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은사의 품격2024-02-26 15:48
작성자 Level 10

5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3번째 강해)

 

제목은사의 품격

본문고린도전서 14:39-40

 

서론)

 

영어로 된 소설에게 주는 노벨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권위가 있는 맨부커 상을 채식주의자를 발표한 작가 한강 씨가 2016년에 받았습니다.

이후 그녀는 금년에 또 다른 단편인 ’(the elegy of whiteness)이라는 작품이 다시 맨부커상 인터네서널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는 경사가 있었습니다.

그 작품에서 작가가 달을 묘사한 글을 읽다가 탄성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구름 뒤에 달이 숨는 순간 구름은 갑자기 하얗고 빛난다먹구름이 섞여 있을 때면 미묘하게 어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만든다잿빛이거나 연보랏빛이거나 연푸른빛을 띠는 그 무늬 뒤에둥글거나 실낱처럼 가는 창백한 달이 숨겨져 있다.”(p,69)

초승달의 모습을 보면서 창백한 달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감성적 필력을 보면서 나는 단지 작가가 필력이 있는 작가라는 차원을 넘어서 필격이 있는 작가라는 찬사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글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품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의 품격’ 이라는 베스트셀러 작품을 쓴 작가 이기주는 글을 시작하면서 한자 단어 ’()을 다음과 같이 풀었습니다.

사물의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가 굽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바르다말도 매 한 가지이다말은 마음을 담아낸다말은 마음의 소리이다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의 구조가 흥미롭다입 구()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pp,9-10)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의 품격이 있다면 영격(靈格)이라는 것도 과연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또 이런 나름의 해석까지 해 보았습니다.

언어의 품격이나삶의 품격보다 어찌 보면 영적으로 격이 있다는 영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말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를 강의할 때마다 매 기수에 전하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세 가지의 병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①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병

②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병

③ 배웠는데 행동하지 않는 병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 하나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허나 저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세 번째가 가장 중대한 질병이라고 진단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난 6주 동안 고린도전서 14장을 세밀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은사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인 지평들을 고민했습니다.

더 쉽게 말한다면 공부했습니다.

공부했기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웠는데 배운 대로 행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가슴에 담고 배운 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것을 저는 영격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14장을 마무리하면서 은사의 품격 즉 영격(靈格)에 대하여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3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바울은 은사를 언급한 14장을 마감하면서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대하여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예언은 사모하고방언 말하기는 금하지 말라고,

여기에 기록된 사모한다는 단어는 헬라어 젤류테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에는 사모하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신약성경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뜻으로는 열심을 다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적용하여 원문에 가깝게 직역한다면 열심히 예언하라’ 는 말이 될 것입니다.

또한 금하지 말라고 풀이된 단어는 콜루에테인데 이 단어는 억제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허면 바울은 방언 말하는 것을 억제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 됩니다.

결국 바울은 이 두 은사를 마음껏 사용하라는 결론을 맺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조금은 찜찜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살핀 전 구절들에서 우리는 상당히 민감하게 바울이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다루었음을 살폈기 때문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하되 한 방에서 은사들을 사용할 때는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 이상씩 집단적으로 하지 말 것이고방언의 은사를 할 때는 통역자들을 세우고예언의 은사를 행할 때는 또 다른 예언의 은사자가 통제할 것 등등을 말하면서 각기의 은사들을 행할 것을 압박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언은 열심히 행하고방언 행하기는 억제하지 말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앞 절에서 말했던 바울의 말과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바울의 말은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추적해 보십시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결론적인 은사 사용법에 대하여 논하면서 마지막 당부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던집니다.

40절입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품위 있게 하라고 번역된 유스케모노스를 유진 피터슨은 예의 바르게’ 라고 번역했는데 혜안이 돋보입니다.

왜 그는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유스케모노스’ 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적절하게’ (NLT: PROPERLY)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질서 있게라는 단어 탁시스는 생각을 깊이하고’ 혹은 사려 깊게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결국은 바울이 최종적으로 정리한 은사 사용법은 은사를 품격 있게 사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은사를 영격(靈格)있게 사용하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해석을 근거로 고린도전서 14장 즉 은사장을 통해 은사를 품격 있게 사용하는 방법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면서 은사장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 성도가 행하는 모든 은사 활용의 대 전제는 예의 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을 폭넓게 적용한다면 성도가 행하는 영적인 모든 활동의 대 전제는 예의를 갖추는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예의가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 근거는 참 많이 존재합니다.

오늘은 아주 의미 있는 성경적 내증을 하나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21:1-4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설교자들은 이 기사를 접할 때마다 헌금생활을 종용하는 근거로 많이 이용합니다.

어불성설입니다.

이 기사의 핵심적인 요체는 반드시 돌보라고 율법에서 못 박고 있는 과부를 돌보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던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을 향한 경고이지 헌금 종용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온 한 과부가 두 렙돈의 헌금을 넣는 것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헤롯 성전에는 성전 출입구에 13개의 나팔 모양을 갖고 있는 헌금함이 놓여 있었는데 그 중에 2개는 성전세를 내는 헌금궤였고또 다른 4개는 자유헌금을그리고 나머지 7개는 다른 지정 헌금궤였습니다.

바로 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미문에 앉으신 의도였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헌금궤가 당시에는 모두 놋쇠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 중에 지폐는 없었고 사회적으로 상용하는 화폐는 동전이었습니다.

렙돈은 유대의 동전입니다.

렙돈이라는 동전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제작되었고 소리도 헌금궤에 떨어질 때 가벼웠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적은 동전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과부가 드리는 동전은 소리가 작았습니다.

반면 부자들이 드린 동전들은 로마의 동전이었던 고드란트였습니다.

이 동전은 무게가 나가는 동전들입니다.

이 동전들이 놋으로 만든 헌금궤에 떨어질 때 소리가 큽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헌금이 자기만족의 도구였습니다.

여기서 렙돈의 가치를 살펴보십시다.

우리들이 이미 알다시피 데나리온은 유대인 장년들이 하루 품삯으로 받는 액수입니다.

데나리온에 비교하여 설명을 드린다면 렙돈은 1/128 데나리온입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의 액수가 두 렙돈이니까 1/64 데나리온이 됩니다.

어느 주석가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을 미국 달러 가치로 환산을 했는데 1/8센트로 환산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돈으로 말하면 요즈음 1센트가 130원 정도이니까 1/8 센트이면 약 16원 정도가 되는 액수입니다.

이제 과부가 드린 헌금 기사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종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 기사의 교훈은 주님이 16원이 생활비의 전부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처절하게 버려지고 방치되고 있는 과부들의 아픔을 보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한 최대의 예의를 갖추신 것이 최고의 헌금이라는 칭찬이었습니다.

반대로 과부들을 방치하고 있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무례를 경고하신 것입니다.

십 수 년 전에 충남의 모 지역에 있는 목회자 연합회에서 저에게 에스라느헤미야 강해 집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요청을 받고 부흥회가 아니라 사경회를 한다는 전제 하에 허락하여 강사로 사역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 스스로 관심이 있는 성경 텍스트가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이었기에 나름 최선을 다해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집회는 감사하게도 거듭될수록 참석인원이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

집회 마지막 날이었던 셋째 날 새벽예배를 끝내고 아침에 임원진 목회자들과 식사를 나누었는데 임원 한 분에게 저에게 조심스럽게 임원단의 이야기를 전언했습니다.

강사님이번 집회가 생소한 성경을 풀어주는 집회라서 신선한 은혜들을 연합회 교회 성도들이 받고 있습니다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헌금이 다른 때에 비해 적게 들어와서 그러는데 강사님이 오늘 절기 끝날 집회에 한 번만 강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그리고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저에게 요청했습니다.

요청을 받고 나서 상당히 힘이 들었습니다.

하자니 그 동안 제가 전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겠고안 하자니 주최 측에 예의가 아닌 것이 되고.

고민 끝에 집회의 텍스트가 아닌 고린도후서 8-9장에 기록되어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에 있는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작은 교회들이 예루살렘 모교회가 기근으로 인하여 상당히 곤혹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전해 준 것을 듣고 최선을 다해 구제연보를 드렸다는 이야기로 화제를 삼아 가장 상식적인 선에서 구제하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마지막 집회를 식은땀 흘리며 끝냈던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

이후다시는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요청이 들어오는 외부 사역을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목사가 교회에서 강해 설교의 순서에 헌금 설교를 하는 것은 적절한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의무요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만드는 헌금설교는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스케모노스’ (품위 있는)의 예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헌금 강요 설교는 인위적인 예언이기에 그것은 성도들에게 예의 있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예의로 진행되어야 하며적절한 신학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왜 입니까?

예언은 나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사를 적절하고 예의 있게 사용하는 품격입니다.

 

2) 은사를 품격 있게 사용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질서의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본문 40절에 기록된 마지막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교회 공동체는 위계에 의한 통치 권력이 주장하는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래서 권력 기관이 아닙니다.

개신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고 나온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이 비성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톨릭의 권력 구조가 비성경적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해서 개신교회는 조직의 설정을 갖고 있는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직분을 만든 것은 통치구조 안에 있는 서열상의 구조가 아니라 섬김을 위해 사역의 배치 때문이었습니다.

헌데 근래 교회의 구조가 중세 가톨릭보다 더한 계급구조를 갖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유감입니다.

교회는 어떤 권력 구조가 통치할 수 없는 공동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주 예수께서 주인이신 교회라는 신학적인 이해는 수용하지만 보이지 않으시는 주님이 직접 통치하실 수 없는 구조이기에 어쩔 수없이 사람이 이끌어 가야한다는 역설입니다.

사람이 이끌어가는 공동체는 결코 완벽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실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역학적인 교회 공동체의 구조에서 인위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해 온 30년 동안 이 숙제를 풀기 위해 정말로 몸부림을 쳐왔습니다.

열심히 영적인 싸움도 해왔습니다.

그렇게 달려온 30년 목양의 현장에서 나름 견고하게 선 목회 신학적인 철학이 생긴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현상학적으로 주인이신 주님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구조인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이상적인 질서 공동체로 서 갈 수 있는 최적의 시나리오가 있다는 목회 신학입니다.

성령 받은 평신도가 이끌어가는 교회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언급한 성령 받은 평신도라는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언급한 성령 받은 평신도라는 것은 신비주의에 빠져 이상한 곳에 가서 마약 주사 맞고 내려오는 그런 상업적이고 삼류적인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가는 질서는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밑힘의 근원이신 가장 인격적이신 성령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성령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전인격적인 성령의 통제를 받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사도행전 6장에서 벌어진 구제 다툼으로 인한 분쟁 시에 초대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극복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자세히 사도행전 6장을 살피다보면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 출신의 그리스도인인 제자들이 실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항거할 수 있는 부류들은 적어도 예루살렘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구제로 인한 분열이 일어났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상태임을 추측하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 심각한 내홍과 분열을 일거에 극복하고 일소할 수 있었던 그 힘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요?

두 구절을 추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6:3과 5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제자들이 택한 집사들의 공통분모가 성령의 충만함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뽑은 초대교회는 그 순간부터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공동체로 급선회하였습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들이 통제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분열과 다툼을 극복하고 강력한 선교 공동체로 탈바꿈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조명하시지 않는 은사는 사용하지 말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생각이 점령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점령한 은사는 엄격한 의미로 말하면 그것은 은사가 아니라 자기의 주관적 체험이라는 아주 위험한 요소입니다.

자기의 주관화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교회 질서에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전락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성령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과 질서에 의해 움직여야 합니다.

그 일의 도구로는 반드시 성령 받은 사람만이 선택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격이 있는 은사를 사용하는 질서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참 버거웠던 고린도전서 14장 강해를 마치고자 합니다.

몇 주 전에 경북 영양 심방을 갖다가 경험한 일을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대심방 기간이기에 이동화 권사님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는데 마침 심방을 준비하고 있는 권사님 내외께서 저희들을 반갑게 만나 주셨습니다.

헌데 심방을 내려갈 때 볼 수 없었던 여자 청년이 한 명이 있어서 물었더니 이상훈 집사의 조카딸이었습니다.

지금 안동대학교에서 원예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금요일마다 할아버지 집으로 와서 주말을 보내고 다시 학교에 가는 그런 스케줄로 이번 학기부터 두들 마을에 거주하기 되었는데 이번 심방 때 저희 부부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조카가 예배를 드리는 방으로 조용히 들어와 앉더니 다소곤이 예배에 참석을 하는 모습이 예뻤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묻는 말을 답하는데 22살 먹은 여대생으로는 믿기지 않는 차분함으로 아주 예의 있게 저에게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하는 룸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조카가 이번에는 식사를 준비하는 문 집사님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너무 조카가 대견스러웠습니다.

음식을 담은 그릇들을 제 앞 식탁에 옮겨놓는데 그릇 소리기 들리지 않게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22살이면 아직은 애인데 어쩌면 그렇게 조신하게 음식을 나르든지 저와 아내는 순간서로의 마주본 눈빛으로 이렇게 교감을 주고받았습니다.

며느릿감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22세에 지나지 않은 아직 어리다 어린 여대생의 예의 바름을 보면서 아들가진 부모가 한 번 즈음 욕심을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도 예의 바른 사람을 좋아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예의 바르고 조신하게 은사를 사용하는 자를 너무 예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은사 사용은 나의 것을 자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예의 있게 그리고 질서 있게 나에게 주신 은사들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땅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 죄 사하셨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우리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

 

우린 고대 하네 주님 오실 그날

다시 사실 왕의 영광 이 땅을 비추네

사단의 권세는 주 앞에 무너져

생명과 진리의 주 권세 가장 높도다

 

예수 이름 앞에 절하고

모든 입이 주를 시인해

영광중에 오실 주를 보리라 선포해

 

왕께 만세 존귀와 위엄을 찬양해

왕의 왕께 만세 주 예수 하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