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2번째 강해) 제목: 왜곡하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14:33(b)-38 서론) 제 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실장으로 있는 김진호 목사가 엮은 ‘당신들의 천국’(돌베개 간)이라는 책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보고를 하나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후발 대형교회라고 진단한 세 교회를 조사했습니다. 소망교회, 온누리 교회, 사랑의 교회입니다. 조사의 결과로 이런 보고를 책에 기록합니다. “오랫동안 소망교회에 교적을 두었던 이들은 한 결 같이 자신이 이 교회에 대하여 강한 결속과 귀속성을 느꼈던 이유를 ‘안정성’과 ‘편안함에서 찾았고, 온누리 교회와 사랑의 교회는 소비사회의 빠름이라는 가치를 재해석하여 신앙의 웰빙-보스화를 추구하였는데 이것들이 그 교회 교인들에게 부합했다.”(p,48) 글을 읽다가 21세기적인 정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 말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중요한 담임목사의 팁을 하나 교우들에게 던지겠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는 되었지만 공감하여 수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내 교회에 대한 자부심을 안정성, 편안함, 그리고 웰-빙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목사의 양심상 쓰라렸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4,0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이면 대형교회라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앨리바마에 위치한 브룩힐스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이한 것은 그 교회를 담임하는 데이빗 플랫은 전혀 대형교회 목사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는 큰 교회를 만들기 위해 목회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성서가 증언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 아픈 자들을 위한 교회, 성도들이 편안한 교회가 아니라 불편한 교회, 매너리즘에 빠져 전혀 움직이지 않는 명사형 교회가 아니라 어떻게 하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할까를 고민하는 선교적인 교회, 동사형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목회자로 살다보니 정말 고민하는 그리스도인, 주님의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미국인들이 모여드는 교회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바로 브룩힐스 교회입니다. 데이빗 플랫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래디컬’에서 정말로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어록을 남겼습니다. “박제된 그리스도인이란 영적인 안전 금고, 즉 예배당 건물과 선하게 살라는 윤리적 가르침 속에 완전히 고립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온 교인이 들어갈 거대한 건물을 짓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주변 세계와 담을 쌓고 등을 돌린 채 일주일에 두 어 시간 정도 교회에서 어슬렁대는 것으로 교인이라고 착각한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멋진 예배당 안에 앉아서 착하게 살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그럭저럭 괜찮은 시민으로서 괜찮은 일을 하며, 괜찮은 집에서 괜찮은 식구들과 괜찮은 삶을 산다. 구원 받기 전에 살았던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 괜찮은 교인으로 지낸다.”(p,146) 데이빗 플랫의 이 글을 읽은 지가 5년이 넘었습니다. 당시에 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소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박제된 그리스도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사진 하나를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함께 섬기고 있는 전남 말도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동기 목사가 동기회 단체 톡 방에 올린 사진입니다. 이 친구 목사는 교우들에게 말씀을 드린 것처럼 급성백혈병 진단을 받았지만 골수이식에 기적적으로 성공한 뒤, 잘 나가던 대학교수의 직을 포기하고 다시 목사의 원 자리로 돌아와 섬에서 할머니들을 섬기며 사역하고 있는 동기 목사입니다. 사진과 함께 동기 톡 방에 친구 목사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말도 교회를 섬기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 바지락 캐고 밭일하느라 있다 손가락이 휘어있습니다. 그 손에 염증이 생겨 퉁퉁 부었습니다. 육지로 나가야 하는데 비가 내리고 짙은 안개 때문에 여객선이 통제되어 육지로 나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제가 준 항생제와 진통제를 너무 아파 한 번에 다 털어 넣어서 그나마 통증이 조금 덜하다고 하는데 배는 안 오고 약을 더 달라고 하는데 혹시나 모를 부작용 때문에 더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 우리도 그 자리에 갈 텐데 잘 섬기려 해도 현실의 벽이 너무 큽니다. 저녁에도 아프다고 하시면 약을 더 드릴까합니다. 항생제도 상비약으로 의사한테 졸라서 조금 사 논 것인데 요긴하게 사용되네요. 나도 진통제로 매일 지탱하면서 살고 있지만 할머니들 아플 때는 자식들이 돌봐야하는데 자식들은 모두 육지에 살고 섬 교회 목사가 어르신들 보호자가 되서 모시고 다니고, 병원에 입원시키고, 매일 간병하는 게 저의 사역인가 봅니다. 오후 9:16분, 드디어 해경 배가 어둠과 파도를 뚫고 왔습니다. 할머니가 손에 통증이 더하고 고름이 노랗게 보이기에 119상황실에 전화했기 때문입니다. 119는 해경과 삼자 통화를 시켜주었고 해경은 파도가 높아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119 상황실에 전화하여 헬기라도 보내달라고 주문하였습니다. 119에서는 이것저것 알아보더니 날이 어둡고 바람도 심하고 파도도 높아 헬기 운항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다시 해경한테 전화하였습니다. 이 할머니 이러다가 무슨 일 생기면 책임질 거냐고 반 협박 반 애원. 이러고 전화를 수십 통 6시 부터 전화하였는데 7시가 지나고 8시 되서야 해경에서 다시 묻더군요. 정말 필요하면 이 파도에 이 바람에 해경 경비정을 보내겠다고요. 저는 당연히 보내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내 고집도 한 고집인데 두 시간 만에 배가 어둠과 파도를 뚫고 도착 했습니다. 해경 배 운전수가 완전 뭐 씹은 얼굴로 말도 안 붙이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할머니를 얼른 배에 태우고 보냈습니다. 신시도에다가는 119에 전화해서 구급차 대기시키고 군산의료원으로 바로 후송시켜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입니다. 끝까지 울며 이를 갈며 조르니 응답되더군요. 해경과 119상황실이 저 때문에 조금 시끄러웠을 겁니다. 할머니는 무사히 배를 타게 되었고 저는 밖에서 할머니 태워드리려고 추위에 한 시간 떨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해경 배 운전자에게 웃음 띠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파도가 높으니 조심하십시오. 우리나라 해경 파이팅!” 글을 읽다가 울컥했습니다. 제 동기 목사이지만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다음 주에 동문회가 열리는데 동기 모임에 나가서 그 친구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대접하렵니다. 교회가 이 땅에 왜 존재해야 합니까? 파이프 오르간을 통해 울려 퍼지는 수준 높은 종교 음악을 서비스 해주기에 필요합니까? 유명한 성악가 출신의 솔리스트들과 국내 유명한 음악대학 출신의 뮤직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수준 높은 성가대 음악이 교회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까? 교회만 나오면 오늘 시대의 최고의 강연을 말 주변이 좋은 목사를 통해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까? 교회에 나오면 나보다 훨씬 더 수준 높은 사람들과 그럴듯한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밖에 있으면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고사하고 항상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할 길이 별로 없는 데 교회에 나오면 무슨 님 하고 존경해 주고 대우해 주기 때문입니까? 가끔은 건강 강좌도 들을 수 있고 세상에서 살아갈 때 뒤 처지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에르 신부는 그의 걸작인 ‘단순한 기쁨’에서 신자는 둘 중에 하나에 속한다고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타인과 공감하는 자이든 홀로 만족하는 자이든” (p,75) 피에르 신부의 말 중에 전자가 되어야지 후자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조금 더 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저를 비롯한 신자들이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해야만 하는 진의를 왜곡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내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진의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나에게 안정성을 주는 장소이니까, 현대인의 삶을 충족해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하니까, 웰-빙을 주는 근거가 되기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 참 전도(顚倒)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성서적 왜곡이 일어납니까? 성서를 자기의 비위에 맞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성서로 해석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타인과 함께 공감하도록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분에 홀로 만족하도록 해석하는 극단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잘못 왜곡하여 해석하기 십상인 대표적인 본문입니다. 본론) 본문 33(a)-3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이 구절은 상당히 위험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더불어 교회사의 역사 속에서 아주 질 나쁘게 왜곡 해석된 실례가 가장 빈번했던 구절입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본문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수구적인 사람들의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여성 목사 안수를 강력하게 반대한 경우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여성들을 옥좨는 성서적 빌미였습니다. 해서 이런 상용 어구를 만들어 낼 정도였습니다. “어디 감히 치마 입은 여자가!” 얼마 전, 강지숙 전도사와 교회 사역 일로 상의할 게 있어서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이야기 중에 목사 안수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이 돌아왔습니다. “목사님, 지금 분위기로는 안수 이야기는 입도 뻥끗하지 못합니다.” 또 하나, 이제 와서 느낍니다. “세인 교회 강단에서 여성 교역자가 설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담임목사님의 배려였는지를.” 대체적으로 교회공동체에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해 별로 중요한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를 하면 성차별적인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제가 아는 아주 보수적인 지인 목사님은 여성들에게 안수를 준다고 해서 본인이 몸담았던 교단을 탈퇴하고 여성 목사 안수를 금지한 교단으로 옮긴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진 지인도 있습니다. 왜 교회 안에서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이 음으로 양으로 벌어집니까? 대표적인 근거는 앞에서 읽은 본문을 축자적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지체들에게 편지하는 글에 아주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다시 33-34절을 읽습니다.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또렷이 보이는 바울이 말한 강제성이 있는 으름장이 보이십니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이 구절에 대한 주석 중에 눈에 띠는 것은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에 대한 해석입니다. C.K 바레트 교수는 자신의 주석에서 율법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6절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바로 이 구절을 제시하면서 여자는 남편들의 말에 오직 복종할 것에 대한 요구와 동시에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는 종용까지 받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축자적이고 문자적인 본문 33-34절의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고린도전서 11:2-16절과의 모순 때문입니다. 이 구절이 어떤 구절이었습니까? 고린도전서 11:8-12절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혁명적인 선언과도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언급한 구절 앞에서 여성들에게 너울을 쓰지 않고 기도하거나 공중 예배에 참석하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주지했다시피 여기에서 바울이 여성에게 머리를 가리고 공중 예배에 나오라고 권한 것은 결코 여상 차별의 시도가 아니라 당시 고린도 성 안에서 자행되던 음란한 여성들의 육체적인 미를 자랑하는 방편이 긴 머리를 통하여 남자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관례가 된 고린도 안에서 심지어 이방 우상 신을 섬기던 여성 사제들 즉 창녀들 역시 긴 머리를 고의로 나타내 보이는 시기였기에 머리에 너울을 쓰라 한 것은 그리스도인 여성으로 그것들과 구별하라는 성별의 권면이었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에게 너울을 쓰라고 한 것은 성차별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바로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선포를 했음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이렇게 11장에서 남녀의 동등함을 선포한 바울이 본문 14장에서 말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선언은 11장과 어울리지 않기에 일체의 여성들 전부에게 말한 보편적인 선언이라고 보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상당히 여러 각도로 설명드릴 수 있겠지만 지면 관계상 약하고 결론적인 교훈을 함축하여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특정 계층의 특정 상황을 염두 한 선언이라는 해석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는 바울이 은연(隱然) 중에 은사라고 까지 강조한 독신 여성이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미혼 여성들입니다.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한 대상은 미혼 여성이 아니라 기혼 여성이라는 해석입니다. 왜 기혼 여성에게는 잠잠하라고 했을까? 그것은 주후 1세기 고린도 정황을 여실히 염두 하였기 때문입니다. 기혼 여성들은 예배 공동체에서 상당수가 집단화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은사 중심적인 신비주의자들이었고, 또 하나는 고린도 지역에 성황 했던 앞에서 잠시 언급한 이방적인 제의에 익숙했던 성적 자유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전자의 여성들은 교회에서 모이면 집단적으로 재잘거렸습니다. 제가 재잘거렸다고 폄훼하는 듯한 발언은 감정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34절에 기록된 한 단어 때문입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여기에 기록된 ‘말하는’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랄레오’는 ‘재잘거린다.’, ‘시끄럽게 소리를 치다.’는 뜻입니다. 기혼 여성들 중에 신비주의적인 은사주의에 빠진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집단화된 힘을 무기로 서슴지 않고 리더십에 재잘거리며 질문공세를 해댔습니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야 할 내용들을 공동체에 나온 다른 남성들에게 접근하여 질문을 해댔습니다. 다분히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고픈 저의가 있었던 행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두 종류의 집단 여성들을 향하여 재잘거리는 소리들을 중단하고 잠잠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 35절입니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② 후대 기록자들의 편집이기에 바울의 저작이라고 볼 수 없다는 해석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은 34-35절이 지금의 순서에 위치해 있지만 고대 사본들에는 34-35절이 40절 뒤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근거한 주장입니다. 왜 고대 사본들은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을까? 34-35절은 원래 바울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후 53-55년 사이에 기록된 원 서신서에는 이 구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라는 지역에 설립된 교회에 앞서 설명한 대로 여성들의 일탈과 성적 방종에 달하는 위험수위가 높아지자 바울을 따르던 후발 주자들이 주후 100년 즈음에 성급히 바울의 권위를 차용하여 바로 33절 다음에 34-35절을 삽입했다는 성서해석학적인 입장을 취한 것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우리들이 근접하여 나누어야 할 영적인 교훈을 찾아내 보기를 원합니다. ※ 저자가 성서를 기록한 진의를 왜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겠습니다.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저자의 텍스트(본문)와 콘텍스트(정황)의 의미를 나에게 불리하다고 유리하게 변질시키는 왜곡을 금지하라는 교훈입니다. 본문만을 전제하여 설명한다면 본문 텍스트의 콘텍스트(상황)가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자니까 여자에게 불리한 입장을 견지시켜 나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실례를 각설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성서적인 인용을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32:30-31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무슨 장면입니까? 40일 금식을 하며 시내 산에서 주님이 주신 십계명 돌판을 가지고 산에서 내려왔는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이미 하나님 신앙을 떠나 금송아지를 만들고 자기 멋대로의 신앙적 행태를 자행하는 난장을 형성하였습니다. 분노한 모세는 하나님의 분노로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금송아지를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런 뒤에 주동자 삼천 명을 처단하고 다시 시내 산으로 올라가면서 공동체에게 남긴 어록입니다. 이 구절을 음미하다가 참 가슴 아픈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다시 올라가 고난의 형극을 걷습니다. 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위하여’의 결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올라간 모세가 하나님께 고백한 첫 번째의 토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저는 모세의 이 기사를 접할 때마다 냉정하게 곱씹는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유리하게 풀려는 성서해석’이 무엇일까? 입니다. ‘자기를 위하여’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오늘 내가 섬기는 금신이요 금송아지라는 결론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위하여 성경을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성경 해석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 중심의 해석을 나를 위하여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서라는 전제를달았습니다. 이것이 성서의 진의를 왜곡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어지는 본문 36-37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바울이 서슬이 시퍼렇게 선언한 이 구절의 진의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특정 소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보편타당성을 근거로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등 신비적인 하나님의 은사를 보편타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하게 해석하는 무기로 삼지 말 것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재 강조하지만 말씀이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받으십시오. 은사에 대한 제한적인 지침이 나에게 별로 유익되지 않게 선포되면 그것은 나를 쳐서 복종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따르십시오. 말씀과 은사와 사역의 지침 등이 내 생각에 반하는 것으로 성경이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대로 돌아서십시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자꾸만 안정함과 편안함, 그리고 웰-빙의 차원으로 흐르면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그 길 위에 있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서는 뛰쳐나오는 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해석과 적용은 ‘나와 너를 위하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임을 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기도는 이런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그런데 이 기도와 동급의 기도가 있다고 저자는 밝힙니다. “하나님, 난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왜 이 기도가 동급입니까? 모두가 자기의 입장에 유리하게 적용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지체 여러분!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려면 그 기초는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서는 것 길 밖에는 없습니다. 언제나 성서는 나에게 거울입니다. 비추어 보십시다. 그리고 어그러져 있는 내 몰골이 보이면 다시 내 영적인 자세를 곧추 세우십시다. 그것은 성경을 나에게 유리하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는 해석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 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어디 있느뇨 내가 밤낮으로 눈물 흘리니 주여 어찌합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네 얼굴을 도우시는 네 하나님을 살아계시는 네 하나님을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