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60번째 강해) 제목: 사랑은? (2) 본문: 고린도전서 13:4-7 서론) 얼마 전, JTBC 뉴스 룸 초대석에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은 싱어 송 라이터인 아이유 씨가 나와 앵커와 대담한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가 쓴 쓰고 노래하고 뮤직 비디오까지 만든 그래서 소위 말하는 프로듀싱까지 한 팔레트라는 음반이 대중들의 인기를 얻어 골든 디스크 상을 받는 성과를 이루어 그 프로그램에 초청된 것이었습니다. 손석희 앵커가 대화중에 이렇게 아이유 양에게 물었습니다. “이번에 상을 탄 프로듀싱까지 한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있습니까?” “이번 프로듀싱 한 작품의 주제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아이유라는 가수의 이 답변을 듣다가 그녀의 말이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사람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불과 26세인 아이유 양이 이렇게 답변한 것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회를 가져보았습니다. “아이유라는 이 친구, 참 괜찮은 가수였네!” 인간의 역사는 사랑의 거대한 담론이라는 해석의 틀 안에 들어가 있는 러브 스토리입니다. 아마도 이 거대한 테두리를 벗어난 사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을 둣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 이야기라는 인간의 역사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구도는 인간이 신을 사랑한 구도입니다. 그런데 유독이 우리 기독교의 이야기는 그 반대입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쓴 편지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로마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더 없이 알맞은 때에 오셔서 이런 일을 이루십니다. 그 분은 우리가 다 준비되기까지 기다리지 않으셨고, 지금도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너무 약하고 반항적이어서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그 때에 그 분은 자기 자신을 이 희생적 죽음에 내어 주셨습니다. 설령, 우리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갈팡질팡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죽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선하고 고귀한 사람을 보면 우리 안에 그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께 아무 쓸모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유진 피터슨의 8절 번역이 너무 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분께 아무 쓸모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아닙니까? 그래서 김기석 목사는 ‘오래된 새 길’에서 이렇게 갈파했는데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픈 어느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그 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삶이다.”(p,237)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파한 날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산고의 고통을 이기고 저와 여러분을 낳으신 것처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산고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 예수께서 미리 보여주신 사랑의 정의를 두 가지로 살폈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했습니다. 둘째, 사랑은 친절한 것 즉 배려하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또 다른 사랑의 정의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3) 사랑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 개정판은 분명히 ‘시기하지 아니하며’ 라고 번역했는데 전에 보던 개역 판 버전에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아니하며’ 라고 번역된 이유는 헬라어 부정사 ‘운’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정의하는 동사 자체는 사실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동사가 아니라 긍정의 동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살피려고 하는 ‘시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젤로오’가 바로 그렇습니다. 혹자는 이 단어를 문자 그대로 ‘시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젤로오’는 대단히 긍정적인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이 동사의 문자적인 뜻은 ‘열망(熱望)하다’ 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열망하다는 말이 한자적인 풀이로 말하면 어떤 의미입니까? 열정적으로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는 것입니다. 간혹 이 단어는 ‘질투하다’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질투가 무엇입니까? 나쁜 뜻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질투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가장 상식적인 감정선(感情線)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내 산 강화의 압권인 십계명 수여 장면을 떠올려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수(親手)로 쓰시면서 만들어주신 두 번째 돌 판에 새긴 글을 곱씹어 보십시다. 출애굽기 34:14절입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여기에 번역된 ‘질투’라는 히브리어 ‘카나’를 헬라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성경 70인 역에서 ‘젤로오’라는 동사로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젤로오’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시기하지 않는다고 번역된 이 단어를 저는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라고. 그렇습니다. 사랑하기란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한 예로 들어보십시다. 누가복음 10:3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사회 문화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은 남 유다가 중심이 된 이스라엘 사람을 좋아할 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한 당연한 분깃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10:33절은 조금은 의아합니다. 생뚱맞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혀 상식적인 않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불쌍히 여긴 것입니다. 이 단어가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설명한 ‘스프랑클니조마이’입니다. 가장 많이 번역된 우리나라 말은 ‘불쌍히 여기다.’ 혹은 ‘민망이 여기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장을 끊어지는 듯한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해서 이 단어의 의역은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간절히 열망하다’의 뜻으로 대단히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유대인이 다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열망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시간과 물질을 그를 위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는 시간의 헌신을 강도 만난 자를 위해 행한 것입니다. 주막 주인에게 2 데나리온을 건네면서 이 사람을 돌보라고 했습니다. 혹시 비용이 더 들면 다시 돌아와서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대상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진정성을 갖고 바라고 열망하는 삶입니다. 간절히 소망하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것, 물질까지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지난 주간 동기 모임을 가졌을 때 영화 ‘1987’ 을 관람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1987년은 제가 대학을 졸업한 해입니다. 지금 생각을 해도 참 암담했던 해였습니다. 국가적으로는 6,29 선언이 있었던 해입니다. 그 해 이한열이라는 연세대학교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박종철이라는 서울대학교 학생이 물고문으로 사망을 했고, 그것을 은폐하려는 국가 권력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나라를 공포의 나라로 만들어 정권을 연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나라답지 못한 나라를 참다못해 야당이 일어선 것도 아니고, 일부 정치권력을 잡으려는 반대편의 사람들이 일어선 것도 아니라 그 해에는 국민들이 일어섰습니다. 넥타이 부대인 국민이 일어섰습니다. 유모차를 밀던 엄마들도 일어섰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경찰 곤봉으로 매 맞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싸운 결과 민주화의 초석인 6,29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왜 국민이 일어섰을까요? 그것은 내 땅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국가권력에 의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란 사랑하기 위한 일체의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이유로 이렇게 힘주어 말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즉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들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합니다. 4)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자랑하다’는 헬라어 ‘페펠류에타이’의 번역입니다. 톰 라이트 교수는 이 단어를 ‘우쭐대다’로 번역했고 유진 피터슨은 ‘뽐내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자극적인 단어를 여기에 기록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은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했다시피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의 천국이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은사 소유자인 양 자랑하고 뽐내며 우쭐댔습니다. 우리들이 이미 살핀 또 다른 은사를 받은 자들도 거기에 뒤질 세 본인들이 받은 은사에 대하여 견고한 진을 형성했습니다. 해서 다른 은사들을 인정하거나 같은 차원으로 용인한 것이 이날 항상 저급한 은사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은사로 매도하는 어처구니없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행동을 자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행태들에 대해 바울은 쐐기를 박은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은사인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거나 우쭐대거나 뽐내지 않는 것임을 천명함으로 은사 독점주의에 빠져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일부 그릇된 자들에 대해 분명한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기란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된 본문을 오늘의 언어로 어떻게 대치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기란 상대평가하지 않기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학교를 다니면서 정말로 힘들었던 것은 학교 당국에서 행하는 상대 평가제도였습니다. 저는 태생적으로 이과적인 인간이 아니라 문과적인 성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시 읽기를 좋아했고, 소설이나 평론집을 읽을 때는 밤을 새웠던 적이 많습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좋아했고, 글쓰기도 저의 장점 중에 하나였습니다. 허나 계산하고, 수리를 연구하고, 물리학적인 탐구를 하는 것은 전혀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공계열 공부는 아주 형편이 없었던 반면, 문과 계열의 성적은 학교 전체에서 상위에 랭크될 정도로 우수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는 다 잘 하기를 요구합니다. 세상에 이런 폭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의 성향은 그만큼 존중해주어야 할 가치인데 존중받지 못한 시절이 학창시절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서구 선진국의 교육 평가는 상대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을 중심으로 성적을 매깁니다. 반면 상대 평가는 사람만이가지고 있는 특수한 성향과 기질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입니다. 사람에 따라 기계적으로 훈련 받고 모두를 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에서 잘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시기를 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성장한 사람은 사람을 철저하게 상대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100%이기 때문입니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금언 중에 하나입니다. 부정의 의미가 아닌 긍정의 의미로 말입니다. 가끔 하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전도서 기자인 코헬렛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전도서 1:10절을 읽어보십시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세속적 가치에 있어서 우쭐 댈 수 있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새것이라고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치로 평가하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글을 통해 전도서 기자가 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기고만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 제천 연합회 소속 목회자들이 함께 글을 읽고 나누는 독서모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제천에 있는 목사님들은 저보다 모두가 연배에 있어서 아래에 있는 분들입니다, 동시에 목회 경력 역시 저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경력을 갖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첫 번째 독서 모임을 통해 참으로 귀중한 것을 배웠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을 알려주는 신선한 통찰들이었습니다. 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목사는 위아래를 막론하고 무조건 만나는 사람마다 배워야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겸손의 도는 죽을 때가 동행해야 하는 친구입니다. 어디 이것이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성도는 누군가를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설익은 존재임을 알려주는 주님의 메시지임을 경성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기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은사가 우리 교우들에게 많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시대의 스승이었던 고 신영복 선생이 쓰신 ‘나무야 나무야’라는 수필집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나는 문득 당신이 진정 사랑하는 것이 소나무가 아니라 소나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p,26) 선생의 글을 가슴 폭에 담아 둔 것은 행복이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사람인 것이 맞습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려면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소망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자를 절대로 상대적인 평가하며 내 잣대로 가늠질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 4절 후반절에서 바울이 선언한 사랑의 정의는 백 번 옳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심오한 진리 깨달은 자도/울리는 징과 같네/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그 때는 주를 맞대고 보리/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듯/우리도 주를 알리/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그 무슨 소용 있나/사랑 없이는 소용이 없고/아무것도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