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2024-02-26 15:47
작성자 Level 10

4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신념이 아니라 신앙으로

본문다니엘 3:13-18

 

서론)

 

작년 서정수 집사 가정으로 심방을 갔습니다.

많이 말라 있었고머리는 다 빠져 몰골 자체도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았고무엇보다도 항암 치료의 후유증으로 상당히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이혜영 집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라는 도구로 그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이 집사가 다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밖으로 잠시 나갔을 때 서 집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그리고 목사님의 기도가 정말로 힘이 되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으로 인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그래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갈등합니다스스로 마감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 아닌가를며칠 전 눈에 보인 것이 있었습니다면도칼이었습니다순간 그 칼을 집어 들까 생각했습니다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왜냐하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들었던 풍월대로 내 몸이 하나님 성전이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성전을 내 스스로 허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92년에 목사안수를 받았으니 26년이라는 세월을 목사로 살았지만 서 집사 심방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런 상념에 젖었던 것이 생생합니다.

우리가 배워왔던 교리가 고통을 더 심화시키는 멍에는 아닌가?”

이렇게 말하니까 혹시나 교우들이 목사가 자살을 방조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색안경을 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을 거기까지 확산시키시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의 요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는 개념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을 주지시켜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언급한 대로 우리는 지난 수요일부터 구약성경의 목록 중에 가장 난해한 저작이자 동시에 문제작인 욥기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후에 다시 그 본문에 되면 접하겠지만 32:1-37:24절을 보면 아주 젊은 변론가인 엘리후가 등장하여 욥을 공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난은 선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지론입니다.

선한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욥이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기에 고난에 대하여 회피하지 말고 고난의 의미를 경청하라고 종용하기까지 합니다.

엘리후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십시다.

욥기 36:15절입니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정말로 그럴 듯 한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엘리후의 말에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CS 루이스의 말대로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고통의 문제홍성사 간,P,141)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옥한흠 목사가 고통에는 뜻이 있다에서 고통은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두란노간,P,8)이라는 말을 믿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다만 현장에서 30년을 함께 성도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사역을 체감한 목사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루이스나 옥한흠 목사의 말은 그냥 보편적인 이해이지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 발언이 아니라고 생각한 차이 때문입니다.

반면 이화여자대학교 신학대학에 조직신학 교수인 양명수 교수가 고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는데 도리어 저는 훨씬 더 공감했습니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 쪽에서 이해한 신학이 옳다한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어떤 큰 흐름에 이바지 한다고 해도고난은 역시 악이다.”(‘욥이 말하다’, 분도출판사 간, P,18)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목회 현장적인 접근 때문입니다.

로마서 12: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바로 이 점 때문에 저는 성도들이 아파하는 아픔을 미려한 수사어구를 동원하여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이해되지 않는 슬픔아픔고통 등이 닥치면 성도들과 함께 슬퍼하고아파하고같이 고통스러워하려고 했습니다.

여기에 무슨 신학적인 이론을 동원하여 일련의 고통들을 거룩하고 고귀한 가치로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목사로서 분명히 목회적인 차원에서 성도들과 함께 부대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 질문에서 제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자유롭지 못한 것과 더불어 영적으로 공허한 부분까지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만에 하나 앞에서 열거한 성도들에게 주어진 고통들에 대하여 함께 나누려고 했던 저의 행동들이 신앙이어야 하는데 혹시 신념이면 어떻게 하나의 의구심 말입니다.

일전에 우리 교우들에게 전했던 신앙과 신념 사이에서라는 목양칼럼을 기억하십니까?

설교 준비를 하다가 2017년 11월 18일 목양터 이야기 마당의 한 부분을 다시 발췌해 보았습니다.

“2016년 5월 28일에 서울 지하철 구의역 9-4번 승강장의 안전 문을 점검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한 하청업체 직원 김 군 사건이었습니다컵라면을 먹으면서 대학에 가기 위해 140만원의 월급 중에 100만원씩을 적금하며 살던 성실했던 한 청년의 죽음은 참 많은 아픔으로 저에게도 새겨져 있습니다사건 이후 김 군 어머니가 여론에다가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첫째아들에게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쳤는데 둘째 아들에게는 절대로 원칙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 군 어머니의 절규와 통곡을 가슴으로 이해했습니다너무나 귀했던 아들그리고 사랑했던 아들을 잃어버리고 앞세워야 했던 부모의 피멍울을 공감했기 때문입니다천박한 자본주의라는 괴물 앞에서 아들 스스로의 꿈을 꽃피우려던 노력이 물거품 되게 한 이 구조적인 악의 테두리 안에 있었던 어머니의 소리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김 군 어머니의 그 통분의 한()에 저도 동의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그런데 말입니다정말로 조심스러운 멘트이지만 김 군 어머니의 그 분과 한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철저히 이성적인 감성적인 차원이라는 전제 하에서입니다조금 더 외연을 확장한다면 지성적 성찰 안에서라는 전제입니다이 말을 직설적으로 감히 말한다면 목사가 가지고 있는 신앙적 스펙트럼으로는 그 분의 한 서린 결심에 동의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절대로 성실하게 살라고 그리고 원칙대로 살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

이 기막힌 절규에 저는 신앙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이유는 김 군 어머니의 이 외침은 신념이지 기독교 신앙적인 행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26년 동안 목사로 살면서 나름 고집을 꺾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려고 했던 목사로서의 마지노적인 생각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최선이라고 평가받는 신념이라도 그것을 주군이 원하시는 신앙으로 둔갑시키지 말자는 치열함이었습니다내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예수의 멱살을 붙잡고(에피티마오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겁박하던 베드로에게 사탄아 네 뒤로 물러서라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강력하게 선언하셨던 예수님의 비수의 의미는 주님의 뜻이 신앙의 내용이어야지 예수를 죽게 하지 않겠다는 베드로 개인의 신념이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흔들릴 수 없는 주님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질문하고자 하는 내적 싸움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신념이 신앙을 뛰어넘을 때 신앙이 신념을 통제해야 한다는 싸움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이 일을 했던 신앙의 선배들을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다니엘의 세 친구 이야기입니다.

제가 중고등부 학생 시절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를 할 때 곧잘 등장하던 연극 내용 중에 하나일 정도로 이 내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익숙하게 알려진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본문을 들춰보기를 원합니다.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 최강의 제국을 자랑하는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 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어떤 명령인데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풀무 불에 던져지는 죽음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본문의 풀무는 히브리어로 아툰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원래의 의미는 용광로의 의미입니다.

느부갓네살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용광로의 불 속에 던져져 불에 타 죽음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추상같은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항거한 세 사람의 신앙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니엘의 신실한 신앙의 친구들이었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서 도저히 우상 앞에 절 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우상숭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세 친구는 자신들의 운명이 죽음으로까지 몰리는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당하게 될 죽음은 분명히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젊은이로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찾아오다니 참으로 한이 서릴 일이었습니다.

막상 명령을 내린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벨론을 위해 정치적으로 큰 인재들이었기에 아끼면서 키워왔지만 법을 어기는 그들이었기에 먼저는 회유를 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웬만하면 죽음을 볼모로 이야기하는 느부갓네살의 타협을 못이기는 척하면서 들을 수도 있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조금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조금도 불평함이나 억울함이나요동함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고백한 그 유명한 선언이 16-1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결국 이들의 신앙적인 결단과 쾌거가 어떤 결과를 냈습니까?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극한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받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본문 해석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물론 이 구절을 곱씹으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가지고 있는 참 아름다운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들이 생각 없이 지나칠 수 있는 면이 또한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전제로 그 하나님께서 그를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는 17절의 명제는 역으로 접근하면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신앙이 없는 자들도 그 무언가 긍정적인 신념으로 살아갈 때나에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닐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조금 풀어 말한다면 신념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18절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신념이라는 가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자라도는 신념의 차원으로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 차원은 반드시 신앙의 차원으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풀무라는 용광로에 들어가서 뼈가 순식간의 녹아지고 삭아지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왕에게 절하지 않겠다는 것은 신념이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 나에게 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높여줌이 아니라 낮아짐입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 항상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 나에게 주시는 것이 건강함이 아니라 병듦입니다.

내가 믿는 주군이 나에게 강제하시는 것이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복이 아니라 매일 썩어지는 밀알 되기입니다.

만에 하나 이렇다면 여러분은 이것을 신앙의 차원 말고 다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신념으로 이해하고 승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 강조하지만 이 정도의 영역은 신앙으로만 말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며 해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신념을 뛰어넘어서야만 이것은 이해할 수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으로 신념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과연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환경에 따라 정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 그레이스 장로교회 담임목사인 브라이언 채플이 불의한 시대순결한 정의에서 너무 기가 막힌 정의를 남겨놓았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이란 원하는 결과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우리의 믿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믿음은 신념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다.”(pp,94-95)

브라이언 채플의 이 명쾌한 갈파는 제 마음을 심심하게 위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서정수 집사의 발병 소식 이후 지난 1년 7개월 동안 단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그를 위해 전화로 그를 위로하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마다 기도 시간에 엎드리면 그의 기도는 제 기도의 목록 중에 올라 있었습니다.

어제 서정수 집사의 별세 소식을 듣고 한 10여 분 정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최정희집사의 별세의 충격이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서정수 집사를 또 부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에 질문에 대한 목마름이 여기 계신 분 중에 저 보다 큰 분이 정말로 있으십니까?

아마도 없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난 1년 7개월 동안 서 집사를 위해 기도했던 제목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번에는 하나님이 져 주십시오야곱에게 져 주신 전례가 있지 않으십니까하나님이번에는 제발 져주십시오.”

제 기도가 욕심이 있는 기도였습니까?

야고보서 기자가 말한 대로 제 기도가 저의 정욕을 위한 기도였습니까?

진정성 있게 선포하지만 정말로 그렇지 않은 기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도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저는 또 패배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하나님께 대들 수 있습니다.

약속 믿고 기도했고당신이 위임하신 양을 살리기 위해 기도한 것이 무엇이 그리 들어주지 못하실 내용이었냐고 삿대질하며 하나님께 대들 수 있습니다.

신학교 2학년 시절점심 식사 식권이 없어 굶식을 할 수 밖에 없는 비참함을 이끌고 성주산 기도처에 올라가 하나님께 호기 어린 심정으로 대들었던 기억이 저에게는 생생히 있습니다.

하나님나를 신학대학으로 편입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지 않습니까그런데 이제 그렇게 부른 저에게 먹을 양식을 주지 않아 굶게 하십니까하나님참 좋으시겠습니다택하신 주의 종 후보생 굶게 하시니 말입니다근데 한 가지만 물읍시다하나님살아계시나 한 것이 맞습니까?”

혈기 충만하여 하나님께 삿대질 하며 대들던 신학교 2학년 시절그 기도의 산 성주산에서 저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조명하신 음성을 전율하며 들었습니다.

아들아난 너를 위해 죽기까지 했는데 나 위해 굶는다고 대드는가굶는 고통을 알아야 맡길 양들의 굶주림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니네 은혜가 족하다.”

그때 성주산에 울었던 기억은 아마도 제 평생에 울었던 눈물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서정수집사의 부음을 듣고 정말로 아팠지만 하나님께 대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신념을 신앙으로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결과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이 아니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나의 믿음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믿음은 신념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