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화요일 묵상 ‘나’인가, ‘주님’인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50편, 시편 142편, 스가랴 7:1-14, 하박국 3;1-16, 유다서 1:5-12 꽃물 (말씀 새기기) 스가랴 7:3-6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오월 중에 울며 근신하리이까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 마중물 (말씀 묵상) 제 2성전 완공을 2년 여 앞둔 포로 귀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한 참 건설 중에 있던 성전으로 찾아와 제 2성전을 돌보고 있었던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당돌하게 질문했다. 5월에 행하는 금식을 지속해야 하는지를. 질문에 대해 신탁을 받은 예언자 스가랴가 하나님의 마음을 직격하며 전한다. 나를 위해, 너희들을 위해 했니? 금식이 화두였지만 금식은 비본질적인 화두였고, 정말 중요한 화두는 ‘나’(하나님)하고 ‘너(’포로 귀환공동체), 어떤 것이 중요한가를 되물으신 메시지를 오늘 만나면서 참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작년에 의미 있게 만난 오클라호마 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챨스 킴볼의 말이 새록 떠오른다. “목적이 모든 수단을 정당화할 때 종교는 악의 세력이 된다.” 목적은 그 목적 자체가 선해야지 수단을 동원하여 선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목적일 수 없다는 말로 나는 읽었다. 하나님은 수단을 이용하신 적이 없는데, 하나님은 수단이 필요하신 분이 아닌데, 내가 하나님을 수단이 필요한 존재로 급전직하 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수단으로 내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 한다. 세상에 이런 불경이 또 어디 있으랴! 하나님은 그 존재 자체가 스스로 완전한 분이신데, 어느 새 그 완전하신 하나님이 내 마음 차지 않는 존재로 변질되어 ‘나’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있는 게 오늘 우리들이 처한 영적 기상도다. 그래서 그런지 스가랴를 통해 직설하시는 주군의 음성은 서늘하다. 두레박 (질문) 나인가? 하나님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나인가? 하나님인가? 폼 잡지 않고 답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나님을 가공한 하나님을 만들고 있는 일체의 유혹과 싸우는 하루를 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목사로 살면서 대세를 밀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참담함이 제게 있습니다. 예언자적인 음성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야 하는 시대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아마샤와 아모스의 한 판 대결에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예언을 전했는데 종은 자꾸만 세속적 대세가 21세기의 벧엘이라는 공룡이기에 이 괴물에게 밀리는 것 같아 참담합니다. 주여, 어찌해야 합니까? 오늘은 중보의 응답이 아니라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용산 참사에 대해 목사가 가져야 할 영적으로 균형 잡힌 자세를 알려주십시오. 견디기가 너무 힘듭니다. 주님, ‘나’가 아니라 ‘주님’의 생각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