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정글이지만2024-02-26 15:53
작성자 Level 10

2018년 7월 1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3번째 강해)

 

제목: 정글이지만 

본문고린도전서 16:5-9

 

서론)

 

언젠가 사석에서 후배 목사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배님독립 교회라서 이전에 교단에서 사역하실 때에 비해서 목회가 훨씬 자유롭고 수월하시지요?”

이 말을 듣고 제가 웃으면서 교단에서 목회를 하는 후배에게 이렇게 반응한 적이 있습니다.

후배님자유로워 보이는 우리 교회와 그러면 바꿀까?”

이제는 오래 된 이야기입니다.

후배가 총회 본부 교육국에서 국장으로 사역을 할 때어떤 교회학교 부흥 컨퍼런스에 초청되어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사역을 하던 교회는 중소형 교회 중에 전국교회 경쟁력 1위의 기염을 토하던 때라 후배가 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이 많아 보이는 분위기의 세미나 모임이었습니다.

당시 정황은 교회 학교가 무너지고 있는 살벌한 분위기를 반영한 듯 분위기는 무거웠습니다.

컨퍼런스 성격의 모임이었기에 발제를 맡은 상당수의 강사들은 교육학을 전공한 교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컨퍼런스의 수준이 질 낮게 떨어지지 않도록 나름 준비한 연구 보고서를 최선을 다해 발표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왠지 모르게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장의 감각들이 전혀 배제된 구름 잡는 이야기들의 말잔치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교육국장으로 있는 후배가 저에게 코멘트를 부탁하기에 당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교회는 정글입니다이론만 가지고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정글입니다조금이라도 정신 줄을 놓으면 생명을 잃기 십상인 정글입니다해서 교회 학교를 비롯한 일체의 교회 영역에서 지금은 전사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신학적인 진단과 이론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해 나갈 정글 같은 현장의 투사 말입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기억을 되살려 이 에피소드를 교우들에게 오늘 설교에서 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후저는 교회 현장을 정글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음을 피력하기 위함입니다.

그 교회 현장이 도시이든시골이든자립교회든미 자립교회든 예외가 아닙니다.

해서 교회 사역자들은 정글에 산다는 심정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고 있는 논제는 조금이라도 인공적인 조미료를 가감한 상태의 비약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실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실천신학적인 진단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고집에 따른 우격다짐이 아니라 본문 말씀이 증언해 주는 실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전제로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론)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후 1세기 대형교회 측에 속하는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을 향하여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이타적인 마음을 갖고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에 참여할 것을 바울이 종용하는 메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강력하게 요청한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는 연보라는 물질로 대체되었음을 나누면서 결국 우리들이 함께 나누는 물질은 천박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타적인 성격을 띠지않을 때 언제나 맘몬이라는 신으로 추앙받는 하나님의 또 다른 대체어와 맞설 수 있는 신앙적 행위임도 살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예루살렘 모 교회에서 전해줄 구제 연보에 대한 당부를 마친 바울이 본인이 앞으로 어떤 동선(動線)으로 고린도에 방문하게 될 것인가를 알려주는 단순한 정보 같이 보이는 텍스트입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지만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후 행선지 보고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사역자 바울의 고뇌가 담겨 있는 본문이기에 주목할 만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에베소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기록된 증언으로 인해 우리는 바울이 이 시기에 2년 6개월 혹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머물러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왜 에베소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머물렀는지는 본문 9절이 짐작하게 합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아시는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두란노 서원에서 3개월 동안 에베소 시민 중에 마음이 열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강론할 정도로 에베소는 복음의 황금 어장과도 같았기에 본문에서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다.’고 술회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지역에는 이렇게 복음 증거의 긍정적 상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와 정반대되는 아슬아슬함도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이끄는 아데미 여신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방해와 핍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르쳐 바울은 본문에서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호불호가 분명한 에베소를 그래도 사랑했습니다.

해서 무려 2년 6개월 내지 3년이라는 세월동안 이 지역에서 최선을 다해 사역했습니다.

사도행전 20:17-21절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전 밀레도 항구에서 만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향하여 고백한 에베소 목회의 추억담입니다.

그는 이 발언에서 에베소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한 사역을 감당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사랑했던 지역인 에베소에서 오순절 기간까지만 머물고 이제 또 다른 선교 여행을 계획하고 있음을 바울이 피력합니다.

본문 5-6절을 읽어봅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 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가서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원래의 계획은 이러했습니다.

에베소를 떠나 바닷길을 이용하여 고린도를 먼저 방문하고 그 후에 마게도냐를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계획이 변경된 것입니다.

마게도냐를 먼저 방문하고 그 후에 고린도로 가는 스케줄로.

갑자기 스케줄이 바뀐 것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바울의 반대편에 있었던 자들은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의 신실하지 못함을 보고 비난하였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는 고린도 교회의 반대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달랩니다.

본문 7절을 봅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무슨 말입니까?

마게도냐는 스쳐 지나갈 것이고 고린도에서는 오래 동안 머물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더불어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을 해서 함께 머문 뒤에 그 다음의 사역을 고린도교회의 지체들과 상의해서 고린도 교회 공동체와 연대할 것을 시사하기까지 합니다.

6절이 그 증거입니다.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보내어 주기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프로펨페인이라는 단어가 당시에 선교사들을 지원하는 전문 용어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네트워크를 형성하겠다는 바울의 의지 표명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바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세웠지만 본문 구절 중에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한 구절을 교우들에게 의미를 갖고 전하겠습니다.

본문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

보이십니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구절이.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머물면서 본인이 해야 하는 사역을 설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술했듯이 마게도냐와 고린도 방문에 대한 나름의 계획도 세웠습니다.

이 계획은 머리가 비상했던 바울이 민감하게 세운 마스터플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계획을 설정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역의 전제 조건을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세운 일체의 계획과 프로그램이 진행되려면 하나님의 사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는 계획은 계획이지 확정 사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조금 자극적인 단어로 바꾸면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주제입니다.

월권 금지

바울의 이런 신앙적 철저함은 비단 오늘 본문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을 은혜롭게 마치고 다시 재충전을 한 뒤에 2차 전도여행을 시작을 알리는 장입니다.

헌데 2차 전도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16장에서 저와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진면교사를 하게 해 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행전 16:6-8절을 읽겠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아시아는 갈라디아로 통칭되는 지금의 터키 북부지역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의 프로젝트를 아시아 지역을 설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사역을 막으셨다고 사도행전 16:6절을 보고합니다.

성령께서 길을 막으시자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팀은 그러면 차선으로 가려고 했던 곳이 또 다른 아시아 지역이었던 무시아와 비두니아였습니다.

헌데 사도행전 16:7절에 의하면 이번에는 예수의 영이 그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서 바울이 택한 방법은 지금의 그리스인 마게도냐(유럽)로 들어가는 길목인 드로아로 내려갔다고 누가는 사도행전 16장의 2차 전도여행의 동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의 결과론적인 보고가 주는 감동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주님의 계획을 결코 넘어서지 않았다는 은혜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월권 금지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83번째 고린도 강해를 통해 오늘 우리 세인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영적인 교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월권 금지란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代入)하는 것입니다대입 이후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면 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다음을 전제한 것입니다.

허락하셔야 실행하겠다는 숨고르기 말입니다.

역설하여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담임목사가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면 이렇게 반문하는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목사님의 설명이 구름 잡는 것 같습니다하나님의 허락이 떨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계신다면 심정적으로 유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왜요?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 번도 대입하며 살아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대입하면 언제나 나에게 불리하게 조명하시는 하나님의 선명하신 권고를 받기 싫어했거나 이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지성으로 인정받는 예일대학 조직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 박사가 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국제자훈련원 간)에서 행했던 말이 석학이 했던 말이라서가 아니라 지성적 톱 레벨에 있는 신학자인 그의 말이 신학적 깊이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면 느껴지고 체휼될 수 있는 진솔한 울림이라 가슴에 깊이 담아 설교 노트에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수행되는 모든 인간의 노동은 대양의 물가에 세운 모래성과 같은 수명을 갖고 있다반면하나님과 함께 수행되는 모든 선한 일 곧 인간이 창조하는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영원히 보존 될 것이다.”(P,233)

미로슬라브 볼프 박사의 말을 적용해 본다면 하나님과 함께 수행하는 일과 하나님 없이 수행되는 일의 간극은 이론으로 설명될 수 없을 만큼 큽.

그렇다면 이렇다는 것을 아는 자의 선택이 무엇이겠습니까?

두 말할 나위 없이 내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에 대입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대로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는 자는 내 생각을 하나님이 허락하라고 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조명 받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는 일체의 노력에서 민감해 합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해 보십시다.

내 생각에 대한 주도권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먼저라고 생각하는 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예수를 믿는 시간 낭비를 합니까?

내 생각이 신앙의 대상이고 궁극적 신봉의 대상인데 왜 예수를 믿는 허송세월을 보냅니까?

그 시간에 도리어 내 생각을 마음껏 펼치는 자유의 나래를 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시대의 무신론적인 대변인으로 서 있는 그래서 만들어진 신을 외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슨이 외치고 있는 것처럼 아마도 하나님은 안 계실 가능성이 많으니 인생을 마음껏 엔조이하라는 그의 말에 반응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고 최정희 집사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즈음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조명하심 때문에 굴복한 적이 있습니다.

네 생각으로 내 생각을 바꾸려 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에 항의를 끝냈습니다.

나는 최정희 집사를 하나님이 왜 데리고 가셨는지에 대하여 이 땅의 사고로 이해할 수 있거나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지금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것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분명히 조명해 주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 말입니다.

그 의지에 대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월권 금지의 삶입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성서일과로 읽었던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소개합니다.

이사야 8:16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이 구절은 우리들이 심사숙고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아하스의 치세 때에 이사야에게 주신 신탁입니다.

유다의 12번째 왕이었던 아하스는 하나님의 통치를 믿지 못하고 자꾸만 앗수르라는 이방의 나라를 붙드는 어리석음을 자행합니다.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위협에 불안해하던 아하스는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하는 정책을 핍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고 다메섹이 멸망할 것이며 네가 의지하는 앗수르에게 북 왕국의 사마리아가 함락 될 것을 여러 방법들을 통해 깨우쳐 주었지만 듣지 않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할 것을 예언자에게 명하십니다.

다시 이사야 8:16절입니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저는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이런 선언을 많이 하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비극은 말씀의 단절이라고 했습니다.

아하스가 통치하던 주전 736-716년이라는 약 20년의 세월동안 유다에게 임한 가장 심대한 비극은 하나님의 율법이 봉함된 비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봉함하라는 주님의 서슬이 시퍼런 명령은 결국 유다에 하나님의 조명하심을 단절한다는 최후의 통첩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의 비극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무엘상 3:1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그렇습니다.

다바르’(말씀)의 부재였습니다.

북 왕국 여로보암 2세라는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임한 치명적인 시대의 비극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모스 8:11절의 예언서는 이렇게 갈무리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그리스도인들이 삽니까?

월권하기 때문입니다.

왜 월권할 수 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기갈하나님 말씀의 희귀함그리고 좀 더 능동적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감추심 때문에 내 삶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 일하심에 상관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 저에게는 조니 와이즈 밀러가 분()한 타잔은 영웅이었습니다.

정글에서 제인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언제나 아아아 하고 나타나 그녀를 구출해 주는 장면에서 나도 크면 타잔이 될 거야!라고 다짐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정글에는 타잔이 나타나도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타잔의 힘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무시무시한 위험과 위기가 난무한 지금 우리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타잔이 아니라 월권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하나님이 조명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말씀은 그냥 당연히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 삶의 방향성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끌어 주는 타잔과도 같은 역할은 살아계신 말씀이 합니다.

바라기는 말씀 위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선명하게 묻고 질문하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사명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