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기초 체력이 있으십니까? (1)
본문: 고린도전서 16:13-14
서론)
“어떤 농부가 말을 했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면서 조심하는 것 여럿 있는데 그중에 제일은 지렁이를 다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생태농(生態農)에서 가장 큰 일꾼이 지렁이이기 때문입니다.”(P,120)
송정림 작가가 쓴 ‘사랑하는 이의 부탁’에 나오는 글입니다.
송 작가가 이 글을 소개한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각할 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에 대해서 확인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적어도 작가에는 ‘기초’였습니다.
우리는 걸음의 보폭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기초에 대해 무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어느 환경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면 초심을 잃을 때가 많습니다.
해서 기초에 대한 중요성에서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테크닠으로 내 삶을 영위하려고 하는 영악함에 빠져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경 한 구절을 깊이 나누겠습니다.
사무엘상 17:20절입니다.
“다윗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양을 양 지키는 자에게 맡기고 이새가 명령한 대로 가지고 가서 진영에 이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치며”
이 구절의 배경을 잠시 논하겠습니다.
이새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자 8명의 아들들 중에서 건장한 세 아들들을 전쟁에 내 보냅니다.
엘리압, 아비나답, 삼마였습니다.
전쟁이 치열한 것을 알았던 아버지 이새는 아들들의 안부가 염려되어 막내였던 다윗에게 치즈 10덩이를 싸서 당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천부장에게 갖다가 주라 명한 뒤, 형들의 안부를 알아가지고 오라는 하명을 내립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막내 다윗이 이윽고 행한 행동이 조금 전에 읽어드린 삼상 17:20절입니다.
다윗의 반응입니다.
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는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양들에게 매일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일들을 직접해야했기 때문입니다.
② 가장 기본적인 자신의 책임을 행한 뒤에 자신의 부재 기간 동안 양들을 지켜야 할 위탁자에게 양들을 맡겼습니다.
③ 그런 뒤에 전쟁터로 출발했습니다.
바로 이 다윗의 반응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받습니다.
어떤 이들 중에는 큰일을 부여받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일에 대하여 무관심 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많은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떠나는 날, 다윗은 본인이 해야 하는 일과 맡겨야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결코 한눈을 팔지 않고 그 일을 꼼꼼히 실천했다는 말입니다.
①과 ②는 다윗의 기초였습니다.
③은 ①②가 선행 된 뒤에 선택해야하는 일이었는데 다윗은 이 순서를 기가 막히게 지켰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을 선택하다가 단 두 구절이지만 더 이상 본문을 넓히지 말자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에게 영적 기초 체력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지난주까지 84주에 걸쳐 치열하게 살펴왔습니다.
그리고 씨름해왔습니다.
제가 ‘치열’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동의하는 분은 지난 84주 동안 담임목사와 함께 본문 여행을 한 끝에 다가오는 자의 신앙적 공통 단어일 것입니다.
얼마나 고린도교회가 만만치 않은 교회였는지 동의하는 분들은 치열이라는 단어를 수긍할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오늘 한국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일체의 문제점을 미리 경험한 선배 교회가 고린도교회라고 말을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성, 영성, 그리고 감성까지 포함하여 고린도교회를 치료하기 위한 최선을 다했음을 우리는 84주 동안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보고 있는 16장에서 그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편지를 마감해도 정말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의 짧은 두 구절이지만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 듯한 영적 권고를 선언합니다.
본론)
본문 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저는 이 구절을 마디마디로 읽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연결해서 읽었습니다.
그것도 거꾸로 말입니다.
이렇게.
남자답게 강건하려면 믿음에 굳게 서야 하며 또 그러려면 깨어 있어야 한다고.
주목하십시다.
13절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점을.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바울이 권고 겸 명령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1) 남자답게 강건하여야 한다.
본문은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원어성경에는 이 번역은 두 단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해서 원어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안드리제스테’ 즉 ‘용감하라’와 ‘크라타이우스테’ 즉 ‘힘을 내라’는 단어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용감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용감하라고 권하고, 힘을 내라고 말한 대상이 누구일까? 에 대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깊이 상고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편지의 말미에 이 선언을 한 것은 대다수의 가장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경주를 감당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었을 것입니다.
15장까지의 강해를 통해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자들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 의해 신앙의 경주를 경주함에 있어서 많은 피해를 보고 있던 가장 상식적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런 권면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주변에 이상한 신자들이 너희들을 이상한 논리나 궤변이라 교리를 가지고 흔들어도 상심하지 말고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감당하라는 것이었고, 힘을 내라는 위로였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렇게 용감하게 힘을 내서 신앙의 경주를 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두 번째의 영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2)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13절을 다시 읽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중반절에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뒤죽박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논리가 있었던 사람이고 동시에 무엇이 먼저인지를 확실히 캐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냥 용감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그냥 힘을 낼 수 없습니다.
힘을 낼 수 있는 전제 조건, 용감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함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위에 설 때라는 전제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세밀히 본문에 접근하겠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믿음에 굳게 서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원어에 있는 단어 하나를 생략한 번역입니다.
바로 정관사 ‘호’입니다.
원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 위에 서서’ 라고.
정관사 하나가 무엇이 그리 중요합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정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굳게 서야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믿음이었습니까?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84번에 걸쳐서 살폈던 바울이 말한 그 믿음입니다.
84번에 걸쳐 선언한 그 믿음을 다시 이 한 시간에 열거하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84번에 걸쳐 바울이 강력하게 선언한 그 믿음을 대변하는 고린도전서 한 구절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
고린도전서 1:18절을 읽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가장 상식의 선으로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그 믿음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도’
이것을 인지하십니까?
성도의 기초 체력이 바로 십자가의 도임을.
이것이 흔들리면 성도는 전부가 흔들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2절에서 이렇게 더불어 역설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세속의 사람들은 이런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공격할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배타주의자”
지난 주간에 몇 달 전에 읽은 사회역학(사회역학이란 그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들을 해독하는 학문이다.) 전공자인 김승섭 교수가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 간, 2018년)에 관한 서평을 써서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접하면서 김 교수가 말하고자 한 상당수의 의견에 진정성을 갖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리고 제 글에 담았습니다.
“사회적인 구조와 정치역학적인 차원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는 자, 차별을 당하는 자, 사회의 乙들, 가난하여 속수무책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자 등등으로 말이다. 저자가 표한 자들은 소위 말하는 ‘소수자’ (the minority) 들로 정의된다. 김승섭이 이렇게 이 시대의 잉여를 논한 것은 본인이 전공한 사회역학(social Epidemiology)적인 구도로 이 단어를 풀어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필자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저자의 일갈에 대하여 동의하고 지지하는 나를 발견했다.” (서평 중에서)
한 명의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지식인의 토로를 응원하는 저의 진정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응원을 한 반면, 그가 말하고 있는 여타 다른 주장 중에 제가 동의할 수 없는 글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평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근래 뜨거운 감자로 화두에 올라 있는 동성애 관련의 담론이었습니다.
저자는 동성애 관련 소수자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하는 학자이기에 동성애자들을 반드시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의 글 중에 눈에 거슬린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일부 동성애를 반대하는 부류들 즉 기독교계일 텐데 그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가 동성애는 에이즈를 옮기는 원인이라고 제기한 부분이었습니다.
더불어 동성애에 관한 그의 지론 중에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의 이런 행태들은 무식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동성애자들을 위한 차별 금지법은 반드시 통과시켜야할 지식인들의 의무임을 강조했습니다.
서평을 쓰면서 이런 식의 그의 주장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론했습니다.
“만에 하나 한국사회가 저자의 말대로 과학적인 사실을 근거하지도 않으면서 동성애를 위에서 언급한 질병 유발의 원인으로 지적했다면 필자는 저자의 주장에 대하여 손들어 주고 싶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필자가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저자처럼 사회역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과학적이지도 않은 것을 덧씌워 반대하는 자들이 동성애를 무조건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주장하는 일갈에 대하여 필자는 상당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들을 이야기와 상식적인 선에 해당되는 신학적 담론들이 그들에게 많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추(錘)에 있어서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자나 목회자가 설파한 동성애에 대한 담론들이 필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극단적 보수 성향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내던지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차원에서 공격하는 동성애에 대한 담론도 필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동성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너무 자연과학적인 사이언스의 개념으로 몰고 가는 경향이 짙은 진보적 해석 역시 필자는 수긍하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사이언스의 영역에서 본 동성애 담론을 반대하는 자들을 무지한 자라는 편견으로 몰고 가는 것을 보면서 종교적인 이해를 무시한 심지어는 깔보는 듯한 인상이 깊어 아팠고 유감천만이었다. 이왕 언급했으니 조금은 과격하게 말하자. 저자의 동성애자들을 향한 지지 성향의 발언들은 또 다른 한편의 스펙트럼으로 비추면 동성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대자들에게 휘두르는 폭력으로 필자에게는 비쳐졌기에 저자의 해석이 대단히 유감스러웠다. 저자가 동성애자들을 보호하려는 의도에 대하여 그것이 사회역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정도라고 믿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저자의 동성애 진단은 필자와 같이 성서가 말하는 밑힘에 기초를 두고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적인 목소리에 귀를 닫고 있는 듯한 인상이 강하게 여겨져 불편했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품으셨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인정하였기 때문에 품으신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은 그들을 품을 수밖에 사랑이 본질이신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혹자의 이야기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믿기에, 그는 반드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에 그 분이 원하시지 않는 것을 방종하며 자행하는 것이야 말로 본말전도를 용인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싶다.” (서평 중에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영적 상태는 단순히 교회가 그 동안 걸어왔던 우리들만의 리그, 이타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교회의 성장 논리로 인해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돌아서라는 충고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저는 적지 않게 당황스럽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던 줗 1세기 중엽이나 혹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나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포인트는 교회가 생명 걸고 지켜야 하는 십자가의 도, 원색의 복음, 갈릴리에서 사셨지만 결코 갈릴리 백성들에게 정치적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그리스도가 바로 나임을 외쳤던 복음의 보폭입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공격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이 영적 기초 체력마저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경악합니다.
성도가 가져야할 영적 기초 체력이 무엇입니까?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사수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아닌 십자가 같은 유사 예수에 붙들릴 때 우리들의 영적 기초 체력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여러분의 심비에 밑줄 긋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영적 기초 체력의 근원을 소개합니다.
용감하게 신앙의 경주를 하며, 힘을 내 달려가며, 십자가의 도라는 원색의 복음에 굳게 서려면 성도들이 꼭 이루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3)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 전반절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깨어 있으라”
‘그레고레이테’라는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신중하게 경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군에서 복무한 자들은 다 아시겠지만 병사들의 임무 중에 전시가 아닌 평시에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가 경계입니다.
더군다나 전시 때에 경계병의 임무는 전 부대원의 생사가 걸려 있는 가장 위험한 임무 중에 하나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경계의 가장 무서운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방심입니다.
성도의 기초 체력 중에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방심함일 것입니다.
방심하면 깨어 있지 못합니다.
흐트러지고 무너집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심하면 안 되는 각종 영적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분파주의, 지혜라는 우상, 각종 차별, 부자와 빈자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갈등,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배격하는 교만, 성적인 타락에 대한 무지, 독신과 재혼에 대한 그릇된 신앙, 무질서한 만찬, 몰지각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앙 등등 정말로 교회 안에서 부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총망라되었을 정도의 문제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은 깨어 경계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였던 기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통해 민감하게 배워야 할 교훈은 다윗이 행한 성적 타락에 대한 죄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방심함이라는 영적인 대적입니다.
사무엘하 11:1-2절을 읽어 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의 범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암몬과의 전시이기에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간인데도 잠 잘 시간이 아닌 이른 시간에 잠을 잤다는 것.
일어난 후에 너무 한가하여 왕궁 옥상으로 올라가 유유자적하고 있었다는 점 말입니다.
사무엘하 기자의 이런 표현은 단순히 다윗의 동향을 보고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는 지금 다윗이 흐트러져 있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방심하고 있음을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학적인 이론 중에 ‘나비효과’ 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풀면 이런 뜻입니다.
초기의 수치에 따른 미묘한 차이가 크게 증폭되어 시간이 지난 후에 엉뚱한 차이와 결과를 나타낸다는 이론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나비의 날개 짓이라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미미한 것이 폭풍을 일으키는 전조가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교훈은 그래서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결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하는 교훈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나비효과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마감하면서 결정적으로 담아야 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야 깨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한 제 문제의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이 답은 제 말이 아닌 김기석 목사의 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김 목사는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에서 깨어 있는 자가 걸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립니다.
“우리의 생에 봄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경구들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그럴 목적이라면 명심보감을 보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략)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는 길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거나 설사 읽는다고 하더라도 밑줄만 긋는다. 말씀을 인용할 줄은 알지만 그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나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이다.”(p,299,303, 310에서 발췌)
두루뭉술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넘어가지 마십시다.
기초 체력을 무너뜨리는 원흉입니다.
84번에 걸쳐 설명했던 고린도교회에 팽배했던 쓸데없는 이론, 지식, 올바르지 못한 종교적 행위에서 벗어나십시다.
그리고 바로 이 촌철살인을 붙드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이다.”
이것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아낼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영적 기초 체력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탁구장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탁구장 관장에게 레슨을 받는 초보자와 그냥 운동하러 나오는 초보자의 성장 속도는 조금 과장하면 10배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기초를 배우고 안 배우고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말씀으로 깨어 십자가의 도라는 그 믿음에 굳게 서서 용감하게 힘을 내 시대에 아픔들을 극복하며 그리스도인들도 멋있게 승리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뼈들에 생기를
저 죽어 가는 내 형제에게 생명을 주소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내일을 빼앗긴 저들에게
저 소망 없는 텅 빈 가슴에 새 날을 주소서
고통의 멍에에 매여 신음하고 있는 저들에게
아버지여 이 백성 다시 살 게 하소서
묶였던 자 자유케 되는 영광의 날을 주소서
아버지여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다시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