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바이(stand by) 목양실 바닥 공사를 지난 주간에 마쳤습니다. 3년 전 행한 서재 바닥 타일이 마르지 않은 채로 시공을 한 탓에 거의 다 일어났기에 더 이상은 매트로 가릴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지난 주간 재공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공사의 마지막 날에 타일 시공을 마치고 서재뿐만이 아니라 3층 베란다까지 포함하여 제반적인 환경 정리가 필요한 상태라 함께 동역할 지체들이 급 요구되어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일군은 담임목사 셀의 지체들이 제일 적합할 것으로 사려 되어 급 호출을 비상 연락망을 통해 날렸습니다. 결과, 총 8명의 지체 중에 3명이 반응에 응답해서 급한 불을 껐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운 여름철에 함께 귀한 교회 섬김의 헌신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급히 호출한 탓에 반응에 응하지 못한 지체들의 후담을 듣게 되었는데 참 재미있었습니다. 제천에 없어서, 서울에 올라가는 중이라서, 개인 사정이 있어서, 직장 때문에, 무응답 등등의 반응이었다는 전도사님의 보고를 들으면서 목사로서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그런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훗날, 우리는 하나님의 콜을 받게 될 것인데 나는 얼마나 그 부름에 준비되어(stand by) 있을까? 하는 감회가. 우리들은 예수님의 비유 중에 잔치를 준비해 놓은 어떤 사람이 잔치에 정해진 사람들을 청했을 때 청함을 받은 자의 상태가 참 다양했음을 압니다. 밭을 사서 그것을 먼저 돌보아야 하는 일 때문에,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야하기에, 나는 장가들었기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거절의 반응 등등.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정해 놓은 사람들에게 교회 사역에 동참하라고 갑자기 연락을 했을 때 그 연락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의 정황이 상당한 변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미리 예고하지 않고 부르면 되겠느냐고 항변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목사의식이라고 재차 제목을 달지만 그러나 만에 하나 주 예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전권을 부여 받으시고 다시 오실 때, 그 때는 분명 불시(不時)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나는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그 부름에 응하지 못하는 나름의 변명을 할 수 없다는 점만큼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 날, 그 부름에 대하여 기쁨으로 반응할 수 있는 영적 준비(stand by) 가 되어 있는가? 는 그 때 결정하면 늦는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오늘의 영적 상태가 나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친숙하게 살피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주셨던 첫 번째 편지 속에 담긴 바울의 일성이 목양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 다시금 메아리쳐 돌아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살전 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