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8번째 강해) 제목: 나는 날마다 죽노라 본문: 고린도전서 15:29-34 서론) 요한복음 12:2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성경 말씀은 언제나 담겨진 의미가 세속적인 상식과는 정 반대인 역설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살아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살아남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이라는 부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용인합니다. 무슨 방법을 쓰든,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지시는 그 반대입니다. 죽으라는 것입니다. 살아남지 말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 가치와 하나님 나라의 가치는 충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12:25절을 연이어 보겠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보이십니까? 소름끼치는 역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역설의 진리를 누구보다도 더 잘 살아낸 제자가 있다면 그건 오늘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일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너무 유명한 말을 남겨 놓습니다. 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대 천명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였습니다. 이제 저는 바울의 이 천명함 즉 선포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로 이렇게 선언한 데에는 시대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29절을 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29절은 오랫동안 해석의 어려움을 준 난해 구절입니다. 두 가지의 해석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 해석은 톰 라이트 교수의 해석입니다. ① 관행이라는 해석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 중에는 일부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위해 그들을 사랑했던 자들 중에 대신 살아 있는 자가 세례를 받았다는 해석입니다. 혹시나 부활의 날에 사랑했던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부활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관행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② 불신자와 관련한 해석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었던 가까운 친족이나 친구가 죽었지만 그와 최후의 부활의 날에 함께 하기를 원했던 불신자가 자진해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단하여 세례를 받은 경우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해석이 갖고 있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부활을 인정하는 신앙의 그룹에서 행했던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만큼 고린도교회 공동체에는 부활을 신봉하는 그룹들이 있었음을 증언해 주는 구절입니다. 이어지는 30-31절을 읽겠습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구절은 29절에 비해 해석이 비교적 용이합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은 물론 동료들에게 위험이 상존하고 있음을 토로합니다. 해서 바울은 그 긴박성을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렇게 선언한 바울은 자신에게 언제든지 임할 수 있었던 죽음에 대한 실례를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에베소에서의 경험을 들고 있습니다. 32절 전반절을 봅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에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죽음의 위협을 당했는지 이미 살핀 적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대표적인 우상이었던 아데미를 신봉하던 데메드리오의 선동으로 인해 수많은 우상숭배자들이 부화뇌동되어 에베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체포하여 오데온(일종의 원형 경기장)으로 끌고 갑니다. 그곳에서 성난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굶주린 사자들의 밥이 되게 하는 비극의 상황 직전이 연출됩니다. 이 참담한 보고를 받은 바울이 그곳으로 들어가 함께 순교를 하겠다고 본인의 뜻을 전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9:20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의 설명을 전제로 사도행전 19:30-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리 중에 바울의 친구 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왜 바울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려고 했습니까? 물론 동료들을 사랑하는 지도자로서의 리더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바울이 이렇게 담대한 반응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는 그는 부활 신앙을 믿는 주님의 제자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런 철저한 신앙을 기초로 오늘 본문 구절의 말미에 이런 사족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32절 후반절부터 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그렇습니다. 대단히 옳은 갈파였습니다. 로마의 치하에 있었던 고린도에 사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헬라 사람들이기에 내세와 부활에 대한 신념이 없는 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더불어 이곳에 정착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는 사두개파 성향이 있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회심했지만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사두개파적인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 중의 일부는 여전히 부활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자들도 있엇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이름은 신앙인이지만 내세를 믿지 않고 부활을 믿지 않았기에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라고 판단한 자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본문 32절에 기록된 ‘먹고 마시자.’를 연발하며 랜덤의 삶을 죄의식 없이 즐겼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경계했습니다. 해서 악한 동무들에게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깨어서 의를 행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해서 부끄러운 자가 되지 말라고 강력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본문의 성경적 배경과 이해를 자세하게 주석하며 달렸습니다. 어떻습니까? 바울이 권면한 본문의 내용을 보면서 눈에 띄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철저한 부활의 믿음이었습니다. 첨언하자면 이 부활의 신앙이 자기만의 신앙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전체 공동체의 신앙이 되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전한 선포를 접하면서 여러분의 담임목사도 동일한 마음으로 교우들에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가 철저한 부활의 신앙인으로 무장하기를 선포합니다.” 이 은혜는 대단히 중요한 선언이며 영적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무기인 부활의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겸비해야할 요소가 한 가지 있음을 오늘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표현 속에 담겨 있는 신앙인의 요소입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 고백의 이면 속에 담겨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 나의 나 됨이 전적인 나로 인함이라는 신앙의 착각을 죽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우리가 살핀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것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진실로 생각해 보십시다. 바울이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울’ 이었습니다. 이 뜻은 ‘높은 자’라는 뜻입니다. 헌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이후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가장 낮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이름만 보아도 회심 이후 바울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전 인생의 삶이 정말로 치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세속적인 수단과 방법마저도 동원하여 전도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동시에 여러 곳에서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경우에 따라서 그는 충분히 자신을 ‘사울’의 위상으로 자랑할 수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의 회심 이후에 단 한 번도 ‘사울’의 심정으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한 ‘바울’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빌립보서 3:8-12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믿음의 절정을 보는 듯한 고백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충분히 자기의 자기됨은 자기의 노력과 헌신과 힘씀으로 인함이라고 자랑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던 자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이 고백이 심령에서 솟아 나오는 자가 바로 ‘날마다 나는 죽노라’ 의 신앙을 갖고 있는 부활의 믿음으로 무장한 자입니다. C.S 루이스가 그의 걸작인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피력한 것을 읽어 밑줄 그어 놓았던 적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본질 그 자체이지, 변화가 일어날 때의 느낌이 어떠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P,230) 정말로 너무나도 선명하고 통쾌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파입니다. 루이스의 갈파에 제가 열광한 대목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루이스의 이 갈파가 오늘 설교의 테제와 똑같다는 것을 아십니까? 바꾸겠습니다. ‘나의 나 됨은 전적인 나로 인함이다.’에서 내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완전히 절망한 상태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의 부활을 바라보는 신앙이라고. 영국이 낳은 불의 사자 레오나드 레이븐 힐이 ‘소돔에는 말씀이 없었다.’에서 대단히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자세를 지적해 주었는데 1%의 주저함 없이 동의했습니다. “사회 여론이나 여러 상황이 그리스도인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일시적인 역경과 파도가 몰아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우울증에 빠져서야 되겠는가? 기분이 신자를 지배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자가 기분을 지배해야 하는가? 당신은 예수께서 우울하셨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에게는 그런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으셨다.”(P,44) 레이븐 힐에 대한 이 갈파를 담임목사가 전적으로 수긍하여 동의한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됨은 전적인 나로 임함이라고 확신하는 자들은 이것이 만족되지 않을 때 언제나 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어 무너지게 된다는 레이븐 힐의 숨어 있는 사자후를 저 또한 아멘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 자들은 날마다 나를 죽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감정대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결코 기분대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은혜와 말씀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지난 교사주일에 교사들과 함께 저녁 식탁공동체를 교육부장 집사님의 섬김으로 나누며 은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교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일학교 교사직을 잘 감당해 주는 서혜린 선생님을 집으로 바래다주었습니다. 가는 도중, 혜린이와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고 끝에 들어간 대학생활 첫 학기에 대한 소회를 나누면서 격려했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대학에서 CCC 동아리 사역을 하면서 또 다른 은혜 생활을 한다는 전언을 받고 기특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접하는 수많은 이신론 사상, 무신론적인 지성 집단의 공격 그리고 대학 밖의 문화에서 접하는 말초적 그리고 감각적 유혹들이 수없이 임하는데 그것을 이겨주고 있는 혜린이가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혜린이가 이렇게 저에게 감동의 나눔을 전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제천을 떠나지 못해요. 그건 목사님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제천을 떠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목사가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혜린이가 사족을 달았습니다. “힘들고 지쳐도 주일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목사님이 전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이기게 하거든요.” 혜린이는 여대생입니다. 얼마나 많은 세속적 가치가 딸을 시간마다 휘어잡겠습니까? 그런데 혜린이가 붙들고 승리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자신의 노력으로 인한 나의 나 됨이라는 하나님의 가치와 정반대되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내 기분과 감정을 뛰어 넘어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영성으로 걸어가게 해 주는 말씀의 은혜라는 고백 때문에 종은 그날 본인 앞에서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너무 행복한 목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화분에서 영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완전히 죽어 있어 있었던 화분에서 다시 피어나는 새싹들처럼 나의 나 됨은 전적인 나로 인함이라는 교만이 아니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의 겸손으로 나의 나 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달려가는 말씀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손들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시작 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 하네 죄와 사망으로 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은혜로다 주의 은혜 변함없는 신실하신 주의 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