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주일 묵상 나는 어떤 선생인가? 오늘의 성서일과 창세기 32:22-31, 시편 121편, 예레미야 31:27-34, 디모데후서 3:14-4:5, 시편 119:97-104, 누가복음 18:1-8 꽃물 (말씀 새기기) 디모데후서 3: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마중물 (말씀 묵상) 그렇다. 나는 내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안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군사독재 시절이었기에 교사들이 폭력을 다반사로 휘두르던 때였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시절이었기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예비고사가 있었던 시절, 학교에서 선택한 과목은 공업이었다. 공업 선생님은 30대 중반으로 기억된다. 공업 수업을 받던 어느 날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그날 부부 싸움을 하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떠드는 친구 한 명이 걸렸다. 50분 수업 시간 동안, 그 날 선생님은 40분 동안 친구에게 매 타작을 했다. 엉덩이 타작으로 시작된 매질은 몽둥이로 머리를 치기까지 했다. 그날 타작은 폭력 그 자체였다. 그날 선생님은 교단에 선 스승이 아니라 악마였다. 같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이셨고, 장로교회 안수집사이셨다. 3학년 1년 동안, 단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으셨다. 그리고 인격으로 제자들을 품으셨다. 나는 그 시절,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셔서 매우 궁핍한 경제적인 상태에 몰려 있어서, 과외를 하는 친구들처럼 공부하고 싶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수업료도 쩔쩔매 간신히 납부하는 주제에 과외비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럼에도 영어에 나름 소질을 보였던 탓에 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셨다. “강덕아, 선생님이 조금만 보충하면 영문학과에 진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외에 나와라.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선생님은 다른 아이들에게 과외비를 정상적으로 납부한 것처럼 만들어 3개월을 지도해 주셨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식하실 선생님은 내게는 영원히 잊히지 않는 유일한 스승이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디모데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가늠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배우고 확신한 일이 있다면 그 배움에 거하라고 명한다. 시답지 않은 스승의 가르침이었다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곱씹다보니 두렵고 떨린다. 선생으로 살아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나는 내가 가르쳤던 제자들에게 기억나는 선생이었을까? 기억난다면 어떻게 기억에 남아 있는 교사일까를 되짚어보니 등짝이 서늘해진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이렇게 갈파했음이 분명하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약 3:1) 두레박 (질문) 나는 배운 것에 얼마나 확신하며 그 확신 속에 머물렀을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주님. 이왕 선생이 되었는데 심판 받는 선생이 아니라 선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목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나비물 (말씀의 실천) 설교 원고에 담은 메시지를 한 주간, 실천하는 보폭을 떼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 주일이 치열했습니다. 치열하게 말씀을 받았으니 교우들이 한 주간 삶을 힘 있게 살아내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