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1%도 흔들리지 마십시다.
본문: 고린도전서 15:3-11
서론)
“구약에서 일하는 것(노동)은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 나타난 에덴의 낙원에서도 인간은 땅을 경작하며 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노동하지 않고 불로소득 하는 절도는 단순히 사회질서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창조 질서의 위반이다.”(연세대학교 출판부, “성서와 기독교”, p,65.)
연대에서 공부할 때 구약 선생님이셨던 박준서 박사께서 집필하신 ‘성서와 기독교’ 구약 파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제 8계명에 대해서 아주 적절하게 현대적인 감각으로 신학화 시킨 통찰의 글로 기억합니다.
대학원 시절, ‘도둑질하지 말라’ 는 박 교수님의 이 글을 가슴에 새겼는데, 근래에 아주 근접하게 또 다른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한 글을 본 것이 바로 제 두 번째 책에서 소개하고 인용한 김기석 목사가 쓴 ‘오래된 새 길’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에서 김 목사는 대단히 흥미로운 8 계명의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도둑질 중에 가장 무서운 도둑질은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언한 김 목사는 부연합니다.
“사람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철학의 공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두가 존귀하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당하고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오래된 새 길, p,60)
너무 시의적절한 통찰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이런 사실에 일찍이 동의한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인 쟈크 엘륄은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든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p,58)
이런 의미에서 근래에 여론의 집중적인 포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재벌 가계의 갑질 같은 것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 범죄 행위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가장 전제해야 하는 윤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의 정신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왜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중받아야 할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신앙을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리적인 이유, 신학적인 이유를 들먹이면서 기독교를 택한 이유를 말씀드리고 설명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너무나 단순합니다.
제가 기독교를 택한 이유는 정말로 존중 받을 만한 가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인데 하나님이 나를 존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는 곡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나로 인함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유는
너희의 모습 때문이 아니요
너희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함이라
복음성가 가수인 조수아 자매가 부른 이 찬양의 가사가 바로 제가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웬만한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기독교를 택한 그 이유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5:6-8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75번째 강해를 통해서 주군이신 하나님께서 깜도 안 되는 저를 사랑해 주신 사랑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는 부제가 있는 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독특성과 무기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성경 텍스트가 우리가 지금 살펴보는 고린도전서 15장이라고 했습니다.
기억을 되살리자면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 분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성경대로의 사건임을 지난 부활주일 설교를 통해 교우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부활 사건은 반드시 전제하는 겹 복음의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기독교의 핵심인 두 가지 사건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재삼 강조하는 편지에서 아주 의미 있는 뉘앙스의 메시지를 남겨놓습니다.
주군이신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에 대한 중인들이 있다는 보고입니다.
5-7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증인은 5-6절에서는 베드로, 12제자, 500여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이라고 7절에서 보고합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주석이 필요합니다.
5절에 기록된 12제자는 예수께서 지명하셨던 12 사도들을 지칭함에 별반 이견이 없습니다.
다만 가롯 유다 대신 충원된 맛디아를 포함한 12제자들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체적으로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500여 형제라는 해석도 필요합니다.
문서 비평을 하는 학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모였던 인원이 120명을 말하고 있는데 성령이 강림하기 이전이었던 시대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인정한 사람들이 5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수이며 과유불급의 해석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은 500여 명의 숫자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골고다에서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가장 많이 모이던 유월절이었기에 그 중에서 예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그 분의 죽음을 목도한 자, 그리고 그 분의 죽음 이후에 대하여 주목한 자들이 500 여명 정도라고 언급한 바울의 선포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에 나오는 야고보는 12 사도에 들어가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 즉 야고보서의 저자 야고보를 의미합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AD 44년경에 순교를 당했고,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는 그리 위상이 크지 않아 성경에서 부각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바울이 기억하고 있는 야고보라면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며 리더였던 사도행전 15장에 등장하는 제 1차 종교회의라고 하는 예루살렘 총회의 의장이었던 야고보 즉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12사도 군이 아닌 제 2 弟子群에 속한 자들임을 말합니다.
이렇게 5-7절을 열거한 이유가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면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적어도 주후 1세기 초반과 중반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태동하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 즉 예루살렘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산증인들이요, 기라성과 같은 주님의 제자들이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 바울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고 소개하는 장면을 돋우어 보십시다.
어떤 느낌이 드는 지 한 번 곱씹어 보십시다.
본문 8절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전술했던 주의 제자들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숨기고 싶은 과거지사들만이 바울의 이력이었습니다.
8절을 곡해하는 분이 있어 바로 잡겠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헬라어 ‘엑트로마’의 표현입니다.
어느 목회자는 이 구절 때문에 바울을 팔삭둥이, 혹은 칠삭둥이라고 까지 해석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엑트로마’는 문자적으로는 ‘조산하다, 유산하다’ 등의 뜻을 갖고 있지만 본문에 기록된 것은 팔삭둥이, 칠삭둥이가 아니라 주후 1세기 소아시아 지역에서 횡행하던 욕설이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바울의 대적자들 즉 소아시아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비롯한 바울을 싫어하던 자들이 전도여행을 통해 지쳐 있었고 어떤 학자에 의하면 말라리아에 걸려 거의 죽음 직전에 있었던 바울을 공격하면서 쓰던 상용구가 바로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같이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 공격했다는 가정이 고린도후서 10:10절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공격에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를 뒤돌아보는 자기 관리의 거울 같은 말로 바꾸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낮추어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은 정말로 본받을 만한 바울의 인격입니다.
이어지는 9절을 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어떻습니까?
바울의 자아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정직한 고백이 아닙니까?
그는 주님을 핍박하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핍박하던 자 중에 무척이나 열심히 있었던 자였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더울 놀라운 것은 그는 주님을 주군으로 인정한 이후에도 여전히 약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보실까요?
로마서 7:22-24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성경의 내증을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바울은 양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본인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나약함의 대명사였는지 숨기지 않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오늘 본문 8-9절일 것입니다.
다시 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여기까지만 보면 절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나 나나 도찐개찐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심각한 것은 어찌 내 신앙을 바울의 신앙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3년 전, 소아시아 성지순례 때, 타우르스 산맥을 두 번에 걸쳐서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넘었습니다.
고도 2000m, 길이는 450km에 달하는데 이 산맥을 차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면서 참 마음이 송구했습니다.
에어컨 냉방이 잘 되는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싣고 터키의 산야를 둘러보는 것은 관광이고 여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산맥을 도보로 넘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찌 나와 바울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이런 나를 보면 바울이 말한 만삭되지 못한 나, 사도라 칭함 받지 못할 작은 자라는 표현은 감히 하나님께 내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드는 절망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위로를 줍니다.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위로의 메시지를 봅시다.
본문 10절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우리는 이 구절로 인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로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에서 0,001%의 이견이 없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이 구절에서 받는 감동은 저 역시 지난 30년 목양의 성상에서 저를 버티게 해준 지렛대였고, 우리 교회 금년도 표어에 등장하는 밑힘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회심했을 때는 학자들은 주후 33년경으로 예측합니다.
더불어 바울이 본서인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썼을 때는 그의 마지막 전도여행인 제 3차 전도여행 중이었던 주후 53-55년경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 편지를 쓸 때가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한 시기로부터 약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예수의 사람으로 선 이후 20년 동안 1,2차 전도여행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은 에베소에서 그의 마지막 여행인 3차 전도여행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미 주님의 사람으로 사역하면서 고린도후서 11:23절 후반절-27절의 고난을 당했던 아픔의 소유자였을 것입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오늘 본문 10절 중반절에서 바울이 토로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라는 이 대목의 진정성을 느끼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여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은 수고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했던 바울이 토해낸 선언의 절정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이렇게 더 열심을 다해 사역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에 비해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요, 언변이 탁월해서도 아니요, 생김새가 준수해서도 아니요, 지식이 엄청나서도 아니요, 단 한 가지 때문임을 그는 고백합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강력한 경험을 한 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서 이렇게 본문을 매듭짓습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이 은혜 때문에 나나 고린도교회에 올바른 동역자들이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올곧게 전하고 믿었다고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하여 오늘 주일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원 포인트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 1%도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심입니다.
몇 주 전, 역대하 6장을 새벽예배 성서일과로 읽다가 가슴 찡함으로 다가온 구절이 있어 밑줄 그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역대하 6:30절입니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완료하고 봉헌하면서 드린 봉헌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여러 가지의 제목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던 솔로몬이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따뜻하게 다가온 구절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한 달 전 즈음에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친구 목사가 지금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목회학 분야를 강의하고 있는데, 다음 학기에 강사 충원을 한 명 더하게 되어 저를 추천했다고 해서 담당 교수를 만나기 위해 다녀왔습니다.
실천신학 분야 주임교수와 그렇게 만남을 가졌는데 그 교수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아주 별납니다. A쪽에 맞추어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B쪽의 학생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항의합니다. 해서 B쪽에 맞추어 이번 학기를 강의하면 A쪽 학생이 이번에는 항의를 합니다.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골치 아픕니다. 학생들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정도로 변화무쌍합니다.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교수 평가는 받아야 하는데 정말로 힘듭니다.”
아직 결정도 되지 않은 저에게 만에 하나 교수 협의회에서 실천신학 분야 시간 강사로 선정이 되면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는 엄포성 메시지로 들렸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속으로 피식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갑자기 옛날 아버지 같은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에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진해에서 제천으로 사역지를 옮긴다는 것은 안 목사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목사, 충청도 사람들은 속이 음흉해. 만에 하나 ‘예’를 하면 그것이 ‘예’라고 믿지 말고 적어도 5번째 정도는 확인해야 그 때 그게 정말로 ‘예’라는 것을 알고 목회해야 한다.”
아이러니는 그 목사님의 고향이 충남 서천이라는 점입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이었을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사람이 안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로 말한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왜요?
사람 마음을 아는 유일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기도가 목회자인 저에게는 그 날 성서일과를 읽다가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주 만이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렇다면 은혜가 무엇일까요?
내 마음을 유일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전개를 통하여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계시라는 것은 곧 ‘죄인을 위한 은혜’라는 뜻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도무지 그리스도를 인식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현대 신학의 선구자들,p,271)
이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이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은혜를 경험한 자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도 이해할 수 있다고.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2008년 12월 초였습니다.
생전 처음 경험한 교회에서의 어려움을 목도하면서 세 가지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① 목회를 접자는 것.
② 교회를 옮기는 것.
③ 교회를 개척하는 것.
제 생각에는 그리고 아내 생각에는 2번째에 기울기를 두고 하나님이 그렇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이미 응답의 내용을 정해놓고 하나님이 사인해주시기를 바라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적인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던 12월 초,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언제나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 날 새벽에 주님이 오셔서 저에게 말씀해 주신 레마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9-10절이었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개척을 하면서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개척교회는 마치 유리거울 위로 구슬이 흘러가는 것처럼 미끄러지기 쉬운 것이라는 선배들의 조언이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이사 온 한 몰지각한 신자는 저에게 이렇게 비수를 꽂았습니다.
“하나님이 2층에도 계시나요?”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제 설교를 듣고 온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는 참 괜찮은데 교단이 영….”
진짜로 지난 9년을 뒤돌아보면 그렇게 아슬아슬했습니다.
많은 동기들이 저에게 애도를 표했습니다.
해서 알게 모르게 울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아슬아슬함을 경험할 때마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은 사람도 아니요, 보란 듯한 예배당 건물도 아니요 단 한 가지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단 1%의 흔들림도 없이 지난 9년을 달려왔고 또 달려갈 것입니다.
왜일까요?
저는 1%의 흔들림 없이 이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제천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절)
가슴에, 육비에 새기십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귀한 은혜는 없습니다.
단 1%의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