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6번째 강해) 제목: 기초 체력이 있으십니까? (2) 본문: 고린도전서 16:13-14 서론) “쉬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오늘 본문 14절을 유진 피터슨이 번역한 ‘메시지’의 내용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지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은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제가 그 지인에게 해준 말이 기억에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절의 의미는 매 시간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의미가 너무 싱겁습니까? 그러나 저는 제가 한 말에 대하여 지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말은 주님과 소통하며 교제하는 심령으로 매 순간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도 해석하면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읽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유진의 말대로 이 구절의 진정성이 있는 의미는 쉬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여기도 ‘쉬지 말고’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속뜻은 분명히 사랑하는 삶을 매 시간 살아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내라는 영역입니다. 바울이 이 부분에서 무시무시한 내용을 선포한 느낌이 드는 형용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모든’입니다. 영어성경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NIV 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Do everything in love.” ‘모든 것’ 즉 ‘everything’ 에서 예외 되는 영역은 없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본문 구절대로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본문에서 분명히 일부분의 영역에서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하지 않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명령했다는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된 압박감이 너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설교자로서 문제를 제기해보기로 했습니다. 바울이 단 한 구석의 예외 없이 모든 영역에서 완벽하게 사랑을 행하며 살라는 의미가 예외 없이 사랑하는 삶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살아내고 있는지를 감시하겠다는 그런 압박의 표현일까?의 문제 제기 말입니다. 물론 설교자가 판단하는 결론은 ‘아니다’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의미는 어떤 교훈을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그리고 외연을 확장하여 우리들에게 주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고린도전서 86번째의 설교 테마 입니다. 본문)
※ 영적 기초 체력을 지탱해 주는 공급원이 사랑하기(loving)라는 가르침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 이어 오늘 본문은 당연히 연결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힘을 내서 용감하게 신앙의 복판에 서라고 했습니다. 동시에 주님이 너희 고린도교회를 세우기 위해 흘리신 십자가 사건을 기초에 세우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압권은 이 십자가의 도라는 신앙의 견고함에 서려면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기초 체력들임을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이어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영적인 쐐기를 박는 듯한 선언을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이 구절을 접한 저는 강력한 파도가 엄습하는 것과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는 이 구절을 강해할 때 이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방언과 예언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에서 사용될 터인데 이 모든 은사들의 활용 이유는 공동체가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 전제라는 교훈을 말입니다. 이 말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핵심적 가치는 은사도 아니요, 예언도 아니요, 자랑할 만한 믿음도 아니요, 그 기초가 ‘사랑하기’ 라는 것을 알려준 가르침이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렇게 접근해 보겠습니다. “용감한 신앙생활의 근저에는 반드시 사랑하기가 있어야 한다. 힘을 내는 신앙생활의 근저에는 반드시 사랑하기가 있어야 한다. 십자가의 도라는 그 믿음 위에 굳게 서려면 사랑하기가 그 밑에 깔려 있어야 한다.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려면 그 근저에 사랑하기가 있어야 한다.” 이런 성서해석으로 접근하면 앞에서 언급한 고린도점서 13:1-3절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 구절이 이런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Without loving is nothing.)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지난 주일에 이어 2주에 걸쳐 나누는 본문 강해의 최종적인 결론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영적 기초 체력을 유지하게 하는 압권은 바로 사랑하기다.” 베드로전서 4:8절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구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이 기막힌 선언을 누가 했습니까? 베드로가 했습니다. 답을 베드로라고 말하면서 이런 유추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 말을 베드로가 한 것이 맞습니까? 베드로를 가리켜 많은 상담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기질이 다혈질적인 성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주님의 공생애를 통해 본 베드로는 정말로 모남이 두드러진 허점투성이의 사람이었음을 압니다. 주님으로 칭찬과 야단을 동시에 맞은 별로 깊이 성찰하거나 사색하는 것과는 담 쌓은 인물이었습니다. 같이 한 제자들과 별로 달갑지 않은 동료 의식을 가진 자였습니다. 동료들과 트러블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누구보다도 앞서기를 좋아했던 세속적인 마인드가 있었던 자였습니다. 제사장 가야바의 종이었던 말고의 귀를 칼로 치며 폭력을 썼던 시기는 주님과의 공생애 3년 말미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난 3년 동안 주님으로부터 양육과 훈련을 받은 이후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부인할 때 너무나 단호하게 부인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인격적인 매우 모질었던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주후 64년 경, 로마와 마케도니아 지역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자기의 편지에서 선언합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말이 됩니까? 이 말을 베드로가 했다고 믿으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리 쉽게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베드로의 순교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베드로가 이런 사람으로 급 발전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물론 하기 쉬운 말로 그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체험이라는 말로 베드로의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2%가 부족해 보입니다. 목회를 30년 하면서 느끼는 목사의 솔직한 심정은 이렇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뒤에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젓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어도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입니다. 베드로, 성령을 받았어도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증인입니다. 고넬료의 초청을 받기 전, 욥바에 거주하던 베드로가 본 환상을 기억하십니까? 보자기에 싸인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세 번이나 거절한 사건 말입니다. 기질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베드로전서에 기록된 베드로의 성품 변화로 보이는 이 구절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베드로의 이 고백을 접하면서 저를 눈물짓게 한 성서적 조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그 사랑하기를 베드로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도망한 뒤에 갈릴리 디베랴에서 고기를 잡으며 옛 생활로 돌아간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베랴로 다시 찾아오신 주님은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가셔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적을 맛본 제자들은 이후 부활의 주님과 육지에 올라와 어색한 재회를 경험합니다. 불과 얼마 전 나는 맹세하며 저주하노니 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장소에 있었던 요한, 야고보, 추측할 수 있는 안드레, 빌립 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고 있는 그들은 그 누구도 주님의 책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죄책감에 빠져 있는 제자들과 함께 계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 하셨습니다. 아침 조반을 함께 나누신 주님은 천천히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15절을 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당신께서 직접 지어주신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베드로의 옛 이름으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은 천금만금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직접 자신에게 지어주신 이름을 놔두고 옛 이름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베드로는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주님이 기억하고 계시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뜻밖의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지은 죄를 추궁하지 않으시고 제일 먼저 선언하신 선포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사랑은 현재 진행형인데 너 역시 현재진행형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두 번째의 미션을 주시면서 용서는 물론, 베드로를 재신임하는 사랑의 도장을 찍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이 위대한 사랑해 주심을 체험한 행운아였습니다. 이 사랑받음을 체험한 베드로는 이 체험 이후인 약 30년 뒤에 그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하기에 앞서 같은 고난을 당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잠언 10: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이것을 체험했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금 핍박을 가하고 있는 폭력적인 집단을 향하여 이 사랑으로 극복하고 승리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플의 창설자 스티브 잡스는 미국의 명문대학인 스탠포드 졸업식의 연설자로 초청되었습니다.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가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훈화를 하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그 연설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최고의 연설을 합니다. 그는 자기의 출생, 성장과정, 대학 중퇴의 이유, 초기 애플사에서 쫓겨 난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과정을 겪은 뒤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최고 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군더더기 없는 대단한 명문으로 연설을 마칩니다. 그가 앞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활동을 할 스탠포드의 졸업생들에게 연설 후반부분에 이런 명연설을 남깁니다. “여러분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낭비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직관과 심장의 소리를 따르는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적어도 저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말을 말미에 이렇게 남겨 놓았습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행운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듣다가 소름이 끼쳤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사랑한 것’ 이것이 스티브잡스를 아인슈타인 박사 이후 전 세계를 IT 라는 도구로 또 한 번 뒤집어 놓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한 이유였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이런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제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티브 잡스의 말을 이렇게 패러디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내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천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사랑하는 일을 사랑하십시오.” 왜? 사랑하기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기초 체력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85번째의 고린도전서 강해를 지난 주일까지의 사역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공부하면서 알게 된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제반적인 일체의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인 대안들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그냥 권위만을 가지고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윽박지르지 않고 분명한 신학적 성찰을 통한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놀랍습니다. 바울은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일체의 지성을 수단삼아 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을 경주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지성도, 이성도, 철학도, 지혜도 아닌 사랑하기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기는 은사의 최고일 뿐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적 기초 체력의 최고봉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다시 음미하고 찬양한 뒤에 기도하겠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찬양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이 고요한 시간 주님의 보좌 앞에 내 마음을 쏟네 모든 것 아시는 주님께 감출 것 없네 내 맘과 정성 다해 주 바라나이다 나 염려하잖아도 내 쓸 것 아시니 나 오직 주의 얼굴 구하게 하소서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날마다 순종하며 주 따르오리다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온 맘 다해 주 알기 원하네 내 모든 삶 당신 것이니 주 만 섬기리 온 맘 다해 주 만 섬기리 온 맘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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