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4번째 강해) 제목: 나는 그 사람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6:10-12 서론) 지난 주간에 제 제자 중 한 명이 SNS를 통해 본인이 작금에 느끼는 40대 초반에 들어선 가장으로서 이모저모의 심정에 대하여 밝혔습니다. 대체적인 내용은 40대 그러니까 불혹의 나이에 들어섰는데 뒤돌아보니 여러 가지 부족한 자아를 보면서 우울증 초기의 심정이라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글을 보다가 SNS를 통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건이 아니라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제자의 떨리는 음성을 듣고 다른 이야기하지 않고 ‘잘 이기자.’고 독려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간단한 제 이야기를 듣고 제자는 울먹였습니다. 이유는 어려서 제자가 당했던 고비들을 이기도록 그 당시 기도해 주었고 돌보아 주었던 옛 담임목사임을 아는 제자였기에 그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본인에게 예기치 않게 전화해 준 스승의 한 마디에 숨겨왔고 드러내지 않았던 아픔들을 울음으로 표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도 잘 해왔지만 앞으로도 잘 할 것을 믿는다는 위로를 전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이후 제자를 위해 중보 할 것을 아내에게 전하자 아내의 첫 마디가 이랬습니다. “○○이는 좋겠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오래된 담임목사가 잊지 않고 전화까지 해서 격려하고 위로했으니. 행복한 제자네.” “목사님, 30년 목회를 하면서 무엇이 남았습니까?” 만에 하나 이렇게 누군가가 저에게 질문을 하신다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죠.” 가만히 뒤돌아보면 마른 장작 나무 같은 참 볼품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같은 생각, 같은 마음, 같은 철학, 같은 공통분모를 고민하며 달려온 동역자들이 주변에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저에게는 30년 목회의 보람이자 열매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촌스러워 보이지만 결코 이것만큼은 타협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원색적인 복음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 하나를 붙들려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이 땅이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공의와 정의를 이루어가려는 고집스러운 제자들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오실 주군이 완성하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 날을 고대하며 고지식하게 달려가 주는 제자들은 저의 보물들입니다. 내가 만든 성령,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령, 그리고 신비적 은사주의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오직 바른 성령의 은혜에 천착하고 성공주의와 번영신학과 분연히 맞서 싸우는 제자들이 있어 그들이 참 자랑스러운 행복한 목사로 지난 30년을 살아 온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이런 제자들을 자랑합니다. 주판알 튕기지 않고, 머리 비상하게 굴리지 않고, 영악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쳐주는 제자들이 있는 처처에서 주의 복음을 들고 달려가고 있어 목사로서 헛살지 않았음에 참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이들 모두는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입니다. 헌데 이강덕 목사에게만 이런 동역자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에게도 이런 소중한 동역자가 있었음을 편지 말미에 밝히고 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방문을 하려는 스케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상황이 허락하면 고린도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마게도냐를 거쳐 늦가을 즈음에 고린도로 가서 겨울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어 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또 하나 고린도 방문이 지체된 이유는 아직도 에베소에서 해야 할 사역이 남아 있기 때문임도 설교를 통해 살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당장에 고린도로 갈 수 없게 됨에 대한 양해를 고린도교회 형제들에게 구했고, 지금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자기를 대신할 위임자를 고린도 보내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동역자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본문의 시대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그에게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였으되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이 구절을 바울이 소개한 이유를 보면 당시 고린도 교회 공동체 안에는 아볼로를 추종하던 아볼로파의 구성원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인의 고린도 방문이 늦어짐에 따라 바울의 위상과 걸 맞는 지도급의 위치에 있었던 아볼로를 원하는 고린도교회의 정서를 알고 있었기에 왜 아볼로를 보내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이 전후내막을 밝히지 않았을 때 돌아올 후폭풍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바울이 아볼로를 라이벌 관계로 생각하였기에 그와 관계가 소원하였고 이로 인해 그를 추종하고 있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고린도로 보내기를 꺼려했다는 오해를 일소하기 위해서 본문 12절을 편지에 첨가한 것입니다. ② 대신 보낼 디모데가 받아야 할 홀대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차원에서 아볼로를 언급하였습니다. 아볼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무엇이었습니까? 본인과 바울은 결코 적대적이거나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 한 팀임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12절에 기록된 ‘권하다.’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권하다’라고 번역한 헬라어 ‘파라칼레사’는 원 뜻이 ‘가까이에서 부르다’ 혹은 ‘초청하다. 간청하다.’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는 바울이 아볼로와 경쟁 관계나 아니면 상하관계에 있기에 그에게 명령하는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며, 더불어 적어도 아볼로와 가장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단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공동체에서 형제를 원하고 있는데 그 방문에 응답해 줄 수 있는가를 정중하게 권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차례에 걸쳐 권하였다고 증언합니다. 헌데 아볼로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정중한 고사였습니다. 본문 12절 하반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왜 아볼로가 바울의 간절한 청을 고사했습니까? 복음주의권에 있는 학자들의 해석으로 접근하면 이렇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는 1장에서 살핀 대로 4개의 분파가 치열한 대립 구조를 띠고 있었는데 만에 하나,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로 가는 경우 다음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고린도교회 일부 공동체 구성원들이 바울을 반대하면서 아볼로를 리더로 치켜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에 아볼로가 고린도로 가는 경우, 바울의 부재 속에 있는 상황 하에서 바울의 권위를 훼손하는 권력의 장난으로 이해될 수 있었기에 아볼로는 고린도 행을 거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리처드 헤이스, 현대성서주석, ‘고린도전서’,p,465.) 헤이스 박사의 해석이 맞는다면 아볼로 역시 대단히 바울과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갖고 있음을 알려주는 설명이 됩니다. 이상의 주석적인 설명이 주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경쟁관계나 대립의 각을 세운 관계가 아니라 서로 한 팀으로 협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아볼로를 배려하고 또 고린도 교회 공동체 지체들에게 본인과 아볼로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면서 고린도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령을 보내기로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전령은 바울의 양아들이자 제자인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를 급파하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세은 목회자로 대단히 중요한 몇 가지를 당부하는 것은 물론 또 다른 시각으로 보면 획득된 권위로 양아들에게 명령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아시는 것처럼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을 했을 때 만나 회심시킨 첫 열매였습니다. 이후 바울은 디모데를 잘 양육해서 그의 양아들까지 되게 한 동역자가 되게 하였고, 바울의 2,3차 전도여행의 신실한 파트너로 부상하게 할 정도로 신임한 동역자가 디모데입니다. 바울이 순교를 당한 뒤에는 바울이 살아생전 참 많이 공을 들이고 사랑했던 에베소 교회의 제 2대 담임자가 되어 그곳에서 스승처럼 사역을 하다가 순교까지 하게 된 제자가 바로 디모데입니다. 헌데 본문에 등장하는 디모데는 바울이 보기에 대단히 여린 사역자였습니다. 제일 먼저는 나이가 연소했습니다. 이로 인해 권위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데이빗 프라이어는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디모데는 민감하고 신경이 예민하고 머뭇거리는 사역자로서 끊임없이 사기를 북돋아 줄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 (p,378.) 이런 천성과 더불어 나이가 연소하였기에 바울은 항상 사역자로 긴장할 것을 디모데에게 민감하게 요청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염려함으로 권했던 말씀을 살펴보십시다. 디모데전서 4:12-16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바울은 디모데 자신에게 이렇게 영적인 내치에 소홀하지 말 것을 종용했지만 반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2:22절을 읽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본 서인 고린도전서 4:17절에서 이미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디모데를 일찍이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이렇게 디모데에게 영적인 지지와 격려를 하였던 바울이었기에 오늘 본문에서도 편지 끝에 아주 강하게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조의 권면을 한 것입니다.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10절)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11절) 저는 지금까지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본문을 교우들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해석하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제 본문 주해를 통해서 오늘 이 본문이 주는 은혜를 살펴보십시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디모데에게 감정을 이입해 보는 생뚱맞은 생각을 말입니다. 디모데가 바울의 권면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혹시 바울의 권고를 귀찮아 하지 않았을까요? 사사건건 무언가를 요구하는 바울이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공부를 하는 것에,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것에, 말과 행실에 대하여 조금도 소홀하지 말라는 양아버지이자 사역의 선배인 바울의 그런 옥죄임에 숨 막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이라는 존재는 귀찮은 존재, 성가신 존재,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가장 최고의 멘토였다. 디모데에게 있어서 바울은 존재 자체가 은혜였다. 어떤 의미로 보면 디모데에게 바울은 주군이신 예수님 다음으로 닮아가고 싶은 최고의 선생님이었음에 틀림없다.” 기록에 의하면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쓸데없는 우상에게 목숨 걸지 말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님께도 돌아오라고 외치다가 우상 숭배자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디모데가 바울을 귀찮아했다면, 그의 소리를 잔소리로 들었다면, 요즈음 아이들의 언어로 표현해서 바울을 꼰대정도로 여겼다면 그가 에베소에서 바울이 했던 그대로 원색적인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겠습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종에게 영적인 감동이 임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인가? 의 감동 말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정말로 신앙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나는 지지받고 있는 사람인가?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의 형제, 자매들에 의해서 누군가에게 추천받을 정도로 신뢰를 받을 정도로 나는 하나님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인가? 어느 날,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게 받은 전화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음을 걷고 있는가? “나는 당신 때문에 예수가 보입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영적으로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지금 영적으로 신앙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 나는 오늘 바울이 그렇게 인정했던 디모데와 같은 그 사람입니까? ※ 나는 오늘 신앙의 동지에게 인정받는 바로 그 사람입니까? 2주 전에 춘천에서 동기 모임이 있어서 친구들과 반가운 만남을 가졌습니다. 춘천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의 초청으로 다녀오게 되었는데 사석에서 친구가 이런 말을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이 목사, 박 모세 전도사가 제천 세인교회에서 사역했다며?” “그래, 아들이 사역할 때 동기라서 교육전도사로 1년 정도 동역했었다.”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서울신대원에서 강의했는데 클래스에 들어와 본인의 삶의 나누다가 이 목사 이야기를 하더라. 1년이라는 아주 짧은 사역을 했지만, 목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설교를 위해 어떤 공부와 노력이 필요한지, 그리고 사역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했는지에 대하여 정말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전언 받다가 친구의 말이 립싱크이었다고 해도 듣기에 거북하지 않고 기뻤습니다. 불과 1년 밖에는 사역을 하지 않았는데 목회자로 그런 시간으로 훈련 받았다니 참 감사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다가 받았으니 주어야 할 것 같아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학기였습니다. 설교의 이론과 실제라는 과목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겸임으로 강의하고 있는 친구에게 수강했습니다. 학기 중에 아들과 사석에서 만난 때가 있는데 뜬금없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오생락 목사님이 동기시죠?” “그래.” “서울신대에서 공부하는 동안 최고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인격도, 지성도, 그리고 가르침도” 여기까지 아들이 했으면 동기 목사를 그렇게 존경하고 따르니 얼마나 제 딴에는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아들놈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친구니까 좀 배우세요.” 조금은 시기가 낫지만 그래도 배워야 할 게 정말로 많은 친구이기에 그냥 당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들이 그렇게 영적으로, 지성적으로, 목회적으로 닮고 싶은 스승을 만났으니 말입니다. 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행운이며 축복입니다. 내가 그 누군가에게 선한 영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자로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어마 무시한 복입니다. 아시는 교우들은 알겠지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로마의 옥에 갇혔을 때에 빌립보 교회로 가서 형제들의 사랑을 담아 바울에게 가져간 형제였습니다. 헌데 그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빌립보 교회 형제들이 염려함으로 기도했는데 은혜로 회복이 되자마자 빌립보 교회 형제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담은 구절이 바로 빌립보서 2:25절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이 글을 만날 때마다 에바브로다도에게 영적인 시샘이 납니다. 바울에게 사랑받고 있는 자, 빌립보 교회의 형제들에게 인정받는 자, 에바브로디도 최고의 복된 자가 아닐까 싶어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로마서 16장의 한 구절을 나눕니다. 16:22절을 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잘 아시는 것처럼 로마서는 대 서사시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로마서의 권위는 기독교에서 엄청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엄청난 책을 시력이 안 좋았던 바울은 직접 기록할 수가 없었습니다. 해서 그는 말하고 한 사람이 대서했습니다. 그가 바로 더디오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역작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바울은 이 편지를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로마까지 전달할 전령으로 아주 의외의 인물인 여성 사역자 뵈뵈를 낙점했습니다. 당시 이 엄청난 편지를 뵈뵈 자매만큼 신뢰할 만한 동역자가 없었기에 그리 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눈이 어두웠던 바울이 이 편지를 어중이떠중이인 그 누구에게 대서하라고 할 리 만무입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뒤에 낙점 된 인물이 더디오입니다. 무엇을 가늠하게 합니까? 바울이 갖고 있었던 더디오에 관한 신뢰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 못지않게, 뵈뵈 못지않게 복 받은 사람 더디오. 세인의 지체들에게 이런 공유함의 은혜를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에게 있어서 에바브로디도 같은 그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바울에게 있어서 뵈뵈 같은 바로 그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바울에게 있어서 더디오 같은 바로 그 사람입니까? 결론) 말씀 맺겠습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 저널 7월호에 이런 글을 삽입했습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 참 격려해 주고 싶은 지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는 아무리 새겨 보아도 리더의 자질이 있다. 헌데 그의 자리는 언제나 팔로워의 자리다. 거기에 먼저 서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 않다. 몸에 배어 있는 삶의 태도와 성향 자체가 그를 그렇게 서게 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필자는 알게 되었다. 분명 팔로워의 자리를 언제나 늘 항상 지키고 있는 그를 공동체의 지체들이 리더로 인정하고 있다는 선명한 감동 말이다. 그를 보면서 떠올린 글이 있다. 사하라 사막의 가톨릭 선교사인 샤를르 드 푸코의 좌우명이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거하고(Present to God)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삶(present to people)”(고든 맥도널드,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p,19)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항상 기억에 남는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이런 욕심을 내 보겠습니다. 이강덕 목사에게 여러분은 하나님께 추천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앞에 거하고,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찬양 드립니다. 너의 푸른 가슴 속에 십자가의 흔적 있다면 주 위해 이제 일어나 너의 믿음 주께 보이라 너의 뛰는 가슴 속에 하늘의 불 타고 있다면 그 나라 그 영광 위해 너의 삶을 주께 드려라 오랫동안 꿈꿔왔던 그 나라 이제 곧 오도록 우리 주의 은혜의 강 이 땅 휩쓸며 흐르도록 하나님의 눈물을 가진 자 일어나 주님을 따르라 너의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면 온 세상 주 영광 보겠네 너의 삶을 불태워 주를 섬겨라 주의 영광 나타나겠네 오래 황폐한 이 땅 꽃을 피워라 주의 향기 가득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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