 교제를 한 뒤에 그들을 배웅했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 집사의 아들 대근 형제의 손을 제가 살포시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붙잡은 아들의 손에서 두 가지의 온기가 느껴졌습니다.
눈에서 그렁그렁 거리는 눈물과 함께 왜 어머니가 이 교회에서 그토록 신앙의 여정에서 머물려고 몸부림쳤는가의 그 해답의 온기, 두 번째로 수많은 말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그 사랑의 온기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아픔이 치유 되는 전인격적인 치유를 말입니다.
주일마다 서정수 집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다.
저 역시 서 집사님의 치유 흔적이 느리게 보이는 것으로 인해 어떤 때는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통해 서 집사님을 위해 중보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당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한 목회자의 간절함과 그 기도가 또 하나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영적 반응을 보이고 있는 환우 사이에 꽃피우는 영적 치유가 일어나고 있음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전인격적인 치유라는 것을 무당이 복채를 많이 놓고 빌 때에 더 빨리 고침을 받게 해 주는 속임수가 아닙니다.
아주 옛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도원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유명한 원장이 무당짓거리와 같은 참담한 수준의 치유를 빙자한 미혹함을 젊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치유의 은사는 치유 사역을 하는 목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 강사를 통해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선물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이사야 예언자가 히스기야 왕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골방에 들어가 벽면기도를 하며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치유를 소원합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한 것이 끝난 것을 보신 주님이 이사야를 불러 그의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음을 알리게 하셨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성경의 내증으로 기록된 본문 그대로 읽겠습니다.
이사야 38:1-6절입니다.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주목할 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행위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히스기야의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도구로 사용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지 그가 무슨 주술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통래 히스가야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재론하거니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행한 종교적, 신앙적 행위는 그 어디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병을 고치신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치유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치유는 정녕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사입니다.
다만 히스기야는 치유를 사모했고, 소원했던 것 뿐입니다.
치유는 소원하는 자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은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치유를 만드는 자에게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만들어주겠다는 자에게 현혹되지 마십시오.
“각 종 질병에서 놓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오십시오.” 라는 홍보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치유는 하나님이 소원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사요, 선물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약 100여권 정도의 책을 폐기했습니다.
이번에 폐기한 책들 중에 상당수는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저에게 보내 주었던 책들입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손대지 않은 책들입니다.
굳이 펼쳐본 책들이라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는 인위적인 성령 사역에 관한 책, 치유 사역을 홍보한 책, 그리고 이름은 유명세를 타서 잘 알려져 있지만 다른 책에서도 똑같이 중복으로 열거된 내용들이 담겨져 있는 목회자들의 설교집들입니다.
폐기를 하고 정리를 하면서 놀랐던 것은 의도하지 않게 가지고 있었던 책들 중에 상당수는 은사에 관한 책들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교회는 그만큼 은사에 대하여 민감하고 관심이 많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 많은 책들 중에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은사 만들기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 무서운 책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강조하지만 은사는 주님이 주시는 변하지 않는 고유한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그 은사를 나에게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의도는 그 은사들로 통하여 하나님 교회의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은 물론, 나에게도 견고한 신앙의 은혜를 유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부여되는 선물입니다.
바라기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훼파하는 믿음의 은사들을 부여받았고 또 부여받을 것인데 그 믿음을 선용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바라며 믿음의 은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병 고침의 은사도 함께 부여 받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오늘의 현장에서도 증언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