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금요일 묵상 아히감은 오늘도 있다.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21편, 시편 119:97-104, 창세기 31:43-32:2, 예레미야 26:16-24, 디모데후서 2:14-26 꽃물 (말씀 새기기) 예레미야 26:24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손이 예레미야를 도와 주어 그를 백성의 손에 내어 주지 아니하여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나는 어제 묵상에서 예레미야는 간이 부은 예언자라고 묵상했다. 시쳇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예언자 예레미야는 성전 설교에서 거침이 없었다. 항상 옳은 소리가 선포되면 불의의 세력들이 부화뇌동한다. 여호야김 시대의 종교 장사꾼들이 예레미야에게 폭력을 가할 태세다. 그를 죽여 버리는 것만이 눈엣 가시를 제거하는 일이었기에 말이다. 여론도 비등하다. 죽여야 한다, 살려야 한다. 언제나 여론은 대세 편이다. 여론이 정직해야 공동체가 사는 데 여론은 카멜레온이다. 똑같은 미슈파트와 체다카를 선포하고, 헤세드를 외쳤던 미가는 살았고, 우리야는 죽었다. 예레미야는 둘 중의 한 명이 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본문 정황은 예레미야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형극이다. 사악한 여호야김의 치세였기 때문이다. 사형 언도가 확정되었지만, 하나님은 사반의 아들 아히감을 들어 그를 구출하셨다. 어떻게 구출했는지에 대한 정황은 텍스트가 침묵하기에 부연 설명이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위해 사람을 준비하고 세웠다는 점 말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렇게 일하심에 전율한다. 14년 전, 광야로 내쫓겼을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회에 전념한 결과물이 고독과 외로움과 극단적 정치적 압박이라는 절망으로 몰려 왔을 때, 정치를 외면하고 목회만 하는 것이 바보 목사가 되는 일임을 알아 목사직을 내려놓으려 했을 때, 주군께서 오셔서 내게 준 말씀이 있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행 18:10) 그날 밤, 내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많이 운 날로 기억된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오셔서 나를 이렇게 위로하신단 말인가에 감격하며 두 손 들고 항복한 날이기에 말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아히감이셨다. 오늘 현장에도 아히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늘, 항상, 여전히. 두레박 (질문) 나는 14년 전, 그 감격의 초심을 여전히 놓지 않고 사역하는 목사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14년 전에 아히감이 되어 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도 내게는 가장 완벽한 아히감이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히감이십니다. 주님만 보고 목양하는 남은 사역 기간이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아히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영성으로 오늘도 걷고 무장해 나아가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미사일 천국입니다. 주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안전하게 지키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