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인 차정식 교수의 책을 좋아해서 빼놓지 않고 읽는 편이다. 그의 글은 진부하지 않아서이다. 또한 읽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저자와 치열하게 싸우기도 한다. 생각의 다름도 발견하게 때문이다. 해서 더욱 그의 글들에 애정이 가는 것 같다. 근래 들어 읽은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도 좋은 공부를 하게 해 준 길라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 주었다. 40개의 신약성서 본문의 통상적인 해석을 뛰어넘는 저자의 혜안에 공감하며 즐거운 여행을 했다. 아, 지금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옆으로 튀어나갈까 미리 교통정리를 해 둔다. 이 글을 쓰며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꾸로’ 의 발상이다. 그냥 하기 좋은 말로 ‘거꾸로’ 이지 사실은 ‘거꾸로’ 의 발상을 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고민과 사유와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자면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의 깊이가 심오하지 않으면 결코 ‘거꾸로’의 발상이 나오지 않는다. 생각한다는 것은 가볍지 않은 삶을 살 때만 나오는 결과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생각은 너무나 중요한 지성의 산물인 셈이고 더 나아가서는 영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목회를 시작한지 26년이다. 목사가 왜 목사인가? 를 자문한다면 나는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목사라고 진단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위대한 명제 앞에서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오류적인 발상으로 말도 안 되는 상업적인 싸구려 삯군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에 목사로 사는 것이라고 성찰하고 자성할 때가 많다. 순간순간,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달려온 것은 이 영적 자존감을 날마다 부유(浮游)시켰기에 목사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목사로 살면서 가장 큰 비극은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하기에 이 시대의 비극 중의 비극은 목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있겠지만 정작 큰 비극은 목사가 그렇게 사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살도록 사탄이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공격한다. 환경이 공격한다. 그래서 날마다 이렇게 무감각하게 살게 한다. “그냥 그렇게 살지 뭐!” 얼마 전, 일본이 낳은 위대한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을 늦깎이로 읽으며 신학대학교 시절 그의 또 다른 책 ‘바다와 독약’을 접했던 생생한 기억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심판은 무감각이라는 고발을 서슬이 시퍼렇게 선포하던 작가의 일침을 풋내기 신학생 시절 경험하며 적어도 무감각한 목사가 되지 말자는 그 다짐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 나는 무감각의 깊은 늪에 빠진 느낌으로 목양의 현장에서 두들겨 맞고 있다. 무언가를 하기가 두려워진다. 무언가를 하면 생각한다고, 이성적으로 목회를 구상한다고, 목회를 머리로 한다고 아우성치며 때리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현장이 자꾸만 스멀대며 올라오는 망령됨이 있다. 해서 움츠려 든다. “그래, 그냥 그렇게 살지 뭐!” ‘거꾸로’ 생각하며 치열하게 살려는 목사로의 자존심마저도 이제는 지켜낼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무척이나 힘이 든다. 몇 해 전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둘러싸고 목사로서 심히 견디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한 멘토 목사께서 가슴으로 울며 탄식했던 말이 오늘은 왜 이렇게 내 가슴을 후벼 파는지 모르겠다. “목사라는 이름을 갖고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까? 그냥 그렇게. 머리가 백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