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2)2024-02-26 15:50
작성자 Level 10

2018년 6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7번째 강해)

 

제목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2)

본문고린도전서 15:25-28

 

서론)

 

아들이 이번 달에 학교 커리큘럼에 즈음한 수업의 일환으로 학점을 이수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터키를 경유하는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학창 시절에 이런 기회를 갖는 것을 보면 우리가 신학교를 다닐 때 꿈에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기에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쉽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아들이 아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유는 성지순례 경비 중에 예약금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송금하라는 명령의 전화였습니다.

아들의 전화 끝이 이러했다고 아내에게 전언 받았습니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당장 송금해야 한다는 반 협박의 으름장으로.

아내가 아들과의 전화를 끊고 저에게 씩씩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쁜 놈이 아양을 떨어도 될까 말까인데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당장 송금하래요당장내가 지한테 빚쟁이인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나서 제가 이렇게 아내의 성을 돋웠습니다.

빚쟁이 맞지아들 낳은 빚쟁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생각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아들이 왜 이렇게 당당할까?

거창하게 말하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답하자면 이것일 수 가능성이 많습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부모가 장가를 아직 가지 않고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니까 어느 정도는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믿음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자기 앞가림을 하는 나이와 능력이 되었음에도 계속된다면 문제이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부모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그렇게 당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아들의 편이 되어 에둘러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11:1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이 구절을 의역했습니다.

삶의 근본 사실은 이것입니다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믿음이야 말로삶을 가치 있게 하는 든든한 기초입니다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의역에 동의합니다.

믿음이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만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고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의 상태이지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그의 의역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초대 교부신학자인 어거스틴이 말한 신 존재 증명의 대전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만약에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있는 신이라면그것은 더 이상 이 아니다.”

이 말을 거꾸로 접근한다면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리젠트 칼리지의 교수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p,64.)

종합하면 믿음의 출발점은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저는 이 관점을 오늘 본문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 담론입니다.

부활이라는 신학적인 담론 역시 일반적인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부활을 믿지 않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단언했습니다.

이렇게 녹록하지 않은 믿음의 또 다른 담론인 부활 믿음을 상고하기 위해 지난 주에 이어 본문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믿음인가에 대하여 두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적어도 부활의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첫째산상수훈을 살아냄으로 내 삶을 메시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이어야 함을 살폈고둘째주님은 반드시 이기시는 분이시기에 나도 승리하게 만드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 부활의 신앙임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25-26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문자 그대로 접근하여 해석을 한다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승리하실 것이라고 지난 중 설교에서 근거로 삼은 텍스트였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주님은 원수를 발아래에 두시며 굴복시키실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울은 이 부분도 분명히 정의합니다.

그 원수는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이어지는 27-28절을 읽겠습니다.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분명히 한국말인데 무슨 말인지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는 번역입니다.

이렇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게 번역한 이유는 개역개정판 번역자들이 원문에 충실하겠다는 고집 때문이었음을 양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해서 제가 보고 있는 성경 중에서 상당한 의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해의 폭이 쉬운 구절로 27-28절을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그러나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신 하나님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모든 것을 그에게 복종시키신 분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하나님만이

만물을 다스리시게 됩니다.”

또 하나는 톰 라이트 교수의 번역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굴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하지만 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키셨다고 말할 때모든 것을 그에게 굴복시킨 분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모든 것이 그에게 굴복할 그때에아들이 친히 모든 것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신 그분 아래에 굴복하시어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번역들을 참고하면 조금은 본문 27-28절의 해석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 사도의 기막힌 신학적 의도가 보입니다.

죽음’ 이라는 것은 모든 만물에 포함되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 죽음이라는 것 역시 통치의 일환으로 삼으셨던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나누었던 말씀인데 오늘 주일에도 한 번 더 이 말씀을 묵상하겠습니다.

창세기 3:19절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보신 것처럼 죽음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며 수단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존재는 없습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는 존재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분이시지만 아들 예수에게도 이 죽음의 틀을 몸소 경험하게 하셨다는 점입니다.

왜 아들을 죽여야 했습니까?

이 질문의 답은 대단히 중요한 오늘 설교의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을 아들 예수께서 이기셨다는 증거를 남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증거는 다름 아닌 예수를 부활하게 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지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죽음과 부활이 전적인 하나님의 통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믿음인가를 세 번째로 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3) 부활을 믿는 믿음이란 살아 있음이 하나님 때문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본문 25-28절에 연속해서 나오는 같은 의미를 유추하게 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25절의 발아래 둘 때까지, 27절에 발아래에 두셨다만물을 아래에 둔다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그리고 28절에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 등등입니다.

이 구절들을 통하여 연상하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입니다.

이 통치는 인간의 생사(生死)도 포함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내가 살아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지 않기에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 보십시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이후너무나도 야속하게 사울의 시기를 당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고난은 시작되었고 수없이 많은 살해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살얼음판과도 같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은 항상 죽음이라는 것을 민감하게 생각하며 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살벌한 살해 명령이 떨어진 위기 속에서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해 준 친구 요나단에게 이렇게 자신의 곤비함을 고백한 글이 사무엘상 20: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이때의 심정을 노래했던 다윗은 시편 39:5절에서도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죽음과 삶의 거리가 ONE STEP 이라는 말이 여러분에게 의미로 다가옵니까?

다윗의 이 고백을 나에게 담는다면 무리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이나 나나 여러분이나 삶과 죽음의 길이는 한발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음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감사의 조건임을 기억하고 결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하나님이 손해 보는 거지 뭐!”

망발 중에 망발입니다.

하나님이 손해 보시기에 나를 부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며 은혜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막내 이모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장례를 잘 받들었습니다.

이모님이 모셔져 있는 장례식장이 연세대학교 신촌 세브란스 장례식장 이었기에 숙소는 사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처갓집으로 정하고 왕래했습니다.

이모님 장례를 치르는 셋 째 날이었습니다.

새벽에 드려지는 발인예배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습니다.

세브란스 장례식장에 막 도착하여 택시 운전자가 주차장을 막 좌회전을 하려는 데 순간 꽝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가 타고 있었던 택시 운전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좌회전을 하려는 순간 서울시 도로의 1차선 로가 버스 전용차선인데 뒤에서 오는 버스를 보지 못하고 충돌한 것이었습니다.

웬일인지 저는 그날 뒷좌석에 앉고 싶어 그리했고택시가 시내를 주행할 때는 통상 손님들이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인데 안전벨트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뒤에서 오는 버스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오는 버스와 충돌했다면혹 그날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면 저는 그 날 이모님이 가시는 그곳을 함께 동행 할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과 정말로 다윗의 고백처럼 죽음과 삶의 거리는 한 발 차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저는 그날 장례식장 입구에 걸려 있는 이모님의 장례일정을 조객들에게 소개하는 안내 게시판을 사진에 찍어 저의 SNS 게시판에 이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이모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셔서 장례를 진행하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참 소중했던 그리고 사랑했던 분들이 곁을 떠나시는 것이 아프지만 그게 삶이기에 내 죽음도 이제는 준비해야겠다고이모님의 영전에 소리 내어 봅니다이모수고하셨어요그리고 다시 만나요.”

부활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삽니다.

?

내 생사의 통치가 주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기적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4) 부활의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본문 28절을 다시 읽습니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눈여겨볼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공동번역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때가 언제일까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때입니다.

여기에서는 우리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이해를 전제해야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우리들이 바르게 알아야 하는 이해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말아야 하는 두 개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①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누가복음 11:20절은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임하였느니라는 헬라어 단어 에프다쎈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아직은 임하지 않았는데 매우 가까이 와 있는 상태

이 해석은 전통적인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대두되었습니다.

앞에 오다앞서 오다로 해석하는 경우이고또 다른 경우는 방금 도착했다곧 도래하다등으로 단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입니다.

전통적인 해석인 매우 가까이 와 있다고 해석하는 전자의 경우로 에프다쎈을 정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 땅에 임하지 않은 것이 되지만 후자의 경우로 해석하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영국이 낳은 걸출한 신약학의 거두인 C.H Dodd 교수는 이 단어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시한 것으로 해석하여 실현된 종말론의 근거로 삼은 대표적인 신학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② 아직’ 의 하나님 나라입니다.

앞에서 언급했으니 설명이 쉬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전통적으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성경적 근거는 너무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너무나 큰 위로가 됩니다.

유명한 선교사이자 선교신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은 이 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망의 노래를 부르며 해석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았다면그의 은혜를 맛보았다면그 맛보기로 말미암아 우리는 장차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다함께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게 될 날하나님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실 날을 뜨겁고 담대하게 소망하는 가운데기꺼이 그분과 함께 이 세상을 구속할 때 따르는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죄와 구원’,pp,177-178)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의 나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나라가 성경에 상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건강한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렇게 종합하여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나라이다.” (G.E LADD, “신약신학”,p,62)

이제 오늘 설교에 적용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의 현재적 나라이고, ‘아직의 미래적인 나라라면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다음과 같이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성도임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처럼 살아야 하며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그 나라의 백성답게 걸맞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결단입니다.

바로 이것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믿는 믿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것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일체의 것이 나에게 느껴지면 그것들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인 오늘 내 심령 안에 있는 나라에서 그것들이 계속 존재할 수 있도록 행하며 사십시다.

하나님 나라에 이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것들은 제거하며 사십시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며 삶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침 많이 불렸던 손양원 목사님이 글을 쓴 찬양을 오늘은 함께 불러보기를 바랍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현실을 도피하는 자들이 부르는 찬양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이 명령하신 산상수훈의 삶을 실천하며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산파적인 감정주의로 이 찬양을 부르지 않길르 바라며 부활의 소망을 갖고 이 찬양을 함께 부르기를 소망합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 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들 판에도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내 주님 자비한 손을 붙잡고 면류관 벗어들고 찬송 부르면

주님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신부되는 교회가 흰 옷을 입고 기름준비 다 해 놓고 기다리오니

도적같이 오시마고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