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 주일 묵상 돌아와 오늘의 성서일과 열왕기하 5:1-3, 7:1-15c, 누가복음 17:11-19, 시편 111편, 예레미야 29:1,4-7, 디모데후서 2:8-15, 시편 66:1-12 꽃물 (말씀 새기기) 누가복음 17:15-16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나는 누가복음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마르틴 루터의 갈파가 생각난다.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온 것이 바로 예배다.” 루터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를 그의 책을 읽다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돌아와’라는 단어 때문이라는 확신이 섰다. 예배란 도대체 무엇일까? 신학적인 용어 동원하지 않고 정의한다면 돌이키게 하는 것이 예배다. 사족은 필요 없다. 지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은 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이들, 돌이킨 자들이다. 어떻게 돌이켰을까? 예배였다. 지난 3년 동안 예배가 무너졌다. 혹시 이렇게 말하면 공격이 들어올 것 같다. 근본주의 목사의 고질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뭐 까짓 거, 그러라면 그러라지. 펜데믹 3년 동안 예배가 무너졌다고 평가하는 나는 예배를 어디에서 드렸는가를 책잡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음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했던 말을 노트했었다.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이 인간을 관찰하시고 상대하시는 곳이다. 그분의 겉모습에 별관심이 없다. 그분은 마음에 반응하신다.”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복 있는 사람, 253) 하나님이 반응하시는 것이 마음인데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이 없는 무감각으로 나를 무너지게 만든 지난 3년의 정황이야말로 펜데믹이 준 최고의 재앙이지 않나 싶다. 두레박 (질문) 돌이키는 것이 축복인데 나는 어떤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주일입니다. 강단에 서 있는 나도, 강단 아래에 있는 회중도 돌이키는 예배가 돠게 하소서. 건조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축도 이후에 선포된 성서적 앎을 실천적 삶으로 살아내도록 말씀을 이어가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예배에 참석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오늘 선포된 말씀이 현장에서 저들을 살리는 아딧줄이 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