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전담 전도사 사역을 위해 부산에 소재해 있었던 서면교회(지금은 예동교회)에 부임했습니다. 제 목회에 유일하게 갖고 있는 부교역자 1년 사역은 그렇게 시작되었지요. 부임하기 전, 담임목사님과 면접을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부산행 기차를 탔고 말도 낯설고, 길도 낯선 부산이라는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이 주시면 첫 번째 사역지이기에 최선을 다해 주의 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들어간 서면 교회는 지금 생각을 해도 참 서먹서먹했습니다. 신학교 시절에 선배들을 통해 수없이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부교역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담임목사의 종이어야 한다는 교훈(?)이었지요. 담임목사님과의 면접은 그런 마음으로 시작되었고 부족한 사람을 그런 대로 면접 중에 괜찮게 인정해 주신 담임목사님은 저를 선정해 주셔서 서면 교회에서 단독목회를 나가기까지 11개월을 섬겼습니다. 사역을 하는 동안 어떤 때는 쌍코피가 터졌고, 퇴근하여 넥타이를 풀지 못하고, 양말을 벗지 못하고 침상에서 곯아떨어지면 아내가 벗겨주었던 그런 강행군으로 훈련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들이 지난 주간에 졸업을 앞두고 이제는 교단으로 돌아가 사역을 할 때가 되었기에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면접에 임했습니다. 담임하고 있는 후배 목사는 고향 후배이기도 하지만 실력과 인품에 있어서 아들이 충분히 전도사로 사역하게 되면 본받고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심정적으로, 영적으로 지원하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첫 사역지이기에 제가 26년 전에 그랬든 것처럼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면접에 임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들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했고 종도 중보 사역으로 함께 아들을 응원했습니다. 면접에서 앞으로 섬길 교회의 담임목사가 부족한 것투성인 아들이지만 함께 사역을 감당해 줄 것을 요청하여 이제 아들을 다음 달에는 사역지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들의 사역지가 확정되고 이제는 진짜로 품에서 떠나보내는 아비의 마음이 당연히 그런 것이지만 갓난아이를 물가로 내보내는 심정인 것이 분명합니다. 종이 사역했던 지난 목양의 현장들은 눈물로 씨를 뿌렸던 선배 목사님들의 열매를 따먹는 형국이었지만 아들이 목회할 현장은 이제 뿌려 놓은 씨가 없어 본인 스스로가 씨를 뿌리기까지 해야 하는 이중의 고난이 있는 현장이라 아비가 보기에는 더욱 더 안쓰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만나야 할 현대 크리스천들은 종교다원주의의 색깔에 지배당하고 있는 자들이기에 아들이 헤쳐 나아갈 목양의 현장은 더 더욱 결코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위안거리를 찾는다면 사정이 그렇기에 사역의 현장에는 보석과도 같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진짜 남은 자들이 존재할 것을 믿기에 역발상의 관점에서 보면 진짜 목회를 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자위하게 됩니다. 앞으로 남은 제천 세인 교회에서의 사역의 마무리를 유종의 미로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사역지에서 아름답게 승리하는 30년 후배이자, 아들이 돼 주기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되겠습니다. 자식은 평생 짐이라는 옛 어른들의 말이 실감나는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