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타적인 교회
본문: 고린도전서 16:1-4
서론)
이제 우리는 기나긴 고린도전서라는 여행을 마치게 되는 마지막 장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2016년 9월 18일 주일부터 시작된 장장 1년 10개월 동안의 여정 중에 어떤 때는 어려운 본문 해석으로 인해, 또 어떤 때는 담임목사의 본서 해석이 내가 알고 있는 해석과는 달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설교자의 수고와 노력을 인정하려고 최선을 다하며 달려와 준 교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올려드립니다.
분명히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12장을 여행하면서 각종 은사에 대한 해석을 할 때 균형을 잡으려는 은사 해석으로 인해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론을 근거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해서 이미 알고 있는 고정화된 은사론에 천착되어 있는 지체들은 매우 혼돈스러웠을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전한 메시지와 신학적 성찰에 대해 겸손하게 수용해 준 성도들은 박수를 받을 만한 제천 세인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저력이었습니다.
불과 지난 주에 강해를 마친 15장 부활 장 해석에 즈음해서는 교회 내적인 지체들로 인한 어려움이 아니라 온 라인 상으로 담임목사의 설교가 공유되기에 외적으로 당해야 하는 급진적 성서 해석자들에 대한 공격에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공격이 첨예하다고 할지라도 복음주의 권의 목사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사도적인 전승에 의해 교회에서 가르쳐 왔던 부활 신학에 대해서 교우들에게 전한 것은 목사가 싸워야 하는 세속 신학의 물결을 거슬렸다는 점에서 저는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바른 신학이 지탱하고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밑힘의 교리가 외롭고 힘들어도 함께 지켜 가는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달려온 고린도전서 강해의 16장은 마지막 장이기에 이제는 숨고르기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16장을 시작하는 첫 단락은 결코 얕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발톱을 내밀고 있었기에 호흡이 더 가빠지는 느낌입니다.
결코 만만하지 않은 본문이지만 또 주군을 의지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으며 본문 여행을 떠나보렵니다.
본론)
지난 주간에 아들이 방학을 맞이해서 제천에 내려와서 며칠을 머물다가 사역지로 올라갔습니다.
이야기 중에 아들이 이런 전언을 해주었습니다.
친구가 시무하는 교회의 상황 전달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친구가 사역하는 교회의 담임목사님 설교의 내용이 이런 패러다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헌신, 희생, 헌금, 축복의 궤도로 진입했다고.
일시적인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이어 이 사이클이 이어졌다는 점에 친구가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를 추론하다가 그 교회의 헌금 액수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보고를 전해 주었습니다.
해서 담임목사는 긴장하게 되었고 예산을 채우기 위한 전쟁 모드에 돌입했다는 뭐 그런 류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같은 하늘 아래의 목양 현장에서 함께 주의 복음을 들고 사역하고 있는 저는 그 목사가 얼마나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으면 그렇게 인위적인 설교를 할 수밖에 없었을까?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만의 개인적 소회인지는 모르겠지만 헌금 설교는 강심장이 아닌 이상 모든 목사들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설교입니다.
해서 가급적이면 피하고 싶은 설교가 헌금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앞서 전술했듯이 고린도전서라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여행을 거의 끝마칠 즈음이기에 이제는 수월할 테지 라고 생각하고 싶었는데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헌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슬픈(?) 본문이라 긴장했습니다.
목사들에게 있어서 강해 설교는 상당히 많은 장점이 있는 설교 방법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명상이 있습니다.
본문을 건너 띨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기에 힘들겠지만 본문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바울은 부활이라는 교리의 강을 건넌 뒤, 갑자기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돈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권하지 않고 ‘명’(디에탓소)한 내용이 바로 1절입니다.
다시 말하면 강제적인 압력의 모드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에베소에서 쓰고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4절을 보면 바울은 머지않아 고린도로 넘어 갈 것을 예측하게 합니다.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갈 것처럼 표명하면서 명한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연보입니다.
1-2절을 다시 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1,2절에 연이어 사용한 단어가 헬라어 ‘로게이아’ 즉 ‘연보’라는 단어입니다.
연보라는 단어는 특이하고 오늘 읽은 이 본문에서만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로게이아’는 어떤 어원적인 뜻이 있을까요?
가장 적합한 해석은 이것입니다.
‘돕기 위한 헌금 즉 구제금이었다.’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AD 1C 문서인 파피루스 문서에는 세금의 의미로
로게이아‘가 사용되었기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말한 것은 일종의 의무금인 세금의 성격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438)
그러나 이에 반해 복음주의 권에 신약학자들은 연보 즉 ‘로게이아’를 세금 성격의 상납금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유불급의 해석이고 대체적으로는 돕는 헌금 즉 구제금으로 해석합니다.
저 역시 후자를 지지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1:28절을 읽겠습니다.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는 AD 41-54년까지 13년 동안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헌데 그가 재위한 시기인 46-48년 사이에 그의 통치 지역이었던 팔레스타인에 심한 흉년이 들었음을 역사가 증언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상황은 극도로 피폐해졌는데 이런 고통은 글라우디오가 재위하던 말년의 시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이 편지의 집필 시기를 주후 53-55년 사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연대기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오늘 본문 사역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됩니다.
기근으로 인해 극도로 생활이 피폐해진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바울은 이방 교회들이 함께 힘을 모아 구제의 연보를 드릴 것을 강하게 역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저 또한 지지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 구제 연보의 요청은 바울이 역설했던 다른 여타 사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당히 강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 주 첫날은 말 할 것도 없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을 역설하고 있습니까?
주일마다 구제 연보를 따로 떼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지체들을 향하여 매 주일마다 구제 연보를 따로 떼어 놓으라고 강제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고린도에 혹시 가게 될 때 즉흥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연보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바울이 얼마나 구제 연보에 대하여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것은 이 구절은 경우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헌금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위험천만의 멘트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제 본문 주석의 마지막 부분을 나누겠습니다.
이렇게 연보를 강조한 바울은 쐐기를 박는 것처럼 보이는 구제 헌금 모금의 압권을 본문 3-4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3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고린도교회 지체들이 그렇게 준비된 구제 헌금을 모아두면 지금 쓰고 있는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가져갈 형제에게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며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아마도 고린도전서의 공동집필자로 대두된 소스데네일 것입니다.
이 구절은 구제 헌금이 바울의 개인적인 용도로 착복되지 않음을 선언한 내용으로 보입니다.
동역자에게 헌금을 보내라고 한 것은 그만큼 투명성을 담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명령의 말미에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정서적 부담을 안깁니다.
바울은 혹시나 내가 그 형제와 함께 고린도에 갈 수도 있음을 시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종합해 보면 분명한 바울의 의도가 보입니다.
초대 이방교회 중에 대형 교회로 정의되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보입니다.
조금은 천박한 표현 같지만 적절한 이해를 돕기 요즈음의 언어로 설명하겠습니다.
“큰 교회니까 헌금을 많이 하라” 일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제가 드릴 수 있는 본문 해석의 대략적인 설명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된 바울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군말하지 말고 구제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으로 본문 해석의 결론을 맺어야 하는 것일까? 의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들이 주지하는 것처럼 바울은 양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천명한 적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적어도 이 정도의 정신을 갖고 있었던 바울이 이율배반적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돈이나 많이 내라고 말한 것 정도로 본문을 이해해야 할까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제시한 성서적 교훈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 교회와 성도의 정체성이 이타성임을 강력하게 선언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본문의 신학적 교훈과 맞물려 있는 아주 의미 있는 성경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로마서 15:25-26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로 가기 위해 로마를 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이 자꾸만 막힙니다.
바로 그 와중에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쁘게 연보한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된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로마에 사는 형제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말씀입니다.
헌데 여기에 기록된 단어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보’라는 단어입니다.
분명히 저는 앞에서 ‘연보’라는 단어가 ‘로게이아’라는 단어로 기록되었음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로마서 15:26절에 사용된 연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단어라는 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코이노니아’입니다.
또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11:27-30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저는 앞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때의 기근에 대하여 설명 드렸습니다.
이 어려운 시절에 예루살렘 모 교회의 지체들 중에 가난한 성도들이 매우 힘들어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힘을 모아 부조를 만들어 보내기로 했다는 보고입니다.
주목할 단어를 소개합니다.
‘부조를 보내기로’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부조’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놀랍게도 ‘디아코니아’입니다.
헬라어 ‘디아코니아’는 대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번역합니까?
잘 아는 것처럼 ‘봉사’입니다.
코이노니아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왜 안디옥의 이방 교회 성도들, 그리고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의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담은 구제 연보를 ‘디아코니아’라고 불렀을까?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봉사와 돈을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봉사라는 단어의 대전제는 이타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내 중심이 아니라 타인의 중심에 서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설 때 그들이 보입니다.
그들이 서 있는 삶의 정황이 귀하게 보이면 우리는 마치 그 일이 내 일인 양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겨지는 일에 내 물질이 투여되는 것은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에 기록된 연보를 비롯하여 초대 이방교회의 지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 함께 힘을 합쳐 모은 연보는 돈이 아니라 코이노니아 즉 봉사요, 섬김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연보를 강요한 것처럼 보이는 강한 인상이 본문에 있습니까?
이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즉 섬김과 봉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강하게 역설한 것입니다.
어제 토요일 아침 신문기사를 도배한 톱뉴스는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 소식이었습니다.
트럼프는 중국산 수입품을 향하여 25%의 관세를, 시진핑은 미국산 수입품을 향하여 25%의 관세를 매겼다는 보도였습니다.
이로 인해 G2에 해당하는 경제 1,2국의 싸움으로 인해 우리 경제 역시 휘청거릴 것을 예상하는 해서 다방면으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경제 뉴스가 신문의 여러 면을 장식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니까 별로 기대할 수 없다 치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들추어 보게 된 생각입니다.
미국의 달러는 세계 경제의 현장을 대변하는 실체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1달러 지폐에는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톤의 초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적어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할 때 기초를 세운 위정자들은 본인들의 나라가 하나님 대신에 돈이라는 신을 섬기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런 상징적인 문구를 삽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의 미국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까?
1달러 화폐에 문구를 이렇게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Do We trust in GOD really?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그런데 이 질문은 미국에만 던지는 질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 질문은 도리어 오늘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세인교회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들이 이타적인 예물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예민하게 물아야 합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이 마음으로 모은 예물들이 디아코니아의 모습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모으고 있는 물질은 디아코니아 즉 연보가 아니라 맘몬 즉 돈을 신으로 모시고 있다는 증거를 나타내는 슬픈 이야기가 됩니다.
영성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그래서 그의 걸작인 ‘돈, 섹스, 권력’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돈이란 우리가 그 분에게로 향하기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하는 우상숭배이다. 맘몬 신을 거부하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돈은 많은 신적인(deity) 속성을 가지고 있다.”(p,36)
상담신학자인 폴 트립도 ‘돈과 섹스’에서 의미 있는 일침을 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돈 문제와 관련해서는 편안한 중립성의 여지를 남겨 주지 않는다. 그래서 돈은 위험하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하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에 들리는 돈은 복이지만, 악하고 위험한 곳으로 인도하는 통로에 들리면 저주가 된다.”(p,205)
결론)
이렇게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인 지체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에 많은 돈을 헌금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사기 치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여러분이 이타적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드린 예물들을 디아코니아의 섬김의 모습으로 사용함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여러 교우들의 범사를 영, 육의 균형으로 복 주신다고 가르치고 또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진짜로 체험하게 하는 바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차제에 다시 한 번 교우들과 이 구절을 되새김질하기를 소망합니다.
신명기 6:4-9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우리들이 매일 되새기고 다짐한 뒤에 또 곱씹어야 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정신이 출발되어야 한 장소의 시작은 바깥문임을 명심하십시다.
바깥문은 이타적인 교회의 출발선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 안에 우린 하나 모습은 달라도
예수님 한 분만 바라네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격려해
따스함으로 보듬어 가리
주님 우리 안에 함께하시니
형제 자매의 기쁨과 슬픔 느끼네
내 안에 있는 주님 모습 보네
그분 기뻐하시네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부족한 입술로 찬양하게 하신 일
주님 우릴 통해 계획하신 일
너를 통해 하실 일 기대해